[조송원 칼럼] 해장국집 여주인과 절세미인 왕소군(王昭君)

조송원 승인 2020.11.27 21:01 | 최종 수정 2020.11.27 21:23 의견 0

한 사람을 만나 30분 안에 크게 두 번 놀라는 일은 흔치 않는 경험이다. 삶터를 멀리 떠난 여행지에서도 드문 일이다. 무료한 일상에서 이런 놀람과 조우遭遇한다면, 이는 삶의 따분함에 대한 청량제이리라.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인데······. 자꾸 살이 찌는 것 같아서” 첫 번째 놀람이다. 새벽에 자전거를 탄다. 6시30분이면 어둑하다. 이 어스름 자전거 길에서 거의 매일같이 만나지는 사람이 있다. 60대 중반, 곧 초로初老의 여인으로 해장국집 주인이다. 같은 면내에 살지만 그쪽은 날 모를 수도 있다. 새벽에 자주 만나다 보니 목례 정도 건네는 사이가 됐다. 며칠 전 친구와 해장국을 먹으러 갔다. 별스런 인사말도 할 게 없어, 운동 열심히 하데요 하고 말을 건넸다. 그 대답이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이고 ‘살이 찐다’는 거다.

사실 운동과 체중감량과는 별 상관이 없다. 운동은 건강향상에 도움은 된다. 그러나 체중감량은 음식 섭취를 줄임이 더 직접적이고 효과적이다. 운동을 열심히 하는데도 살이 자꾸만 찐다고 투정부리는 사람을 자주 본다. 간단한 일로, 좀 덜 먹어대면 될 것을······. 나는 그런 사람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나를 놀라게 한 말은 ‘지금이 가장 행복한 때’란 데 방점이 있다. 내 상식을 뒤엎었기 때문이다.

듣기론, 이 여주인은 저 멀리 백령도 출신이다. 남편이 해병대로 백령도에서 군복무할 때 만났다고 한다. 평범한 그 남편은 3년 전쯤에 이 세상을 하직했다. 자식들도 곁을 떠났고 홀로 남았다. 허름한 슬레이트 건물에서 국밥집을 한다. 시골 살림에는 생활비도 적게 들고, 노령연금을 받으니 자식들이 애만 먹이지 않는다면 그럭저럭 생활에 나가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딱히 ‘행복’할 만한 건더기는 어디에도 집히지 않는다. 고작 불행에서 탈출한 정도일까 말까. 그런데도 ‘가장 행복한 때’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더구나 그만한 나이에 행복이란 단어는 일상어로 사용하기에 쉽지 않을 터인데.

‘왜 그렇지요?’고 물으려다, 입안에 맴도는 말을 기어이 삼켰다. 다만, 여자의 황금기가 60대 중반 홀로 남았을 때일 수도 있구나. 내 상식이란 잣대는 눈금이 얼마나 흐릿한가. 나아가 사랑이나 동반자는 행복의 필요조건은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은 긴 여운을 남기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참 미인이다. 요즘 배꼽 보이는 애들보다 영 낫네” 친구가 숟가락질을 하다말고, 벽을 응시하며 말했다. 나도 들어오면서 달력과 나란히 걸려 있는, 코팅 속의 동양미인 초상화를 흘낏 보았다. “누고? 양귀비겠지” “아닌데. 왕소군이라 써 있는데” “뭐라? 왕소군이라고!” 두 번째 놀람이다. 이 집 주인은 왕소군이 누군 줄 알고 일부러 그의 초상화를 걸었을까? 왕소군의 기막힌 사연을 알기나 할까? 물때 낀 벽지 가리려 갖다놓은 우연한 그림이 아닐까? 왕소군, 하면 우선 이태백의 시가 떠오른다.

왕소군묘는 중국 내몽골 오르도스(Ordos) 지역에 있는 호화호특(呼和浩特)시
중국 내몽골 오르도스(Ordos) 지역의 호화호특(呼和浩特)시에 있는 왕소군 상 

王昭君왕소군/李太白이태백

昭君拂玉鞍(소군불옥안) 왕소군 치맛자락 옥안장을 스치며
馬啼紅頰(상마제홍협) 말에 오르니 붉은 두 뺨엔 눈물.
今日漢宮人(금일한궁인) 오늘은 한나라 궁녀이지만
明朝胡地妾(명조호지첩) 내일은 오랑캐의 첩이라네.

왕소군의 사연은 기막히다. 전한前漢의 원제元帝는 후궁이 너무 많아 일일이 그들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공에게 그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원제는 그 초상화 중에서 예쁜 후궁을 불렀다. 이에 후궁들은 화공에게 뇌물을 바치며 예쁘게 그려 달라고 애원했다. 유독 왕소군 만은 뇌물을 주지 않고 부탁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원제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그 즈음에 세력이 커지기 시작한 흉노가 입조入朝하여 한나라의 미인을 구하고자 했다. 원제는 초상화 중에서 가장 밉게 그려진 왕소군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떠나는 왕소군의 모습을 보니, 후궁 가운데서 제일 미인이었다. 원제는 후회했지만 이미 결정된 일이라 번복할 수가 없었다. 격분한 원제는 화공들을 모조리 베어 거리에 내다버리게 하고 그들의 재산도 몰수하게 했다.

왕소군은 흉노와의 화친책 때문에 강제로 호한야 선우(單于·흉노제국의 황제)에게 출가하게 된 셈이다. 호한야 사이에서 아들 넷을 낳았다. 그러나 고향이 그리워서일까, 돌아오지 못하고 흉노 땅에서 종국에는 자살했다고 한다.

이태백도 시대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중화사상中華思想, 곧 중국중심주의에 매인 탓이다. 수백 수천 명의 후궁들 틈새에서 아등바등하느니, 차라리 사랑해 주는 흉노황제를 택함이 더 낫지 않았을까? 따져볼 게 많지만, 그건 ‘생각거리’로 묻어 두자.

조송원

가진 것도 적고 홀로 된 60대 초로의 여성은 인생에가 가장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절세미인으로 비중국인일망정 일국의 황제의 사랑을 받았으나, 결국은 자살을 했다. 어떤 인생이 더 나은 삶일까?

세상살이란 어쩜 너무 빤해 한 뼘 물속 들여다보듯 간명하기도 하고, 때론 너무 깊어 그 물속이 열 길도 넘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복잡하기도 하다. 그대가 들여다보는 물속은 한 뼘 깊이의 명경지수인가, 열 길 넘는 깜깜절벽인가?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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