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중독과 아타락시아(ataraxia·평정심) (3) 철학자 디오게네스와 대왕 알렉산드로스

조송원 승인 2021.06.02 09:22 | 최종 수정 2021.06.04 17:45 의견 0

디오게네스의 명성이 자자하여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를 찾아갔다. 디오게네스는 양지 바른 곳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짐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오.” “나는 디오게네스, 개다.” “짐이 두렵지 않소?”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물었다. “당신은 선한 자가 맞소?” “그렇소.” “그렇다면 뭣 때문에 선한 자를 두려워하겠소.”

이에 알렉산드로스가 “소원이 있으면 말하시오.”라고 말하자, 디오게네스는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켜주시오.”라고 대답했다. 무엄한 저 자를 당장 처형해야 한다고 부하들이 나섰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들을 저지하며 말했다. “짐이 만약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것이다.”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사상은 대부분 ‘일화’로 전해진다. 언젠가 플라톤이 이데아론을 설파하며 책상성(性)과 물잔성(性)에 대해 얘기하자, 디오게네스는 말했다. “내 눈엔 책상과 물잔은 보이지만, 책상성과 물잔성은 전혀 안 보이는데?”

디오니게스는 가난했지만, 늘 부끄러움이 없는 자족자제自足自制의 생활을 몸소 실천했다. 평생을 집이 아닌 커다란 통 속에서 살았고, 단 한 벌의 옷만 걸쳤고, 그의 재산이라야 물 떠먹을 때는 쓰는 표주박이 전부였다. 어느 날 개 한 마리가 물을 핥아먹는 걸 보고는, ‘개도 저렇게 물을 먹는데 이딴 게 필요하냐’며 표주박을 내던졌다고 한다. 그는 죽는 순간에도 ‘내 유해를 땅에 묻지 말고 맹수들의 먹이로 던져 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마지막까지 그는 지상의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다간 철학자였다.(나무위키)

알렉산더대왕의 이수스 전투를 묘사한 모자이크. [위키피디아]
알렉산더대왕의 이소스 전투를 묘사한 모자이크. [위키피디아]

알렉산드로스에게 ‘대왕’ 칭호는 걸맞다. Alexander the Great! 그러나 ‘영웅’ 혹은 ‘위대한 자’라 부를 수 있을까? 인도의 초대 총리인 자와할랄 J. 네루는 『세계사 편력』에서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위대한 장군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내가 영웅으로 간주하는 사람이 아닌 것을 확실하다’. 동의한다.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 1726년 볼테르가 영국 여행 중, 영국 지식인들의 논의를 엿들은 적이 있었다. 시저, 알렉산드로스, 칭기즈칸, 크롬웰 중에 누가 가장 위대한가에 대한 논의였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조금도 의심 없이 생뚱맞게 뉴턴이 가장 위대하다고 했다. 볼테르도 이에 찬성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존경할 만한 사람은 폭력으로 인간의 정신을 노예화하는 자가 아니라, 진리의 힘으로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둘째, 왕이나 군주 등 지배자의 평가기준은 ‘피지배자 곧 백성의 삶의 질 혹은 행복’에 둬야 한다. 정복군주로서 세계를 제패한들, 그 백성들이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삶이 피폐해진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마케도니아 인들은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일 뿐이다. 대왕의 정복에의 야망을 꺾은 것은 다름 아닌 대왕의 군사들이었음을 기억하자. 다년간 전쟁의 계속으로 지치고 향수병에 걸린 부대들이 더 이상 진군을 거부하여 알렉산드로스는 어쩔 수 없이 페르시아로 귀환하게 된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 문화(Hellenism)를 이집트와 중앙아시아, 인도 서북부까지 널리 퍼지게 하고, 로마에도 영향을 미치게 한 일은 분명 업적이다. 알렉산드로스는 당시 최고의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아리스토렐레스의 제자였던 만큼 또한 매우 지성적이었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오직 그리스 문화만이 참다운 문화이며, 그리스 외의 것은 모두 야만이라고 믿게끔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호메르스의 『일리아스』를 전쟁 중에도 탐독했고, 실제로 비(非)그리스인은 결코 미개인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 점은 그 당시 대부분의 그리스의 사상가보다 높은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알렉산드로스는 모든 전쟁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이 연전연승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첫째, 아버지 필립포스 왕이 남겨준 군대다. 둘째, 알렉산드로스 자신이 천재적 장군이었다. 셋째, 알렉산드로스의 용감성이다. 결정적 중대 작전에서는 자신이 기병대 선두에 서서 돌격했다. 자연 부하 병사들의 사기가 충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병적으로 자부심이 강했고, 잔인한 기질의 소유자였고, 허영에 가득 찼다. 그는 24세에 이집트 왕 파라오에 올라 ‘나는 신’이라고 선언했다. 테베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하고 전 시민을 노예로 팔아버려 전 그리스인들을 떨게 만들었다. 그는 한때 정복할 땅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한탄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흐느껴 울기도 했다. 그러나 인도 서북부의 작은 지역을 제외하고는 정복하지 못했으며, 그 당시 이미 대국이었던 중국은 구경도 못했다.

기원전 323년 6월 초순 대왕은 돌연 열병(말라리아)에 걸려 불과 10일 만에 죽었다. 겨우 33세. 알렉산드로스는 후계자를 지명해 놓지 않았으므로 그의 사망 후 순식간에 권력 다툼의 내전이 잇따라 일어났다. 그 결과로 대왕의 모후, 왕비, 왕자들 전원이 살해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가족 중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현인賢人은 안다, 자기 그릇 이상의 부도 명예도 사랑도 덧없음을. 천수를 누린 디오게네스와 요절한 알렉산드로스, 어느 쪽이 더 현명한 삶일까?

“짐이 만약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것이다.”

대왕의 진심임을 다시 의심치 않는다.

<작가 /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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