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가 먼 허공을 날아가니,
그림자가 차가운 물속에 잠긴다.
기러기는 자취를 남길 뜻 없고,
물은 그림자 잡아둘 마음이 없다.
雁過長空(안과장공)
影沈寒水(영침한수)
雁無遺踵意(안무유종의)
水無留影心(수무류영심)
- 송나라 천의의회(天衣義懷) 선사(禪師)의 게송(偈頌) -
파이스트는 꼬맹이다. 꼬맹이는 5kg 남짓의 영특한 검둥개다. 이 검둥개를 나는 ‘꼬맹이’라 부르고, 남에게는 ‘파이스트’라 말한다. 애초에는 나와 다름없는 ‘한 생명에 대한 예의’로 꼬맹이를 보살폈다. 내 자신을 꼬맹이에 대해서만큼은 신의 위치에 자리매김한 것이다. 같이 지내다 보니 관계가 조정됐다. 내가 높은 위치에서 하강해 꼬맹이를 반려로 받아들여, 관계가 대등해졌다. 사랑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사랑이 별 거더냐. 같이 있으면 기쁘고, 헤어지려면 아쉽고,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고, 그립고······. 그 사랑의 대상이 사람이든 개든 나무든 또 무슨 상관이랴!
같이 동네 골목길로 들로 산으로 산책을 간다. 사랑하는 사이는 금방 남들이 눈치 챈다. 예사롭지 않는 꼬맹이의 귀염둥이 동작과 충직함, 그 꼬맹이를 대하는 주인의 알뜰한 보살핌과 따사로운 눈길. 사람들은 묻는다, 저 개가 무슨 종이냐고. 구태여 개 족보를 알아서 무엇에 쓰려는 걸까? 그 족보는 나도 모른다. ‘똥개’는 아니다. 똥개보다 더 훌륭한(?) 견보(犬譜)라서가 아니라, 세칭 똥개와는 이미지가 다르다. 그리고 황희 정승의 귀에 대고 “왼쪽 누렁소가 일을 더 잘합니다”고 속삭이는 늙은 농부의 심성으로, 말해준다, 파이스트! 사람들은 파이스트가 무슨 종인지 어느 나라 산産인지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대신 ‘족보가 있는 개는 뭔가 달라’ 이런 독백을 더러 들었다. Feist. 그냥 잡종 개 뜻의 영어 단어일 뿐이다.
이마누엘 칸트는 자신의 묘비명을 이렇게 썼다.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움과 경건함을 주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내 위에서 항상 반짝이는 별을 보여주는 하늘이며, 다른 하나는 나를 항상 지켜주는 마음속의 도덕률이다.”
밤하늘의 별들을 칸트처럼 경외감을 가지고 쳐다본 적은 없다. 젊었을 적 한때, 둑길에 죽 피어있는 코스모스의 아름다움을 보듯, 별을 헤어봤을 뿐이다. 마음은 청춘 그대로이되, 겉허울은 중년에 걸맞을 때부터 일부러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곤 한다. 내 슬픔과 고뇌의 무게를 가늠해보기 위함에서다.
우리의 멀고 먼 조상인 고대 인류는 태양, 해님을 신으로 받들었다. 그 태양은 우리 은하를 구성하는 수천억 개의 별들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 은하의 크기는 지름이 10만 광년이다. 끝에서 끝까지 빛이 10만 년이나 달려가야 하는 거리이다. 우리 은하는 우주에서 관측 가능한 수천억 개의 은하 중 하나일 뿐이다. 더구나 우주에는 수천만 광년 크기의 ‘공간’도 있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 끝을 상상해 본다. 그러나 그 끝은 내 상상 너머에 존재한다. 존재한다는 추론만 가능할 뿐, 이해할 수는 없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티끌만도 못한 미물, 그 미물 가슴속의 슬픔과 머릿속의 고뇌, 어깨에 실린 생존의 무게, 까짓 별 것이랴!
우주의 나이는 138억 살쯤 되고, 지구의 나이는 46억 살쯤 된다. 어느 정도의 세월일까? 머릿속에 그려볼 수도 없는 시간이다. 겁劫이란 세월을 생각해 본다. 천지개벽에서 다음 천지개벽 때까지의 세월? 이도 이해불가능하다. 뒷동산에 집채만한 바위가 있다. 선녀가 100년에 한 번씩 이 바위에 날개옷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 날개옷의 스침으로 이 집채 크기의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 겁이란 세월이다.
“진화로써 인간 탄생의 확률은, 탁상시계를 분해하여 그 부품을 마대자루에 넣고 몇 번 뒤흔드니 완벽히 조립되어, 째깍째깍 잘도 갈 확률과 같다.” 소싯적 신학을 공부하는 친구가 주장했다. 종교적 믿음은 존중한다. 나는 비록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종교의 순기능을 인정하고 종교적 심성은 강하다.
맞다, 그 정도 확률! 누군가가 평생 하루에 100번씩 탁상시계 부품이 든 마대를 흔들어 본다면? 그리고 그 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그렇게 한다면? 선녀의 날개옷 스침에 바위가 다 닳아져 없어질 세월동안 그 마대자루를 흔든다면? 신학하는 친구는 ‘경우의 수’를 너무 적게 잡았다. 지극히 인간적인 범위에서 인간중심적 발상이다. 자연은 품이 너르다. 친구의 주장을 받아들일 만큼 넉넉하다. 그러나 인간이 어떤 주장을 하든, 자연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46억 살의 지구에는 뭇 생명들이 살다가 떠났고, 살고 있다. 약 5백억 종의 생물이 살았다고 추정된다. 현재는 약 170만 종의 생물들이 살고 있다.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생물 종 가운데 99.99%가 멸종했다는 말이다. 살아남은 0.001%에 내가 있고, 꼬맹이가 있었다.
이 광대한 우주의 한 점 같은 공간에서, 무한한 시간 속의 같은 시간대에, 멸종한 수백억 생명 중에서 살아남은 생명체로서의 꼬맹이와 나! 그 길고 짧음의 자질이나 무게 저울질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서로 그리워하는 반려로서의 의미만 돈독하다.
내가 다가가니, 내게로 와서 의미가 된 꼬맹이가 떠났다. 이 떠남을 어떻게 감당해 내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작가 /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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