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변詭辯은 위태한 언설이다. 사전적 정의는 ‘이치에 맞지 않는 구변口辯’이다. 그러나 ‘詭’ 자를 파자하면, ‘말씀 언言+위태할 위危’다. 이쪽 설명이 훨씬 더 간명하지 않은가. 이 궤변을 즐겨 농하는 자들이 있었다. 공손룡과 함께 제자백가 중 명가名家의 대표적인 인물인 혜시(惠施, 기원전 370년?~기원전 310년?)이다. 혜시는 장자와 벗이 되어 더불어 철학을 논했다.
‘알(卵)에는 털이 있다’, ‘청개구리에겐 꼬리가 있다’. 혜시 무리들의 궤변이다. 그런데 이 말들이 정말 ‘위태한 언설’이고, ‘이치에 맞지 않는 구변’일까? 알에서 닭으로 될 때까지의 성장 시간만 문제 삼지 않는다면 참 이치에 맞는 말이다. 꼬리가 있는 올챙이가 자라서 개구리가 된 것이므로 이 논설의 정부正否 또한 시간문제일 뿐이다.
우리는 결코 내일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내일을 위해 오늘을 기꺼이 희생한다. ‘미래 중독’이다. 우리가 그토록 욕망하고 희망하는 내일이란 어떤 모습일까? 한신과 최치원의 일생을 통해 그 단면이나마 살짝 엿보자. 그럼 1편의 최치원 이야기로 돌아간다.
최치원 당시의 신라는 골품제도 얽매인 엄격한 신분사회였다. 성골聖骨, 진골眞骨, 육두품, 오두품, 사두품 그리고 평민. 아마 노비 계급도 있었겠지. 참 희한한 제도이다. ‘뼈다귀의 품격’으로 등급을 매기다니! 성골은 ‘성스러운 뼈다귀’이고, 진골은 ‘진짜 뼈다귀’인가? 그 이하로는 아예 뼈다귀는 없다? 하여 두품頭品, 곧 ‘머리의 품격’으로 계급을 정한다. 평민이나 노비는 뼈다귀도 머리도 없다.
최치원은 육두품이었다. 육두품은 신라의 17등급 관직 중에서 제6등급인 아찬까지만 오를 수 있었다. 제5등급 대아찬 이상의 관직은 왕족이 독차지했다. 요점은 유학한 ‘국제인’이지만, 국가 중대사에 참여할 수 없는 신분인 것이다. 한마디로 왕족의 손발, 시쳇말로 ‘시다바리’ 노릇밖에는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이 골품제란 벽에 부딪힌 최치원의 절망감은 어떠했을까? 물론 발버둥을 쳤다. 894년경 최치원은 서라벌 정치 개혁의 마지막 염원으로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10조를 올렸다.
그러나 당시 경주의 실권을 쥐고 있던 진골 귀족들은 그의 개혁안을 반대했다. 최치원은 시무10조의 무산으로 신라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을 것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왕건이 일어났을 때 “계림은 누런 잎이요, 곡령은 푸른 솔이라”라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계림은 경주이고, 곡령은 송악이다. 곧 신라의 쇠망과 고려의 흥기를 예언한 것이라고들 한다. 물론 국사학자들은 최치원의 문인들이 나중에 지어낸 것이라고는 한다.
당시의 최고의 지식인 최치원도 자신이 태어날 시대를 고를 수 없는 노릇이다. 시대의 구속 안에서 자신의 삶을 선택해야 했다. 최치원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僧乎莫道靑山好(승호막도청산호) 승려들아 산이 좋다 말하지 말게
山好何事更出山(산호하사갱출산) 좋다면서 왜 다시 산을 나오나
試看他日吾踪跡(시간타일오종적) 뒷날 내 자취 두고 보게나
一入靑山更不還(일입청산갱불환) 한 번 산에 들면 다시는 안 나오리
시정잡배에 불과했던 한신은 한왕(漢王) 유방의 대장군이 된다. 장량, 한신과 함께 한나라 삼걸三傑로 꼽히는 유방의 참모 소하의 천거에 의해서다. 고금독보古今獨步의 명장으로 백전백승의 천재 전략가로서 무수한 공을 세웠다. 그 공로로 제齊나라 왕과 초楚나라 왕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한신은 초나라에 이르자 일찍이 밥을 먹여주던 아낙에게 1000금을 내렸다. 또 정장에게는 백 전錢을 내리면서, “그대는 소인이다. 남에게 은덕을 베풀다가 중도에서 그만뒀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또 자기를 욕보인 불량배 가운데 자기에게 가랑이 밑으로 기어나가게 하여 모욕을 주었던 자를 불러 초나라의 중위中尉로 삼고, 여러 장군과 재상에게 말했다.
“이 사람이 그때 나를 모욕했을 때 나는 이 사람을 죽일 수 없어 죽이지 못한 것이 아니다. 죽여 보아야 무슨 명분이 서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꾹 참고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유세객 괴철(蒯徹, ?~?)은 한신에게, “지금 당신께서는 군주를 떨게 할 만한 위세를 지녔고, 상을 받을 수 없을 만큼 큰 공로를 가지고 계시니, 초나라로 돌아가더라도 항우가 믿지 않을 테고, 한나라로 돌아가도 유방이 떨며 두려워할 것입니다. 무릇 신하 자리에 있으면서 군주를 떨게 하는 위세를 지니고 명성을 천하에 떨치고 있으니, 제 생각에는 당신께서 위태롭습니다.”라고 말하며, 자립하여 항우, 유방과 함께 천하를 삼분하기를 권했다. 그러나 한신은 망설이면서 차마 한나라를 배반하지는 못했다.
한신은 한漢 고조(유방)가 자기의 재능을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것을 알았다. 하여 고조를 원망하며 불만을 품었다. 드디어 모반을 꾀한다. 이때 한신의 가신 가운데 한신에게 죄를 지은 자가 있어 한신이 잡아 죽이려 했다. 그러자 그 가신의 아우가 여후(呂后. 유방의 아내)에게 한신이 모반하려는 상황를 일러바쳤다.
상국 소하의 꾀임에 빠져 한신은 포박 당했다. 여후는 무사를 시켜 한신의 목을 베었다. 한신은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괴철의 계책을 쓰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아녀자에게 속은 것이 어찌 운명이 아니랴!”
여후는 한신의 삼족을 멸하였다.
최치원은 왜 유학을 갔고, 한신은 무얼 바라 대장군이 되었을까? 전체 인생으로 볼 때, 그냥 육두품으로 안분지족하고, 시골 동네의 필부로서의 삶보다 더 값진 뭐가 있을까? 지나간 날의 영광은 풀잎에 맺힌 아침이슬보다 더 허무하다. 내일은 무지개마냥 허랑하다. 잡으려면 들면 그만큼 더 멀어진다. 과거에 중독된 ‘꼰대’나 미래에 중독된 야심가나, 허무하기는 매일반이다. 오로지 오늘 지금 이 당장뿐이다. 그렇지만 오늘, 이 당장은 행복한가?(계속)
<작가,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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