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 위험에 직면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할까? 몸이 얼어붙는다.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가 없다. 위험은 불행한 현실이 된다. 사람들의 몫은 행동하지 못했음에 대한 자책과 그 불행한 현실에 대한 괴로움뿐이다.
릿쿄立敎 대학 마사다 와타루(正田 亘) 교수가 ‘위에서 물건이 떨어져 내려올 때 취하는 인간의 행동’에 대한 실험을 했다. 7m 높이의 3층에서 창문을 열고 건물 밑을 지나가고 있는 학생의 이름을 부른다. 학생이 흠칫 위를 올려보는 순간, 가로 세로 30cm의 정방형 검은 돌(실제는 검은 칠을 한 스티로폼)을 떨어뜨린다. 이때 학생이 어떤 행동을 취하는가를 조사하는 실험이다.
그 결과, 남학생 17명과 여학생 12명 중 낙하물을 피할 수 있었던 학생은 남자 4명, 여자 1명뿐이었다. 위험에 직면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다리가 굳어버린다. 왜냐면, 일반적으로 사람은 여러 가지 정보를 받아들여 그 정보를 처리하고 난 후 행동한다. 그러나 돌발적인 상황에서는 정보를 처리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우두커니 바라만 볼 뿐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운동도 할 겸 바람 쐬려 나간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꼬맹이는 자전거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깡충거리며 따른다. 동네 어귀 2차선 국도 앞에 이르러 자전거를 멈춘다. 이 도로만 건너면 나는 힘껏 페달을 밟고, 꼬맹이는 거칠 것이 질주의 쾌감을 느낄 것이다. 500m 남짓 동네 앞 국도는 쭉 뻗은 곧은길이다. 좌로 100m, 시정거리에 차는 없다. 우로 400m 역시 달려오는 차가 없다. 자전거는 찻길을 건너자마자 방향을 돌린다. 반대편 차로 길섶에서 꼬맹이를 지켜보며, 건너오길 기다린다. 수백 번 반복한 ‘도로 건너기’이다.
평소에는 자전거가 길을 건너면 꼬맹이는 한 두 걸음 뒤에서 따라오다 쏜살같이 앞질러 내달린다. 한데 오늘따라 내가 길 건너에서 지켜보는데도 곧장 건너지 않고, 횡단보도 옆 가로등 밑에 엉덩이를 내리깐다. 배설일까, 영역표시일까, 알 수는 없다. 그 순간 좌측에서 흰색 승용차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다. 위험을 직감했다. 본능적으로 두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며, “꼬맹아, 가만히 있어” 하고 소리쳤다. 이때 꼬맹이는 이미 엉덩이를 들어 올려 달릴 자세였고, 깡충 뛰어 도로에 들어섰다. 내 외침소리를 듣고, 그대로 서서 나를 바라봤다. 그 찰나, 앞바퀴가 꼬맹이를 넘어갔고, 뒷바퀴도 뒤따랐다.
자전거를 팽개치고 꼬맹이에게 달려갔다. 모로 누워 고개만 치켜들고 있다. 들어 안았다. 오줌을 흘리더니 고개가 떨어진다. 그리고 꼬맹이의 온몸이 축 처졌다. 승용차는 속도를 낮춤도 없이 내달려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다. 꼬맹이의 몸은 아직 따뜻하다. 이 조그만 몸피의 정중앙을 괴물스런 앞뒤바퀴가 압살했다. 외상이 전혀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46). 서재 앞 텃밭에 꼬맹이를 고이 묻는다. 울음이 북받친다. 울음이 나오는 그대로 목 놓아 운다. 하늘이 꼬맹이를, 나를 버린 것인가? 예정설豫定說을 믿는다면 이 가혹한 운명이 받아들여지고 슬픔이 누그러질까?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가까운 절에 가서 불전함에 얼마 넣고, 천도제를 지내주셔요. 다 주인 잘 되라고 먼저 간 겁니다.” 오며 가며 더러 만나지는 노老 비구니의 조언이다. 참 간명한 방책이다. 꼬맹이의 혼령이 있어, 천도제로 그 혼령이 ‘좋은 데, 극락’으로 간다면야 무슨 일이든 못할까? 마는, 나는 윤회를 믿지 않는다. 연기緣起와 윤회를 믿어야 불자이다. 연기는 만고불변의 이치이다. 그러나 모든 게 무상無常하여 나고 죽고 흥하고 망함이 덧없음인데 어찌 윤회의 주체가 있단 말인가! 부처의 가르침을 소중히 따를 뿐이다.
불교는 서양의 Religion(종교)과는 관점을 달리한다. Religion은 절대자에게 의지해 구원을 받으려 한다. 그러나 불교는 스스로 깨닫는 종교이다. 모든 사람들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씨앗(불성)을 지녔기에 자신과 법(진리)에 의지한다. 인간이 이성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신·절대자에 의지해서 그 답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 현실을 직시해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 모든 현상을 해석하려는 지혜의 종교이다.
생각해 본다. 과속하는 승용차를 발견 즉시 내가 찻길에 뛰어들었다면? 아니면 자전거라도 찻길에 던져 넣었다면? 꼬맹이가 여느 경우와 달리 가로등 아래 쪼그려 앉지 않고, 평소처럼 자전거를 그대로 따라왔다면? 승용차가 규정 속도를 지켰다면? 더구나 횡단보도 앞이다. 내가 집을 나서는 일을 1분만 전에, 혹은 후에 시작했다면? 더욱 한스런 일은 내가 ‘꼬맹아, 가만히 있어’라고만 소리친 것이다. 내 말을 아주 잘 듣는 꼬맹이가 내 이 말을 듣지 않았다면, 멈춤 없이 도로를 건너왔고, 1초 차이로 꼬맹이는 무사했을 것이다.
꼬맹이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과속 자동차이다(인因). 간접적 원인인 조건(연緣)은 내가 찻길로 뛰어들지 않은 것, 꼬맹이가 가로등 아래 쪼그려 앉은 것, 내가 가만히 있으라고 소리친 것, 하필 그 시간에 운동을 나선 것 등이다. 연기법 곧 인연생기법因緣生起法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굳이 연기법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일상의 논리적 사고로 추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해석한다고 이 슬픔이 쓰다듬어지는가?
마사다 와타루는 돌발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평소 훈련이 필요하다고 해결책을 제시했다. 지진이나 화재 등 예측 가능한 위험은 훈련이나 연습으로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발생하는 사건 사고 모두를 예상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여 얼마간 우리는 운명애주의자運命愛主義者가 될 필요가 있다. 얼마쯤인지는 몰라도 인생의 불가불 요소로서 ‘슬픈 일’을 내재하고 있는 까닭이다.
다만, 꼬맹이의 떠남, 이 지극한 상실의 슬픔 속에서 하나 깨달은 바가 있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 소중한 것-연인이든 반려견이든 관상수든 직업이든 간에-은 자신의 능력 100% 이상으로 돌보고 가꾸고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부족하다. 하여 떠날 것은 떠나간다. 그럼 온몸, 온 마음으로 떠안고 슬픈 울음을 울면서 견뎌야겠지. 어이하랴, 이것이 인생인 것을.
<작가,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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