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그림자처럼 다가와, 도둑처럼 지나갔다. 올해 추석의 몽타주다. 코로나19 탓이었을까? 그러나 이 팬데믹(pandemic)은 ‘추석답지 않은 추석’의 훌륭한 구실일 뿐이다. 그럼 왜? 지구의 자전을 느끼지 못하지만, ‘그래도 지구는 돌기’ 때문이다.
추석의 전령사는 벌초이다. 벌초를 숙제로 안고 있는 사람은 분명 아날로그 세대에 속한다. 하이브리드 승용차가 대세를 형성해 가고 있다. 이도 머지않은 날에 전기자동차로 일신하게 될 것이다. 마는, 지금으로서는 석유 자동차가 다수를 차지한다. 마찬가지로 아직은 아날로그 세대가 사회의 버팀목으로서 굳건하다.
트렁크에 실은 예초기가 길어서 손잡이 막대와 그 끝에 달린 칼날이 삐죽 튀어나온 승용차가 보인다. 한참이나 안 뵈던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그러면 벌초 철임을 직감한다. 추석이 얼마 남지 않음도 미루어 짐작한다. 이 무렵이면 어디로 움직여도 윙윙거리는 예초기의 기계음을 듣게 된다.
십 수삼 년 전만 하더라도 벌초 철이 이렇게 시끄럽지 않았다. 산과 묘소에 벌초하는 후손들이 훨씬 더 붐볐지만, 조용했다. 풀 베는 기계, 곧 예초기(刈草機)가 아니라 낫으로 산소의 잡풀을 베어내며 음택陰宅을 돌보았기 때문이다.
벌초에 관한 한 나는 ‘살아있는 역사’이다. 족히 50여 년은 벌초를 했다. 낫으로 야생초를 제거하는, 구슬땀 흘러야 하는 고된 순수 육체노동이다. 그러나 힘들다는 티를 내서도 안 되고, 또 힘겨워 피하려는 염을 낼 수 없는,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당당한 노동이었다. 이런 벌초에 극적인 변화는 10여 년 전에 일어났다. 벌초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 변화를 똑똑히 목도했다.
그 즈음에 예초기란 풀 베는 기계가 대중화하기 시작했다. 애초에는 감히 봉분에 기계를 들이댄다는 것은 너무 불경한 일이라 여겨 묘역만 예초기로 풀을 베고, 봉분의 풀은 손수 낫으로 베어냈다. 이삼 년 지나자 봉분도 윗부분만 남기고 예초기로 풀을 베고, 봉분 윗부분은 낫으로 벌초했다. 또 이삼년이 지나니 묘역을 물론 봉분까지 깡그리 예초기를 사용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어졌다. 요즘은? 예초기를 사용할망정 벌초를 빠뜨리지 않는 사람은 후손의 도리에 대해 충직한, 남다른 사람이다. 농협이나 그 외 ‘벌초대행업체’에 벌초를 맡기는 사람 또한 양반 축에 들리라.
생명은 탄생하고, 성장하고, 소멸한다. 문화 혹은 전통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창조된 전통’과 ‘DNA화한 전통’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엘리자베스 2세가 고색창연한 마차를 타고 의회 개원을 위해 웨스트민스터로 향한다. 영국 TV 방송들은 이 모습을 중계하면서 한결같이 ‘천 년의 전통’을 되뇐다. 이를 보는 영국인들은 새삼 왕실과 국가에 대한 존경심을 확인하곤 한다. 그러나 이 거창한 영국 왕실의례 대부분은 천 년 전통이 아니라, 실은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전통이다. 이 사실을 알면 영국인들은 아마 허망해질 것이다.
에릭 홉스봄에 따르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유럽에서 새로운 국경일, 의례(rituals), 영웅이나 상징물들이 대량으로 만들어지는 등 ‘전통의 창조’가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현재’의 필요를 위해 과거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이다. 전통의 창조를 통한 집단적 기념행위는 국민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전략’이었고, 신화와 의례가 사람들로 하여금 만들어진 ‘공식 기억’을 믿도록 하는 데 의도적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벼농사 문화와 수학실력 간에는 놀라울 정도로 상관관계가 있다고 말콤 글래드웰은 주장한다. 매년 세계의 유명 도시에서 수학 올림피아드가 열린다. 세계에서 1,000명의 중학교 2학년생이 시험을 치른다. 상위권은 어떤 나라일까? 싱가포르, 한국, 대만(중국), 홍콩, 그리고 일본이다. 이 다섯 나라는 공통적으로 논에 물을 대는 쌀농사를 지어왔고, 그 일에서 삶의 가치를 찾는 문화가 자리 잡은 나라이다.
우리는 보통 수학을 잘하는 재능은 타고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버클리 대학 수학 교수 앨런 쇤펠트는 재능보다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수학 문제를 풀고자 물고 늘어지는 끈기와 지구력만 있으면 수학은 마스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끈기와 지구력은 벼농사 문화의 필요조건이다.
논에서 일하는 것은 같은 면적의 옥수수나 밀밭에서 일하는 것보다 10~12배 노동집약적이다. 모든 역사를 통틀어 쌀농사를 짓는 농부만큼 열심히 일하는 농부는 존재하지 않았다. 농부의 업무량은 연간 대략 3,000시간으로 추산된다.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 쿵족은 일주일에 12~19시간을 일한다. 나머지 시간은 춤추고 놀고 친척과 친구들을 방문하면서 보낸다. 곧 1년에 1,000시간 정도를 일한다. 18세기 유럽의 농노도 대략 1년에 200일 정도 새벽에서 정오까지, 곧 1,200시간을 일했다. 19세기 들어서도 프랑스 농부의 삶은 오랜 기간 빈둥거리다 몇몇 시기에만 필수적으로 일하는 식으로 짜여 있었다.
벼농사는 게으르면 수확의 보장이 없다. 노력과 결과물 사이의 관계가 명확하다. 일한 만큼 수확량이 증가한다. 노력은 끈기를 필요로 한다. 수학 문제 풀이도 끈기가 재능에 우선한다. 그러므로 벼문화와 수학성적 간에는 자연스럽게 상관관계가 성립한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지구는 팽이처럼 스스로 시속 1,667km로 돌면서, 시속 107,160km로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 아찔한 속도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지 못한다. 무릇 존재하는 모든 것, 그것이 자연물이든 인공물이든 지적 구조물이든 변화한다. 추석이든 벌초든 그 양상이 변화함은 당연지사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고정관념에 젖어 변화에 가치판단을 하는 우를 범한다. 하여 ‘00답지 못하다’ 고 한다. ‘00’ 자체가 변했는데도 말이다.
만유의 이치가 이러할진대, 벌초를 낫으로 하든 예초기를 하든 무슨 상관이랴. 고향을 찾든 찾지 아니하든 추석은 추석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사변적 물음도 해봄직하다. 그러나 실존적으로 ‘지금, 여기’에 나의 존재를 있게 한 부모, 혹은 조상과의 만남의 시간 갖기, 손해나는 시간 씀은 아니지 않을까? 직접적인 만남이 벌초이고 음덕을 기림이 추석이다.
내년 추석은 또 어떠할는지?
<작가 /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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