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과 연민

조송원 승인 2021.04.25 17:26 | 최종 수정 2021.04.28 08:14 의견 0
제주도 이중섭로의 벽화

그때, 왜 하필 화가 이중섭이 생각났을까?

<포차>에는 이미 사람 냄새, 사람의 술내로 분위기가 푸근하다. 올 데 왔다는 안도감도 든다. 아직 술시(戌時. 오후 7시~9시)까지는 30여 분 못 미친다. 시골 면 소재지의 ‘소주방’ 치고는 격조가 높다. 실내도 깨끗하고 주인장의 화장도 곱다. 안주도 깔끔하다. 생선구이, 아귀찜, 낙지볶음… 그리고 닭발. 닭발 말고는 좀 비싼 게 흠이라면 흠이다.

“아줌마, 여기 밥 한 공기를 밑에 깔고 낙지볶음 한 상 푸짐하게 내오소, ‘독거노인’ 저녁밥 땜이 되도록. 그리고 소주 두 병!”

내리 사흘을 친구 과수원에서 일했다. 기존의 복숭아나무를 베어내고, 대신에 밤나무, 키위나무, 엄나무 등을 심는 작업에 내 근력을 보탰다. 내가 일꾼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다. 친구는 일을 끝내고 소주나 한 잔하자고 했다. 하여 들른 곳이 이 <포차>다. 친구는 밥집이나 술집에서 주문을 하면서 꼭 독거노인이라며 나를 끌어들인다. 혼자 사는 이가 끼니 제대로 챙기지 못할 터, ‘차려진 밥상’에 고기 한 점, 나물 한 접시 더 얹어 먹이고 싶은 알뜰한 마음씀씀이, 나는 그렇게 살뜰히 이해한다.

‘홀몸의 늙은이’, 어째 거부감이 든다. 그러나 실상을 따져보면 이 거부감은 정당하지 않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홀로 살지 않은가! 맹자가 말한 사궁민(四窮民. 네 가지 궁한 처지의 백성), 곧 환과고독(鰥寡孤獨. 늙은 홀아비, 늙은 홀어미, 부모 없는 아이, 자식 없는 늙은이)의 첫째임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글자 그대로의 풀이로 독거노인일지언정 맹자가 말하는 궁민窮民이 아님 또한 명백하다. 왜?

유·무산자의 개념은물론, 선과 악 그리고 정의와 부정의의 개념도 당 시대에만 적용되어 시대 제한적이다. 변한다. 2,300여 년 전의 맹자는 봉건제 신분질서의 농업사회에 살았다. ‘지적 재산’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 21세기 현대인으로서 나는 얼마간 지적 재산이 있다. 이 재산을 얻기 위해 평생을 투자했다. 이 재산이 현금으로 환수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그렇지만 ‘유산자’임은 분명하다. 자신이 투자한 사업이 반드시 성공만을 기약하는 건 아니다. 평생 투자한 내 ‘지적 사업’의 성패는 내 자신도 모른다. 그러나 자명한 사실은 최소 내가 궁민(룸펜 프롤레타리아트.Lumpenproletariat)은 아니라는 점이다.

‘밥심’은 해결됐으니, ‘고기 힘’을 저축하자며 친구는 생선구이를 또 주문했다. 소주는 각 2병으로 제한했다. 좀 과한데…. 알코올 양뿐 아니라 음식 값이 내 일당을 훌쩍 넘는다. 고맙기는 하지만 좀 미안하다. 이런 저런 생각에 소주잔을 만작이고만 있는데, 낯익은 얼굴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건너편 자리에 앉고 닭발을 주문한다. 눈길이 마주쳤다. 그가 목례를 한다. 택배노동자다. 책 배달 온 그와 내 집에서 자주 만났다. 이름은 모른다. 나이는 나보다 적다. 체구는 왜소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보니, 위쪽은 반백인데 귀밑머리는 새하얗다. 아마 염색한지 오래되어서 그러리라. 얼마 후 그의 동료 한 명이 와서 서로 굳게 악수하고는 닭발에 소주를 들이킨다. 그런데 어째 얼굴들이 밝지가 못하다. 그는 평소에도 택배상자가 힘에 부쳐했고, 늘 표정이 어두웠다. 한데 이때 왜 하필 나에게 이중섭이 떠올려졌을까?

이중섭은 항구가 보이는 통영의 한 허름한 대폿집에서 막걸리 마시며 밀항선을 기다렸다. 일본에 있는 아내와 두 아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6·25 전쟁이 끝나고 1여 년 세월이 흘렀다. 극심한 생활고에 찌든 화가 이중섭은 부두 막노동으로 겨우 입에 풀칠하며, 담뱃갑 은박지로 창작 생활을 했다. 가난은 외로움을 심화한다. 그림에 대한 열정보단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각박한 삶을 유지케 하는 연료였으리라. 당시는 한일 간 수교 전이라 밀항으로 도일할 수밖에 없었다. 근근이 밀항선 배삯을 마련한 이중섭은 비록 육신은 초췌했으나, 이 순간만큼은 부풀은 가슴으로 밀항선을 기다리며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대폿집 문을 박차고 들어온 한 농부가 다짜고짜로 울부짖었다. 사연인즉슨, 전 재산과 다름없는 소 판 돈을 쓰리(소매치기) 당한 거였다. 그러니 이젠 어찌 살아가야겠냐며 누구랄 데 없이 하소연해대는 터였다. 이중섭은 안주머니에 든 돈다발을 매만지다 아귀에 힘을 주어 꺼냈다. 그리고는 그 돈다발을 농부의 막걸리잔 앞에 놓고 문을 열고 조용히 대폿집을 벗어났다.

휴대폰지갑을 걸량짚어 보았다. 천 원짜리 서너 장, 확실히는 5만 원 권 빳빳한 지폐가 한 장 있다. 좌우 앞뒤 생각은 안 했다. 무의식적으로 일어서졌다. 계산대로 갔다. 5만 원 권을 꺼내 ‘저 자리’ 음식 값 3만 원 선불할 테니 나머지 2만 원을 달라고 했다. ‘형님 고맙습니다’ 란 말을 등뒤로 하고 포차를 나왔다. 친구는 다른 지인들과 술자리 친구를 하고 있으니, 내가 없어도 자리가 빈 티는 나지 않을 것이다.

조송원

혼자 집으로 걸어오면서 비로소 제정신(?)이 돌아왔다. 아, 그게 어떤 돈인데……. 한 인연과 조우했다. 지적 작업을 하는 50대 독신이다. 이런 저런 연줄로 차를 같이 마셨다. 마침 그이는 작업장을 옮기는 중이었다. 백수나 매일반인 글쟁이, 반거들충이 막일꾼이라 그이의 이삿짐 꾸리고 옮기는 일을 몇 날 며칠을 도왔다. 경제사정은 피차일반. 삯일을 주며 사람을 쓰기는 벅차리라고 짐작했다. 이심전심으로 그이와 나의 계산에서 일당은 제외했다. 다만, 밥값은 꼭 그이가 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꼭 내가 한 번 밥값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이는 나를 ‘인연’으로는 생각하지도 않을지 모른다. 내 객관적 정황상 인연을 바람은 언감생심이다. 그러나 생각의 속도는 빛보다 빠르고, 범위는 우주보다 넓다. 스피노자를 좋아한다. 그가 말했지. “그러나 모든 훌륭한 일은 드물다.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사흘 일한 삯은 보름 후에나 입금된다. 인터넷 사용료까지 연체하며 밥 한 끼는 꼭 내가 사려고 꼬불쳐둔 돈이다. 이제 어쩌랴! 다행히 그이는 술은 전혀 못하고, 커피전문점에서 커피 마시기를 즐긴다. 2만원이나 남긴 내가 얼마나 기특한가. 식사 후 커피 값 정도는 낼 수 있게 앞가림을 다 하다니. 이렇게 천성적인 내 비경제적 행위를 합리화해 본다.

<작가,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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