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
승인
2020.11.16 20:18 | 최종 수정 2020.11.22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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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가 통 큰 중년 부인에게서 만 원권 지폐 한 장을 적선 받았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횡재에 더 큰 횡재를 노려 반 뚝 분질러 로또 복권 5천어치를 샀다. 그리곤 한동안 잊고 지내다 복권판매소 앞을 지나게 되었다. 안주머니에 깊숙이 넣어둔 복권을 꺼내 번호를 맞춰보았다. 거의 일치했다. 1등인가? 다시 맞춰보니 한 숫자만 달랐다. 다른 한 숫자도 보너스 번호와 일치했다. 2등, 이것만 해도 몇 천만 원!
춥고 배고팠지만 거지생활도 그럭저럭 살만했다. 그러나 거금을 확보한 순간, 지난 거지생활이 그렇게 비참할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가로 갔다. 이젠 이 비참한 생활과 영원한 결별이다. 결별에는 징표가 필요하다. 겉옷을 벗어 강물에 던졌다. 거지생활이여 안녕! 새 생활에 대한 이런 궁리 저런 생각을 하면서 시내로 걸어오다가, 아뿔싸 속주머니에서 복권을 안 꺼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황급히 되짚어 강가로 갔지만, 강물만 무심히 흘러갈 뿐, 겉옷이 머물러 있을 리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이젠 도저히 살아갈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거지는 두 주먹 불끈 쥐고, 강물에 투신하고 말았다.
“오늘 밤 자고 나서 몸 상태를 지켜보세” 울상으로 말을 하지 못하는 운전자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안심을 시켰다. 샛길에서 튀어나와 편도 1차선 국도 중앙선을 넘어 내 자전거를 받았다. 나는 자전거와 함께 2, 3m 튕겨 고꾸라졌다. 승용차와 자전거 속도가 높지는 않았다. 털고 일어나니 다리에 느껴지는 통증은 미미했다. 넘어질 때 짚은 손바닥만 쓰릴 뿐이었다. 내 다리보다 자전거 앞바퀴에 충격의 무게중심이 있었나 보다. 운전자는 논에 비닐하우스를 짓는 인부다. 동료들을 가득 태웠다. 운전자는 말을 더듬었다. 충격 때문인지 본래 언어가 부실한지, 분간할 수는 없었다. 하루 일 마치고 귀가 중인 모양이었다. 동료들은 지금 당장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당장은 병원에 갈 필요가 없고, 하룻밤 몸 상태를 지켜보자고 말한 것이다.
나는 왜 그랬을까? 우선 잔뜩 겁에 질린 표정에다 초라한 행색의 운전자가 눈에 밟혔다. 그러나 이 연민의 정서에 내 몸을 저당 잡힌 건 아니다. 순간적이나마 의식적으로 판단이란 걸 했다.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란 말이 날 강하게 압박했다. 지금 병원에 간다 치자. 교통사고이고 보험에 들어있으니 이것저것 검사를 해댈 것이다. 어디 부러진 데라 찾으면 병원 찾은 값을 하는 셈이다. 한데 만약 아무 이상이 없다면? 내가 전형적인 도덕적 해이를 저지른, 평소 경멸하는 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인류애를 지론으로 하는 진보주의자가 이웃집과 불화하여 담을 쌓고 지내는 것과 뭐가 다르랴. 명색이 평생 공부해 온 사람이다. 앎을 행동으로 실천할 수 없다면, 평생 헛공부해온 게 아닌가.
차에 받히면 후유증이 심하다고들 한다. 속설이다. 내·외상의 크기는 충격의 강도에 비례한다. 자동차와 충돌하든 자전거 타고 가며 먼눈팔다 전봇대를 들이받든,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을 뿐이다. 서너 발짝 걸어본다. 별 탈이 없다. 한데 굳이 병원에 가야 하랴. 이 정도도 ‘판단’을 못한다면, 평생 공부는 무엇에 쓰려 했단 말인가. 집에 가서 보던 책, 마저 읽음이 더 유익한 시간 씀이라.
험한 세상인가? 되레 내가 운전자와 그 동료들을 안심시켜야 했다. 이 사고를 빌미로 돈 우려먹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애써 강조해야 했다. 그제야 그들도 적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애먼 손실은 볼 수 없다. 망가진 자전거 앞브레이크는 고쳐달라고 했다. 운전자가 그러마고 하는 약속을 받고, 헹하니 자전거를 타고 집에 왔다.
무얼 바라 공부를 하는가? 적어도 난 ‘거지같은 생활’을 하더라도, ‘거지같은 소견머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부를 한다. 거지는 얼마를 잃었는가? 기 천만 원? 아니다. 5천 원을 잃었을 뿐이다. 심지어는 그 5천 원도 공짜로 얻은 돈이다. 내가 거지 입장이라면, 아마 강물에 투신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몇 날 며칠을 끙끙거리며 잠을 설치지 않을까? 얼마나 공부(수양)를 더하면, 언제쯤, ‘본전’임을 알고, 훌훌 털어버리고 평상심平常心을 갖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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