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용 났다’. 1986년 사법시험에 합격했을 때, 이재명은 이 말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지금이야 로스쿨을 거쳐 변호사 시험에 붙었다할지라도 ‘용龍’으로까지는 승격시켜주지 않는다. 물론 아직도 시골에서는 ‘누구누구 변호사 시험 합격’이란 플래카드가 자랑스레 걸리곤 하지만.
서울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특히 부모가 대졸자인 경우 사법시험을 통과했다고 해서 ‘개천의 용’ 운운했을까? 대하大河에서 용이 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큰 시험이든 작은 시험이든 어차피 부모 배경과 재력이 반은 먹고 들어간다. 하여 이재명 동기 연수원 18기 297명 중 큰물이 아니라 개골창 출신은 소수였을 것이다. 이재명은 ‘소년공’으로서 중·고교를 검정으로 졸업하고, 장학금으로 중앙대에 입학했고, 졸업 다음해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런 만큼 이재명은 ‘개천의 용’이란 속담에 적실한 인물이다.
대한민국은 법조공화국이다. 21대 국회의원 중에서 46명(15.3%)이 법조인 출신이다. 행시에 합격한 관료(27명), 기자(20명), 기업인(11명) 출신을 압도한다. 올해 4월 상장사 주총에서 선임된 사외이사 총 816명 중에서 변호사 출신은 95명(11.6%)이다. 대학교수(228명), 기업인(153명)에 이어 당당히 3위이다. 사회 전반에 법치주의가 확산됨에 따라 법률 전문가인 법조인의 부상은 자연스런 측면이 있다. 그러나 ‘대장동 개발비리 의혹’에 전직 대법관, 특별검사, 검찰총장, 검사장 등 유명 법조인이 등장하는 것은 무얼 의미할까?
이재명도 법조인이다. 그러나 출발부터 ‘비리 의혹’ 법조인과 결을 달리한다. 인지상정으로 지긋지긋한 가난에 시달렸던 사람은 돈에 포원이 진다. 하여 악착같이 부와 권력을 향해 질주한다. 드디어 기득권에 편입되고, 현실 안락에 안존하며 올챙이 시절을 까마득히 잊는다. 그런데 이재명은 춥고 배고픈 인권변호사로 법조인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 선택은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니다. 타고난 기질이든 확고한 세계관이든 간에 이 결단은 비상非常한 일이다.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환율과 물가를 고려하면 우리가 일본보다 더 잘 산다. 코로나19 방역의 세계 선도국가이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지위를 변경했다.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국가는 지구상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BTS, <오징어 게임>을 위시한 K-팝·드라마·푸드···등등 K-문화가 세계를 풍미한다. 대박(daebak), 오빠(oppa), 언니(unni), 김밥(kimbap), 동치미(dongchimi), 잡채(japchae)도 영어단어가 됐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왜 서민들은 가계부채에 허덕이는가. 올 7월말 기준으로 가계부채 규모는 1710조3000억 원이다. 5000만 국민 1인당 3400여만 원 꼴이다. 상대빈곤율도 OECD에서 3번째로 높다. 노인자살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다. 많은 젊은이들이 결혼을 포기한다. 결혼하더라도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는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나라 경제사정은 더없이 호조인데, 왜 대중의 삶은 피폐해지는가? 무엇 때문에 이 엇박자가 나는 것일까?
최저임금을 인상하면 일자리가 줄어든다, 고 기업계와 보수정치인, 그리고 수구언론은 주야장천 주장해 왔다. 사실이 아니다. 데이비드 카드 캘리포니아주립대(버클리) 교수는 202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최저임금 인상과 고용 간의 인과관계를 다룬 1994년 논문 덕이다. 이 논문의 결론은, 적절한 수준의 최저임금 인상은 일자리 감소 등 고용시장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작다는 것이다. 이 결론에서 추론하면, 최저임금 인상은 부의 불평등을 완화하고, 사회를 통합하고, 수요를 창출해 전체 경제에 긍정적인 효과를 낸다고 볼 수 있다.
실업급여를 확대하면, 일자리를 구하려는 동기를 약화시킨다? 이 또한 정치·경제·언론계를 포괄한 보수파들은 한결같이 ‘그렇다’고 주장한다. 명백한 헛소리임을 폴 크루그먼은 칼럼(The New York Times. 2021.10.15.)에서 밝히고 있다. 실업급여를 철회하거나 안 하거나 일자리 상황은 매한가지라는 것이다. 실업급여를 받기 때문에 직장을 구하려 하지 않고 놀고먹으려 한다는 주장은 인격에 대한 모독이다.
기득권과 보수파들의 시대착오적인 ‘시장논리’가 횡행한 대한민국의 현실은, 소득불평등이 세계 최고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거의 반을 독식하고 있다. 자산불평등은 말할 것도 없이 더 심하다. 각종 경제지표는 분명 선진국 이상으로 좋다. 그러나 서민들의 체감 지표는 뒷걸음질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20대 대통령 선거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단연 소득불평등 완화와 국민 개개의 기본적인 삶의 보장이 아닐까?
‘큰 정부’가 필요하다. 경제에, 서민의 삶에 정부의 적극적 역할이 긴요하다는 뜻이다. 시장은 냉혹하다. 오직 강자만 살아남는다. 약자가 다 사멸하면 강자도 살아있을 수 없다. 국가경제의 총량을 키우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만큼 약자의 보호도 절실하다. 성장과 분배는 배타적인 문제가 아니다. 어느 일방이 다른 일방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상호보완적이어서 성장과 분배는 서로 상승작용을 한다. 이미 실증된 사실이다. 기득권자들의 탐욕이 현실을 호도하고 있을 뿐이다.
기득권자들이나 현실의 풍요에 익숙한 사람들은 사회모순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들의 기득권과 풍요의 대부분은 이 사회모순에 기댄 결과물이다. 하여 어찌 그들이 모순된 사회제도에 칼을 댈 수 있겠는가. 기득권에 편입된 ‘개천의 용’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재명은 다르다. 자신을 용이라고 생각지도 않고, 개천의 미꾸라지도 징거미도 피라미도 잊지 않는다.
이재명 대통령 후보의 대표적인 공약은 ‘기본시리즈’(기본소득·기본주택·기본금융)이다. 특히 기본금융은 이재명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정책수단으로 구체화할 수 없는 이재명표 정치적 상상물이다. ‘강자의 과도한 욕망을 절제시키고, 약자의 삶을 지키겠다’, ‘20대 대통령 선거는 민생개혁세력과 부패기득권카르텔과의 최후대첩이다’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이재명이 한 말이다.
이해찬 상임고문은 “후보로서 귀를 열고 ‘진인사 대국민’해야 한다”고 이재명 후보에게 당부했다. 그렇다. 천명이 아니다. 국민이다. 이재명 후보는 오로지 국민의 뜻을 헤아려 국민의 뜻을 받들어, 국민의 선택을 받길 바란다. 그리하여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진정한 국민의 용으로 승천하길 소망한다.
<선임기자, 본지 편집위원 /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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