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남주 시인의 아들 이름은 ‘토일土日’이다. 흔치 않은 이름이다. 김남주 시인은 9년 옥살이 후에 얻은 귀한 아들의 이름을 왜 굳이 토일이라 지었을까?
‘소연’이란 이름은 어떠한가? 한자로는 흴 소(素)에다 고울 연(姸). 흼은 곧 깨끗함이니, 깨끗하고 고운 아이라는 뜻이다. 예쁜 이름이다. 한데 성이 하 씨이면 문제는 달라진다. ‘하소연’, 좀 곤란하다. ‘생근生根’이란 이름은 또 어떠한가? ‘살아있는 뿌리(집안)’ 혹은 ‘뿌리(집안)를 일으킬’ 아이라는 뜻이니, 장남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다. 이 또한 성이 고 씨라면 좀 곤란하다. 1970년대 주니어페더급 한국 프로복싱 챔피언으로 고생근 선수가 있었다. 아주 우수한 복서였지만, 세계타이틀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개명을 해야 한다고 어떤 역술가가 조언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름 명(名)을 파자하면 夕+口이다. 저녁(夕)이 되면 어두워 서로 상대방을 볼 수 없으므로 입(口)으로 자기가 누구인가를 이름을 대어 밝힌다는 데서 名이 ‘이름’의 뜻을 나타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름은 뜻이 좋게 짓거나 부르기에 좋도록 짓는다. 대체로 과거에는 뜻에다, 현재에는 부르기에 더 비중을 두는 것 같다.
상수학象數學에서는, 문자와 숫자는 우주의 진리를 표시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본다. 따라서 사람이 사용하는 이름 역시 그러한 문자와 숫자를 간직하므로 이를 연구하면 운명에 관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명학의 기본이다.(정형근, 『오늘의 사주학』)
고 신영복 선생의 『담론』에서 이름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1967년 동베를린사건(동백림사건)으로 고암 이응노 화백이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했다. 감옥에서는 수번囚番으로 호명하는 것이 규칙이다. 그런데 고암 선생은 한 방에 있는 사람을 수번으로 부르는 법이 없었다. “자네 이름이 뭐야?” “이름은 왜요? 그냥 번호로 부르세요. 쪽팔리게.” 어쩔 수 없어 자기 이름이 ‘응일應一’이라고 했더니, 한 일 자를 쓰느냐고 또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뉘 집 큰아들이 징역 와 있구먼.” 고암 선생은 혼잣말을 했다. 응일은 이 말을 듣고 그날 밤 한잠도 못 잤다. 그동안 자기가 큰아들이란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생하는 부모님과 누이동생 생각으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고암 선생은 응일이 장남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일반적으로 성명학에서는, 장남(녀)에게만 시작, 으뜸을 뜻하는 동東, 일一, 시始, 장長, 태泰, 홍弘, 원元, 종宗, 상上, 갑甲, 용龍, 윤胤··· 등의 글자를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생이 장남노릇을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요즘 세상에 누가 성명학을 믿으리오. 마는, 일부에 해당하지만, ‘이름짓기’도 ‘한국인의 인식론’의 어엿한 한 분야이다. 전통적인 성명학은 전혀 별개로 치더라도, 자녀의 이름에 각별한 신경을 쓰는 것은 부모의 인지상정일 것이다. 작명소를 찾는 부모도 많다. 사주를 참고하여 이름의 음양오행이 조화를 이루도록 이름 한 자 한 자를 치밀하게 배치한다. 성명학에 대한 기초만 읽은 사람도 누구의 이름을 한자로 적어보이면, 음과 양의 조화와 전체 획수 등으로 작명소 작품임을 단박에 눈치 챌 수 있다.
이름은 편지와 반대다. 편지는 내가 썼지만 상대의 소유물이다. 이름은 ‘내 것’이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모나 조부모의 희망이나 주관적인 생각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과거에는 ‘딸막’이라는 이름을 더러 듣곤 했다. ‘딸을 막으라’는 부모의 바람이 담긴 이름이다. 한자로는 보통 ‘達幕’으로 썼다. 말녀(末女)나 종순(終順)도 같은 뜻을 내포한다.
‘우수憂愁의 시인’ 두보는 ‘시성詩聖’으로 높이 추앙 받는다. 그러나 시가 성스러운 경지에 도달했다손 치더라도 그 시인이 성인聖人인 것은 아니다. 시가 곧 그 시인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미당 서정주는 훌륭한 시인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당은 후학들이 결코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될 삶의 궤적을 남겼다.
곽말약(郭末若·1892~1978)은 두보의 계급의식을 분석하여 그에게 ‘인민시인’이라는 칭호를 붙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가 귀족의 부패 향락과 인민의 고통이라는 현실의 모순을 정확하게 인식하였다는 것은 높이 평가하여야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지배계급, 지주계급의 입장에 서서 지배계급과 지주계급에게 복무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삼리三吏」, 「삼별三別」도 인민의 고난과 아픔을 진실한 모습 그대로 사실적으로 간결하게 묘사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시 속에 그려진 인민의 형상은 온순하기 그지없는 백성들로서 털끝만큼의 저항의식도 찾아볼 수 없는, 지배계급이 요구하는 양민으로 이상화되었다는 점에서 계급적 한계를 가진다고 비판한다.(곽말약/임효섭 외, 『이백과 두보』)
두보는 몇 번이나 과거에 응시했지만 번번이 낙방한다. 두보의 연보에서 내 관심을 끈 것은 자녀의 이름이다. 맏이가 종무이고 둘째가 종문이다. 宗武와 宗文. 군인으로서 최고가 되고, 문인으로서 으뜸이 되라는 두보의 희망이 깃든 이름이다. 두보 자녀의 이름을 알고서, 곽말약의 두보에 대한 비판을 온전히 수긍할 수 있게 되었다.
두보의 대척점에 선 시인으로서 김남주가 있다. 김남주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를 지칭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계급적 관점에서 자기 세계를 보지 않으면, 노동자의 일상생활을 노래하거나 애환을 ‘묘사’하는 시들은 별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박노해 씨 같은 분의 시도 노동자의 구체적인 삶을 여실히 묘사는 했으나 계급적·정치적으로 보지 못한 것 같아요. 이는 우리 노동운동의 한계이기도 하고, 시인들의 한계이기도 하겠지요.”(강대석, 『김남주 평전』)
감옥에서 김남주는 출소 후 결혼식을 올린 박광숙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써 보냈다.
“그대를 파헤쳐 나는 / 대지의 밑동으로부터 / 미래의 자식을 튀어 나오게 하고 싶다 / 그리하여 나는 그 아이가 / 매듭이며 고리며 사슬이며 인습을 / 그 모든 것을 풀어주는 사람 / 해방자라 이름하고 싶다”
이리하여 아이가 태어나자 그 이름을 ‘토일’이라고 지었다. 노동자들이 일하지 않고 쉴 수 있는 토요일과 일요일을 생각하면서······.
<붙임> 당시로서는 ‘가방 끈이 긴’ 시인 김남주는 노동자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시 한 편을 읽어보자.
어느 날 술집을 나오면서 / 김남주
일년 삼백 예순날
어제도
오늘도
꼭두새벽부터 일하고
점심은 때우는 둥 마는 둥 일하고
한 마디로 쌔빠지게 좆빠지게 일하고
저녁이면 아니 밤이면 퇴근길에 목포집에 들러
빈속에 쐬주부터 부어 가슴에 불을 지르는 사람
그 사람의 화등잔(華燈盞)만한 눈을 내가 주눅 안 들고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나는 시인이다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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