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인간이라는 종種의 발명품이다. 지구상의 인간 외의 어떤 생명체에도 미래란 없다. 북유럽에서 아프리카로 날아가는 두루미에게 물어본다. “어디로 가느냐?” 질문 받은 두루미는 우리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하는 말, “나는 지금 날고 있어.”-(다니엘 S. 밀로 『미래중독자』)-
권세와 명리名利, 호사豪奢와 화려함을 가까이하지 않는 자를 깨끗하다고 하고, 가까이하되 이에 점염(漸染·점차로 물듦)되지 않는 자를 더욱 깨끗하다고 한다. 권모술수를 모르는 자를 고상하다고 하고, 알면서도 이를 쓰지 않는 자를 더욱 고상하다고 한다.-(홍자성 『채근담』)-
왜 하필 ‘인생의 참뜻과 지혜로운 삶’에 대한 책의 이름을 ‘채근담菜根譚’이라 했을까? ‘채근’은 송나라 유학자 왕신민의 ‘사람이 항상 나물 뿌리를 씹을 수 있다면, 세상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다(人常能咬菜根卽百事可成·인상능교채근즉백사가성)’란 말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러면 ‘나물 뿌리를 씹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나물의 뿌리는 식재료가 아니다. 잘근잘근 씹는다고 ‘담담한 맛’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 맛은 칡뿌리에나 맞아떨어진다. 씹을수록, 읽을수록 담담한 맛에 담담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책이라면 차라리 제목으로 ‘갈근담(葛根譚)’이라 했을 것이다.
채근은 초근(草根)이나 송기(松肌·소나무의 속껍질)와 동류이다. 중국의 송나라나 명나라는 물론 우리 조선의 이상향은 ‘삼재三災’가 없는 곳이었다. 질병과 기아와 전란. 전란을 피하고 질병이 닥치지 않아도 굶주림은 어찌할 수 없는 민초들의 천형天刑이었다. 하여 천지 사방에 널린 풀과 소나무, 그 뿌리와 속껍질이 연명의 도구가 됨직했다. 더러는 나물의 뿌리까지 씹었다.
그 간난신고한 삶 속에 인생의 참맛이 있다. 그런 삶을 감내할 수 있어야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런 말을 명나라 말기 홍자성은 『채근담』에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눈물 젖은 빵’을 미래에서나 맛볼 호의호식의 디딤돌로서 가치 매김을 한 것이 아니라, ‘눈물 젖은 빵’ 그 자체에 의미 부여를 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산이 소비를 능가하는 21세기에서 가난의 의미는 무엇일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정신적 빈곤에서 연유한 가난이 아닐까? 명품 백의 무소유가 가난의 징표라 할 수 없지 않은가. 환경의 제약을 받아들여 검소, 질박한 생활은 건강한 삶의 지표가 아닐까.
자가용을 소유하면 좋을 수도 있겠다, 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없어도 좋다. 30분 거리는 걷고, 1시간 거리는 자전거로 가고 온다. 60세가 넘어서도 잔병치레가 없고 감기약 한 번 먹은 적은 없는 건강은 다 적게 가진 덕이다. 자가용 소유의 편익이 비용에 훨씬 못 미친다. 무소유하면 비용은 제로인데 편익은 건강이다. 당분간은 자가용으로 번 시간을 다시 건강에 투자하는 시간으로 다 써야 하니, 소유의 실익이 별로 없다. 현재로서는 한정된 자원을 자가용에 투입하고 싶지 않다.
가난은 ‘해야 할 일’에 소요될 물질적 토대가 구축되어 있지 않음을 뜻한다. 올해부터는 그 ‘해야 할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몇 달씩 노트북 등 개인장비를 갖추고 여행을 해야 한다. 그래서 올해에는 자동차를 장만해야 한다. 지금까지 가난하지 않았듯 올해도 가난하지 않을 것이다.
지구가 스스로 한 바퀴 돌면 하루이고, 태양을 한 바퀴 돌면 1년이다. 지구가 일정한 궤도를 따라 자전과 공전을 한다. 한 바퀴를 돌든 100바퀴를 돌든 별스런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그냥 돌 뿐이다. 두루미한테 물었듯 지구에게 왜 도느냐고 물으면, “지금 돌 뿐이다”고 대답할 것이다.
과거-현재-미래로 흘러가는 시간의 화살이라는 것은 허구에 불과하다. 자연에는 ‘미래’라는 것이 없다. 오직 과거와 현재만 실재하고, 미래라는 것은 인간이 만든 발명품이다. 멸종 직전 인류는 어느 날 문득 ‘내일’이라는 것을 떠올렸고, 아프리카를 떠나 지금에 이르는 위험하고 위대한 길을 걸었다.
내일이 ‘발명’된 이후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거나 아마 앞으로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바로 우리 삶의 중심이 되었다. 인간이 가진 위대함의 원천인 미래가 동시에 우리 각자 또는 전체 인류에게 불행, 불교에서는 번뇌라고 부르는 것을 가져오기도 한다.
6만 년 전 아프리카 대륙 동북 ‘아프리카의 뿔the Horn of Africa’에서 생겨난 미래라는 발명품은 인류에게 그 전까지는 들어보지 못했던 선택지와 가능성을 줬다. 그리고 미래와 더불어 인간에게는 환상, 불안, 초조함과 또한 생겨났다. 인류는 미래라는 발명품에 중독된 별종이다.(다니엘 S. 밀로 『미래중독자』).
존재하지도 않는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일찍이 다석 유영모 선생은 일일일생주의一日一生主義를 주창했다. 아침에 잠이 깨어 눈을 뜨는 것이 태어나는 것이고, 저녁에 잠드는 것이 죽는 것이다. 이르자면 하루 동안에 일생을 산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루만 산다. 내일은 없다. 또 오늘이 있을 뿐이다.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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