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필 때 함께하지 못한 사람이나 그 무엇은, 꽃이 지고 무성한 잎새가 낙엽이 될 때까지도 만나지 못하는 법인가.
언제이던가? 죽어라 암기공부를 해야 했을 때, 연초록이 짙은 녹음으로 변해 감을 아쉬워하면서도 문 밖을 나서지 못하는 그 안타까움에 얼마나 다짐을 했던가. 내년 봄에는 한없이 답청을 하리라고. 그러나 돌아보면 그 봄이 40번이나 왔다갔다. 올해에도 꽃은 어김없이 피었고, 졌고, 산하가 연초록일 때도 무심히 지나쳤다. 그리고 가을이다. 그것도 만추. 늦은 가을은 앞산과 들판을 곱게 단장하는 게 아니라, 세월의 무게에 이지러짐이다. 하여 쓸쓸하다.
가을은 생각지도 못했다. 푸른 청춘에는 봄의 약동과 같이하지 못함만 아쉬워했을 뿐, 가을을 염두에 두지 못했다. 뜨거운 피가 영원할 줄만 알았지, 식어 가냘플 줄은 몰랐다. 사계의 가을을 깨닫지도 못했는데, 하물며 인생의 가을이야! 그렇다면 가을 끝자락까지 무슨 세월을 보냈던가?
독실한 재가불자인 한 노파가 세상에 등불이 될 만한 도사를 얻고자 조그만 암자를 지어 한 젊은 선객禪客을 모셨다. 열여섯 살 딸에게 음식이며 의복 등 온갖 생활용품을 나르게 해, 선객이 공부하는 데 불편이 없게 했다. 어느 덧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노파는 스님의 공부를 점검하고자 했다. 노파는 딸에게 이러저러하게 하라고 일렀다.
딸은 공양을 들고 암자로 가 스님에게 드린 다음, 공양을 마치자 스님 무릎 위에 올라 앉아 말했다. “스님, 기분이 어떠세요?” 선객은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그러자 딸은 다시 선객의 품속에 안기면서 갖은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스님, 저는 스님에게 안기니 무한히 기쁘고 즐겁습니다만, 스님은 어떠신지요?” 이에 선객은 말했다.
“枯木倚寒巖(고목의한암) 고목나무가 찬바위에 의지하니
三冬無暖氣(삼동무난기) 삼동설한에 따뜻한 기운이 없구나”
딸이 돌아와서 노파에게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하니, 노파는, “내가 20년 동안 땡추를 공양했구나”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서 암자를 불질러버렸다.(<선문염송>의 공안 <파자소암·婆子燒庵·노파가 암자를 불사르다>)
땡추만큼 공부에 철저하지도 못했고, 시정의 속한俗漢만큼 생활에 충실하지도 못한 세월이었다. 그렇지만 머리는 차갑게 하면서 가슴은 따뜻하게 데우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지금, 머리도 가슴도 미지근할지언정 이 정도를 유지함도 내 비루한 천품에 비긴다면 이 또한 성취가 아니겠는가, 쓸쓸히 자위한다. 그리고 또 하나 있다. 심중에 벼리고 벼린 비수 하나. 땅을 딛고 사는 사람이 어찌 ‘생활의 무기’ 하나가 없을쏘냐. 가을이 이우는 때, 이제 비수를 제대로 사용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다들 나이듦의 보험에는 돈뿐이라고 하더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탈레스(BC624~BC545)는 가난했던 탓에 철학이 쓸모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보여주는 실례라는 핀잔과 비웃음을 샀다.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아직 겨울인데 별을 관측하는 기술을 이용해 이듬해 올리브 농사가 대풍작을 거둔다는 사실을 예측했다. 그래서 얼마 안 되는 돈으로 키오스와 밀레토스의 모든 올리브 압착기의 사용권을 얻기 위한 공탁금을 걸었지만, 아무도 그와 경합을 벌이지 않았기 때문에 싼 가격에 사용권을 획득했다. 마침내 추수할 때가 되자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부랴부랴 몰려와 압착기를 빌리려 법석을 떠는 와중에, 그는 자기가 원하는 가격에 올리브 압착기를 임대해준 대가로 엄청난 돈을 벌었다. 따라서 그는 철학자들이 원하기만 하면 쉽게 부를 축적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지만, 정작 철학자들의 야심은 다른 것이다.”(러셀 <서양철학사>)
가을은 풍성하다. 그러나 들판에 잘 익은 벼가 황금물결로 일렁거릴 때, 감나무에 새빨간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을 때의 풍경이다. 수확이 끝나 휑뎅그렁한 들판과 앙상한 나뭇가지만 찬 겨울을 준비할 때의 풍광은 을씨년스럽다. 하물며 인생의 늦가을에야······.
평생 추구해 왔지만 머리가 차갑지도 못하고, 가슴이 따뜻하지도 못하다. 그래도 심중에 품어온 비수 하나는 잘 벼려져 있다. 어차피 계절이 왔다가는 가고, 가서는 또 다시 오는 게 자연의 이치이다. 하여 끝남은 곧 시작, ‘종즉시(終則始)’라고 하지 않던가.
사람은 한 번 가면 다시 못 온다. 그러나 사람은 하루에도 몇 번씩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아무리 멀리 가버렸다손 치더라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또 시작할 수 있으니 영장靈長이란 이름이 무색하지 않는 게 아닌가. 천년 동굴의 어둠도 촛불 하나로 일순간에 몰아낼 수 있다. 그 밝음은 어둔 세월에 비례해 더욱 찬란히 빛날 것이다.
늦은 가을의 쓸쓸함, 부정적 감정이 아니다. 카타르시스다. 회색 가을의 쓸쓸함은 봄날 연초록의 기약일 뿐이다. 차가운 머리로 가을 회색을 밟으니 따뜻한 가슴은 봄의 약동으로 두근거린다.
그렇다! 꽃이 필 때 함께하지 못한 사람이나 그 무엇을, 낙엽까지 진 쓸쓸함에서 다시 만날 수도 있는 법이다.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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