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재벌 총수의 양형 공식은 통상 ‘3·5법칙’이었다.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고 풀어줬다. 요즘은 ‘2년6월·4년’ 법칙으로 ‘진화’했나?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 요구에 따라 K스포츠재단에 70억 원을 지원한 뇌물공여죄에 대해 1심은 징역 2년6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었다. 그러나 2심은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하면서 풀어줬다. 지난달 17일 대법원은 2심 손을 들어줬다. 상고기각 판결을 한 것이다.
지난달 25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파기환송심 첫 재판이 열렸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8월 이 부회장의 상고심에서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한 2심을 깨고 서울고법에서 다시 재판을 받으라고 판결했다. 뇌물 액수와 횡령 금액도 삼성이 최순실 씨에게 제공한 말 3마리 등이 추가돼 36억 원에서 86억 원으로 늘어났다. 이 부회장이 실형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런 마당에 재판장인 정준영 부장판사의 엉뚱한 ‘경영훈계’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어쨌건, 뇌물은 고사하고 기부금도 그 악영향이 지대할 수 있다. 그 돈이 깨끗하지 못하다는 전제에서는 말이다. ‘채찍이 개를 만들 듯, 선물은 노예로 만든다’는 에스키모 속담도 있다. 선의善意일 것만 같은 선물이나 기부금이 독이 될 수가 있다는 얘기가 된다. 어째서 그럴까? 니나 스트로밍거*의 글을 읽어보자.
왜 선량한 사람이 나쁜 돈을 받을까? 그 나쁜 돈을 받게 되면 어떤 효과가 서서히 나타날까? 이러한 의문들이 억만장자인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을 둘러싼 수수께끼이다. 그는 2008년 유죄확정을 받고도 몇 년 후에 아주 쉽게 일류대학과 저명한 과학자들의 환심을 샀다. 10억 달러나 되는 재산 덕분에 엡스타인은 대학 연구센터와 과학자들의 연구 활동에 아낌없이 자금을 제공했다. 그 가운데는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의 미디어 연구소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 돈을 받는 대학이나 과학자들은 그의 과거에 대해 알고 있었다. 사실, MIT의 고위지도자들은 엡스타인의 기부를 승인했으며, 익명으로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MIT 총장은 2012년에 기부금을 줘서 고맙다고 엡스타인에게 보낸 편지에 서명까지 했다. 그 후 조이 이토(Joi Ito)는 MIT 미디어 연구소 소장직을 사임했고, 다른 사람들도 사과했다. 그러나 엡스타인에게 기부금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난 다음의 조처들이었다. 너무 때가 묻어서 그 기부금을 익명으로 남겨둘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교육계 지도자들이 엡스타인의 돈을 받을 수 있었을까?
어떤 회계에서는, 돈은 그냥 돈일 뿐이다. 그러므로 돈이 불미스러운 사람의 호주머니에서 나와 가치 있는 연구에 투입될 때 가장 큰 이득이 극대화되지 않겠는가? 이 말은 논리적으로 그럴 듯해 보인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사람들이 부정不正 행위자들로부터 돈을 받을 때 작용하는 심리적인 원리를 고려해 보자.
일련의 최근 실험에서 아르베르 타시미(Arber Tasimi) 등은, 도덕적으로 때 묻은 돈은 액면가보다 가치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나쁜 사람에게서 100달러를 받는 것보다 좋은 사람에게 99달러를 받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그 차이가 아주 크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원칙을 포기한다. 곧 좋은 사람에게서 1달러 받는 것보다는 나쁜 사람에게서 100달러 받는 것을 선택한다.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때 묻은 돈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감을 가지고 있지만, 보상에 대한 강한 유혹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더러운 돈을 취할 때는, 이 내부 갈등을 합리화로 해결한다. 이 합리화의 힘은 아주 강해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방금 한 행위(더러운 돈을 받은 일)의 부정적인 효과를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정교한 인지 활동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행동은 기부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변질될 것이다.
이해의 충돌(conflict of interest)에 관한 연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준다. 기부자가 도덕적으로 의심스럽다는 가능성에 직면하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들 앞에 제시된 증거를 선택적으로 조사하고, 일반적으로 그 기부자가 도덕적으로 회복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희박한 증거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엡스타인이 쓴 돈의 위력은 과학자들에게 의도한 효과를 나타냈다. 로버트 트리버즈(저명한 진화생물학자)와 로렌스 크라우스(세계적인 이론물리학자)와 같은 몇몇은 엡스타인을 옹호했다. 많은 다른 과학자들도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이 침묵은 무언의 지지 역할을 했다.
사회심리학에 관한 많은 연구 결과는, 사람들은 타인들 특히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행동에 근거하여 용납 가능한 행동 여부를 판단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엡스타인이 단지 저명한 과학자들과 어울린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범죄 혐의를 최소화하는 강력한 사회적 신호가 된다. 존경받는 많은 과학자들과 친하게 교제하는 사람이 어떻게 나쁜 사람일 수 있겠는가!
이것은 사실상 일종의 도덕적 돈세탁이다. 엡스타인의 기부금을 받아들임으로써, 과학자들과 연구기관들은 엡스타인에게 무언의 승인을 표한 것이다. 부패한 자들과 어울리면 죄책감이 들지만, 훌륭한 사람들과 어울리면 품위 있음을 느낀다. 더러운 돈으로 채워진 금고는 결국 바닥이 난다. 그러나 그 더러운 돈 때문에 생긴 연구의 신뢰 손상은 지속된다.
엡스타인 이야기는 별스레 지독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연구기관들을 계속해서 괴롭힐 근본적이고 제도적인 문제점을 노정시켰다. 이토(전 연구소장)는 MIT미디어 연구소에 퇴출되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지금도 연구기관에서 연구기금을 마련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은 그와 취약성을 공유하고 있다.
이 문제는 더 나은 사람을 연구소장으로 임명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더러운 돈 때문에 생기는 심리적 약점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정책과 동기와 기준이 제자리 잡아야 한다. 다이어트를 지속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과자를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것임과 마찬가지로, 편견 없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편견을 낳는 정보에의 접근을 줄이는 것이다.
예를 들면, 대학과 연구소는 기부자만 조사하고, 기부 규모에 대해서는 눈을 감음으로써 기부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오직 구조적 변화를 통해서만, 연구기관들은 자신들의 명성을 세탁하기 위해 기부금을 이용하는 사람들로부터 덜 취약하게 될 것이다.
엡스타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포식자였다. 우리가 연구기관들을 공고히 방어하지 않는다면, 늑대들은 다시 슬금슬금 기어들어올 것이다.
*Nina Strohminger(와튼 스쿨 경영윤리 및 법률학교수 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심리학 교수), 「Psychology behind taking dirty money from Jeffrey Epstein」, 『The Korea Herald』, September 23, 2019. **Jeffrey Epstein(1953~2019). 헤지펀드 매니저 출신의 억만장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절친’으로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로 수감. 지난 8월 10일 교도소에서 자살했다. 2002~2005년 뉴욕과 플로리다주에서 20여 명의 미성년자와 성매매를 하는 등 수십 명을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체포돼 기소됐다. 성매매가 유죄로 인정되면 최장 징역 45년을 선고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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