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 칼럼] 극단적 이기주의? ... 위아설(爲我說)에 대한 소고(小考)

옛날의 배우는 이들은 자신을 닦기 위해 공부했고, 오늘날 배우는 이들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공부한다.(『논어』, 「헌문」)

자기 닦기를 소홀히 하면서 오로지 ‘치인治人’, 곧 출세를 위해 공부한 이들이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고 핏대를 올리며 목청을 돋운다.

조송원 승인 2020.02.05 00:42 | 최종 수정 2020.02.05 01:21 의견 0
양주

내 엄지손가락 하나를 희생하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지구상에서 사라진다고 치자. 그러면 나는 기꺼이 내 손가락 하나를 잘라낼 수 있을까? 조건은 이 이타행利他行을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되고, 그래서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언어유희에 불과하다. 손가락 절단과 바이러스 소멸과는 인과관계뿐 아니라 상관관계도 전혀 성립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생뚱맞은 물음을 해보는 것은 하 어수선한 시절에 위아설(자기만 생각하라는 주장)에 대해 한 번 생각해봄 직하기 때문이다.

양주가 말했다. “옛날 사람은 자기의 털 한 오라기를 손상해서 온 세상을 이롭게 한다 해도 하지 않았고, 온 세상이 자기 한 몸을 받든다 해도 임금의 자리를 취하지 않았다. 사람들마다 자기의 털 한 오라기라도 손상하지 않고, 사람들마다 세상을 이롭게 하지 않으면, 세상은 잘 다스려질 것이다.”(『열자』,「양주」)

양주(楊朱·BC440~360?)는 중국 전국시대 독자적인 사상가로 거의 잊힌 인물이다. 그의 사상은 위아설, 곧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하라’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묵적(墨翟·BC470?~391?)의 겸애설(兼愛說), 곧 ‘두루 사랑하라’는 주장과 대척점에 선다. 맹자는 묵적을 극단적 이타주의자로, 양주를 극단적 이기주의자로 단정하며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천하의 언론이 양주의 주장을 따르지 않으면, 묵적의 주장을 따르고 있다. 양씨(양주)는 ‘자기를 위하라(爲我)’고 주장하였으니, 이는 임금이 없는 것이다. 묵씨(묵적)는 ‘두루 사랑하라(兼愛)’고 주장하였으니, 이는 아비가 없는 것이다. 아비가 없고 군주가 없으면 이는 짐승이다. (···)양주와 묵적의 주장이 그치지 않아서 공자의 길이 드러나지 않으니···”(『맹자』, 「등문공」)

이 맹자의 언표言表에서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첫째로 공자의 춘추시대나 맹자의 전국시대에는 유학 혹은 유가儒家는 지배학설이 아니라, 제자백가 사상의 하나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천하의 사람들이 ‘공자의 길이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양주와 묵적의 학설을 지지하고 있었다.

둘째로 맹자의 독단론이다. ‘자子’는 스승이나 웃어른 그밖에 학문과 인격이 높은 사람들에게 붙이는 존칭이다. 후세에 ‘공자 버금가는 성인’, 곧 아성亞聖으로 추앙 받은 맹자는 ‘사상의 자유시장’을 부정했다. 오직 유학만이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하는 독단론자였다. 하여 양주의 주장은 군주제를 부정하며, 묵적의 주장은 가부장제를 부정한다고 간주하여 ‘짐승’이라는 극언을 한 것이다. 천하의 사람들, 특히 민중의 지지를 받는 양주나 묵적에 ‘자’를 붙이기는커녕, 양씨니 묵씨니 하며 멸칭했다.

셋째로 맹자의 독단론이 인류의 지성사에 남긴 해독이다. 맹자의 책 『맹자』가 유학의 경전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여지면서, 양주와 묵적에 대한 그의 독단적 비판이 유학자들에게는 정설이 되었다. 그 결과로 인류 지성사의 소중한 자산인 묵적은 BC 2세기초에 지식인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봉건 왕조로부터 금기시되었다가 겨우 20세기에 이르러 재평가를 받고 있다. 양주는 저작조차 전해지지 않아 적잖은 오해를 받고 있다. 다만, 양주의 사상은 『여씨춘추』, 『회남자』, 『한비자』, 『열자』 등에 단편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양주의 ‘자기를 위하라’는 위아설은 과연 극단적 이기주의일까? 전국시대에 양주가 위아설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과 현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춘추전국시대는 대혼란기였다. 주왕실이 쇠퇴하자 기존의 봉건질서 무너지고 군웅이 할거했다. 겸병전쟁으로 백성들은 전쟁터에 끌려갔고,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으며, 도적이 횡행하고 굶주림이 일상이었다. 새 질서는 구축되지 않았다. 이 와중에서 사상가들은 저마다 구세관救世觀을 내세우며 유세를 했다. 유가, 도가, 묵가, 법가 등 바야흐로 백가百家가 쟁명爭鳴했다.

그러나 양주가 보기에는 백가百家들의 구세관이 탐탁지 않았다. 세상을 구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천하를 이롭게 한다는 게 정녕 무슨 의미인가? 양주는 천하를 주더라도 그게 자신에게 이롭다고 여기지 않았고, 그 자신 또한 천하를 이롭게 할 생각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천하를 가지는 것을 이롭다고 여기는 사람이 천하를 가진다면, 그는 반드시 천하를 사사로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쥐락펴락할 것이다. 또 천하를 이롭게 하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간섭과 개입을 정당화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래서 양자는 “사람들마다 자기 털 한 올을 뽑는 것조차 하지 않고, 사람들마다 천하를 이롭게 여기지 않는다면 천하는 다스려질 것이다”라고 했다.

양주의 구상은 모든 사람들이 천하를 이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고, 또 천하를 이롭게 하겠다는 생각도 품지 않은 채 오로지 자기의 삶만을 가꾸며 살아가는 자유인들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천하를 이롭게 여기지도 않고, 천하를 이롭게 해주겠다는 생각도 하지 말라는 양주의 철학은 오늘날 우리에게 두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하나는 과연 천하를 가지는 게 당신에게 이로운 일이냐는 것이다. 양주는 누가 천하를 준다고 해도 받지 않는다. 천하와 정강이의 털 한 올을 바꾸자고 해도 바꾸지 않는다. 그에게 천하보다 중요한 것은 하늘로부터 생명과 그로부터 발산하는 자기 존엄, 바로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질문은 당신이 과연 세상을 이롭게 만들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양주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타인을 이롭게 하거나 행복하게 해줄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타인과 세상을 위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자신의 명예욕이나 자존심을 채우거나, 혹은 자신의 편협한 시야에서 내린 결론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조송원

흔히 유가儒家의 이상은 ‘수기치인(修己治人·자기를 닦아서 남을 다스린다)’이라고 한다. 그러나 공자의 이상은 ‘수기안인(修己安人·자기를 닦아서 남을 편안하게 한다)’이었다. 유학이 모든 학설을 제압하고 지배학설로 격상했고, 과거과목이 되었다. ‘치인治人’, 곧 출세에 이상을 둔 유생들은 경전을 ‘과거 준비’로 공부했다. ‘자기를 닦는’ 일은 한 구석으로 저만치 제쳐두었다.

옛날의 배우는 이들은 자신을 닦기 위해 공부했고, 오늘날 배우는 이들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공부한다.(『논어』, 「헌문」)

2000여 년 전에도 공부가 출세의 수단이었는데, 지금은 오죽할까? 자기 닦기를 소홀히 하면서 오로지 ‘치인治人’, 곧 출세를 위해 공부한 이들이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고 핏대를 올리며 목청을 돋운다.

자기 닦음 없이 등과한 이들이 설쳐대는 현실에서 양자의 위아설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황교안이나 나경원, 그리고 윤석열의 폭주를 목도하며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상념이다. 더불어 지난 행적에서 보건대 유시민이나 조국, 그리고 임종석은 그들과 뚜렷이 대비된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이상수 외, 『이타주의자』(사회평론, 2018), pp.50~117.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