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73) 여전히 집-우천리 22, 황병욱

손현숙 승인 2022.10.28 20:56 | 최종 수정 2022.11.04 20:38 의견 0

여전히 집
- 우천리 22                  
                             황병욱

 

마른 물길을 뒤집으면서
집 앞 목련나무는 허연 달빛
아래서 낮은 신음을 토해냈다
달빛조차 고개를 돌려버리는
깊은 숨이 어느새 빠져나가버린
뻐꾸기 울지 않는
침묵의 집
산 밑의 바람이 채 머물기도 전에
눈앞에 집이
기억이 되고,
침묵이 되어
다시 짓기에도, 흘려보내기에도
머쓱한
여전히 눈앞에 있는
손 시린

황병욱 시인

황병욱 시집 《물의 도시》을 읽었다. ‘한국미소문학’. 2022.

우리에게 집은 무엇일까. 아버지가 부재하는 집. 수도관이 터지고. “허름한 바람이 태연히 드나들고”. “연탄재가 씻겨 내려가고”. “하얀 무지개”를 잡아야 하는 집. 누구의 도움도 닿지 않은 채 얼룩진 울음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집. 그 속에서 화자는 슬픔의 간극을 보았으리라. 

황병욱의 시집을 읽는 내내 필자의 울음 따위는 사치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겨울의 복판을 가르면서 미리 도착한 목련의 눈부심에서도 시인은 화인火印을 보았을 터. 도대체 시인은 어느 시간쯤에서 안심을 얻었으려나. 미안해서 함께 울지는 못했지만, 침묵 속의 기억들은 손 시린 언어가 되어 제 갈 길로 멀리, 나아갈 것임은 알겠다.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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