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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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2 01:53 | 최종 수정 2021.02.02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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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식구는 행당동 한양대 앞에 살다가 아마도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철길 건너 윗 동네로 이사를 갔다. 1968년일 것이다. 엄마가 아버지 월급을 조금씩 모아 산 집이었다. 살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리어카에 짐을 싣고 이사가던 기억이 아주 어렴풋이 희미하게 난다. 어린 나는 아버지가 앞에서 끌던 리어카를 뒤에서 밀었던 것 같다.
새로 살게 된 집은 우리 식구들에게 행당동 128번지로 통하는 곳이다. 이 집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했으니 5년 남짓 살았다. 그러니 내게는 어릴 적 고향과 같은 곳이다. 내 유년기 시절의 추억은 거의 이 집과 관련된다 해도 무방하다. 물론 그 집터에는 지금 대형 아파트가 들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추억의 장소는 없어지고 장소가 있던 공간만 남았다. 그 집에서 찍은 사진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별로, 아니 거의 없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누나네 집에 이 사진이 있었다. 그 사진을 보고 너무 기뻤다. 내가 중학교 막 입학하고 교복입고 찍은 사진도 있다. 아무튼 이 집은 작고 허름한 집이었다. 그래도 남향집이며 앞이 탁 트인 집이라 정감어린 집이었다. 집 안에 놓은 좁은 마당에서 사진을 찍으면 뒤로 보이는 전경이 시원했었다.
하지만 나는 늘 아랫 동네 양옥집에 사는 부잣집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래서 중앙일보에 다니셨던 아버지가 엄마 보라고 매월 가져 오셨던 여성중앙에 실린 양옥집들을 보며 부러워했다. 참! 나는 아버지 덕분에 소년중앙도 월마다 볼 수 있었다. 소년중앙에 실린 미래에 관한 기사들은 무척 재미있었다. 지금 그대로 실현된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아무튼 나는 여성중앙에 실린 집들을 보며 엄마한테 우리는 언제 이런 집에서 살 수 있냐고 물은 적도 있었다. 그 당시 근사한 제법 양옥집들 가격이 200만~300만 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 당시 우리가 살던 행당동 128번지 집은 기껏해야 이삽십만 원 정도 했었을 때다. 내 철없는 물음에 엄마는 긍정적으로 대답하셨을 것이다. 그 긍정의 힘으로 엄마는 좀 더 좋은 집에서 살 것이라는 나름의 계획과 준비도 능히 하셨을 것이다.
<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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