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엄마 이야기(43) - 엄마 역할을 대신했던 누나

소락 승인 2021.02.24 20:33 | 최종 수정 2021.02.27 19:37 의견 0
엄마처럼 밝게 웃는 천사표 누나
엄마처럼 밝게 웃는 천사표 누나

아버지는 1957년부터 신문사에 들어가 20년 가까이 일하셨다. 신문을 판매하고 보급하는 부서에서 일하셨다. 부장까지 승진도 하셨었다. 한 신문사에서만 계셨던 것은 아니고 경향신문 → 중앙일보 → 서울신문 → 경향신문으로 옮기시며 근무하셨다.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76년 8월에 회사를 사직하셨다. 아직 젊으신 40세 때다. 아들인 내가 대학교도 들어가기 전이니 살 길이 막막하셨을 것이다. 아버지와 엄마는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것이다.

결국 본격적인 장사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 길은 적당히 해결하려는 길이 아니라 위기와 난관을 온몸으로 맞딱뜨리는 아주 적극적인 길이었다. 내가 어릴 적에 살던 한양대 앞에서 보양원이라는 간판을 걸고 장사를 시작하셨다. 지금 이런 업종의 가게를 건강원, 보신원 등이라 하는데 그 당시 이와 비슷한 낱말로 간판을 걸고 장사를 하셨던 것이다. 이 중탕보약집 장사는 엄마가 하기에는 힘들고 거칠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한번 오신 손님이 꼭 다시 찾게끔 하는 대단한 흡인력을 가지고 이 힘든 일을 거뜬히 해내셨다. 엄마가 장사를 잘 했던 근본적 이유는 정말로 좋은 보약을 고객에게 정성껏 해드린다는 자세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아버지와 엄마가 성동구 행당동 한양대 앞에서 중탕보약집을 하고, 우리 삼남매는 봉천동에서 살아야 했다는 점이다. 우리 가족 역사상 처음으로 두 집 살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누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집도 안간 방년(芳年)의 아가씨였는데도 할 수 없이 봉천동 집의 전업주부가 되어야 했다. 이때 내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면 천사같은 누나는 친구들을 따뜻하게 대하며 따뜻한 밥을 해주었다. 또한 방학이 되면 사촌동생들이 오더라도 누나는 늘 밥을 해주며 동생들을 다정하게 보살폈다.

이렇게 엄마 아버지와 떨어진 봉천동 집에서 누나가 엄마 역할을 하는 덕분에 나는 야성의 날개를 달았다. 아주 본격적으로 삐딱해지기 시작했다. 집에 엄마 아버지도 없는데 완전 거침없는 자유를 누렸다. 어느 날 아버지가 기습적으로 오셔서 날 야단치긴 했지만 그냥 그렇게 끝났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서울대 치대에 입학하기를 바라며 봉천동으로 이사갔지만 아들은 엉뚱한 방향으로 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엄마는 날 야단친 적이 없다. 사실 지금 나이 들어서 오히려 엄마한테 청개구리 같은 놈이라며 야단 맞기도 하지만 어릴 때는 엄마한테 야단맞은 기억이 없다. 엄마처럼 나에게 밥을 해준 천사표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저리 삐딱한 남동생인데도 누나는 엄마를 닮아 밝게 미소짓고 있다.

<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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