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엄마 이야기(40) - 우리 가족사에 특별했던 강아지들
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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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1 18:09 | 최종 수정 2021.02.22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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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동 집은 마당이 제법 넓었다. 앞 마당에 꽃밭도 있었고, 뒷마당에 장독대도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탁구대를 들여다 놓으시기도 했다. 야외 탁구장이었다. 마당이 넓으니 강아지를 키우기 좋았다. 처음에는 저 수컷 강아지를 동네 사람이 주어서 키웠다. 몸에 얼룩진 무늬가 있어서 바둑이라 이름지었다. 바둑이는 커서도 몸집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깡이 엄청났다. 성깔도 보통이 아니었다. 화가 나면 자갈을 막 입에 물고 씩씩거리기도 하는 녀석이었다. 동네 암컷들한테 어지간하게 들이대는 놈이기도 했다. 그래서 슬하에 남긴 자식들이 많은 당당한 수컷이었다. 체구는 작아도 기(氣)가 세기에 덩치 큰 동네 개들과 싸움에서도 이겼다. 늘 저런 형형한 눈빛을 지닌 수컷이었다. 암컷 개를 키우던 시장 아주머니들은 바둑이더러 우리 사위라 하기도 했다. 지금도 바둑이가 뿌린 DNA 씨앗들은 여러 세대를 거쳐 어디선가 살고 있을 줄로 안다.
암컷인 저 강아지는 어느 날 우연히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우리 가족과 인연을 맺으려는 팔자였나 보다. 바둑이는 호박이 넝쿨채 들어온 것처럼 굴러 들어온 암컷을 신부로 맞이했다. 둘은 사이가 좋았다. 둘 사이에 강아지도 태어났다. 그 때 새로 태어난 강아지들이 얼마나 예쁜지 생명의 신비를 느꼈다. 그런데 늘 동네를 건들건들 온통 휘젓고 다니던 바둑이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암컷 애리는 얌전한 강아지였다. 봉천동 우리집으로 먼저 찾아왔던 애리는 한양대 앞 행당동집으로까지 같이 가서 살았다. 그런데 애리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게 그만 하반신이 마비되고 말았다. 앞다리로만 몸을 끌고 다녔다. 그런데도 우리 가족은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누나는 매일 날 달걀을 까서 주었다. 나중에 잠실 아파트로 이사 갈 때도 실내에서 같이 데리고 가서 살았다. 그리고 거기서 생을 마감했다. 그 당시 얼마나 슬프던지 나도 엉엉 울었다. 나보다 훨씬 더 애리와 가족처럼 애뜻하게 지냈던 누나와 안나는 더욱 슬퍼했다. 우리 가족은 애리의 죽음으로 상당 기간 울적한 시기를 보냈었다.
<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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