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엄마 이야기(39) - 낙관주의자이신 엄마 슬하의 아들

소락 승인 2021.02.20 19:24 | 최종 수정 2021.02.25 17:44 의견 0
관악산이 훤히 보이는 봉천동 집에서 두 딸과 함께
관악산이 훤히 보이는 봉천동 집에서 두 딸과 함께

내가 고등학교 때 우리집은 멀리 이사를 갔다. 성동구 행당동에서 관악구 봉천동으로다. 봉천동에서는 아버지의 큰 여동생인 큰 고모가 사셨는데 멀리 대구로 이사 가시고 작은 고모가 또 봉천동에 살게 되었다. 우리집도 작은 고모가 사는 봉천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나중에는 아버지의 남동생이며 나한테 작은아버지인 삼촌까지 봉천동에서 살게 되었다. 아버지 동생들이 모두 봉천동과 인연을 맺은 것이다.

봉천동(奉天洞), 한자 뜻이 멋지다. 하늘을 받드는 동네다. 하늘과 가까운 높은 봉천동 바로 아래 동네였다. 봉천동보다 더 어마어마한 동 이름이 있을까? 내 천(川)을 쓰는 인천(仁川), 강원도 춘천(春川), 충청북도 제천(堤川)보다 하늘 천(天)을 쓰는 봉천동은 이름의 스케일이 크다. 특히 하늘의 순리에 따른다는 전라도의 순천(順天)보다도 볼륨이 크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봉천동으로 이사를 간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봉천동과 가까운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길 바라셨던 것이다. 그것도 서울대 치대를 가길 바라셨다. 아마도 서울대 치대에 가면 졸업하고 돈많이 버는 치과의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망한 미래가 보장된다는 그런 이유들… 

하지만 사실 나는 그 당시 내가 무엇이 되겠다고 바라는 확실한 꿈이 없었다. 그래서 장래 희망에 아버지의 바램대로 별 생각없이 치과의사라고 쓴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길은 나와 멀어도 한참 먼 길이었다. 서울대 치대를 들어가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데 나는 고등학교 들어가서부터 기타와 음악에 빠져 공부를 멀리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내 성격상 치과의사는 전혀 맞지도 않는 것이었다.

새로 이사간 봉천동 집에서
새로 이사간 봉천동 집에서

그렇게 아무런 생각도 없이 살던 내 고등학교 1학년 시절에 나는 봉천동 집에서 엄마와 저렇게 사진을 찍었다. 내 삐딱한 표정과 달리 엄마는 표정이 밝다. 사실 엄마는 표정이 늘 밝으시다. 집에서 입는 옷을 입고 아무런 치장 없이 찍었는데도 엄마의 모습은 맑고 밝다. 두 딸과 함께 하는 엄마는 더욱 밝아 보인다. 공부와 멀어져 가는 삐딱한 아들 옆에서도 엄마는 저리도 낙관적으로 늘 웃고 계셨다. 덕분에 나도 비록 삐딱해지었을 지언정 아주 나쁜 짓을 하는 골치아픈 불량학생이나 문제아가 되지는 않았다. 좀 겉으론 불량해 보여도 그냥 건들거릴 뿐 속으로는 착하고 선하며 순한 아이였을 뿐이다. 어른이 된 내가어릴 적 나를 생각하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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