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강산이다. 시골도 소싯적엔 어둠 내리고 문 닫아도 집 안에서 여럿 꼬맹이들로 시끌벅적했다. 지금은 아침햇살이 퍼지고 문을 열어도 적막하다. 인기척이 드물다. 10년 안에 삼이웃이 빈집이 될 성싶다. 애기 울음소리는 언감생심, 책가방 멘 어린이를 길가에서 구경한 적도 드물다. 그나마 몇 있는 어린이도 스쿨버스로 등·하교하는 탓이리라.
젊은 시절, 글을 기계로 찍어내는 일은 글쓰기에 대한 모독으로 여겼다. 손에 쥔 펜으로 한 자 한 자 원고지 칸을 메우는 수고가 진정 영혼을 녹여 넣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글을 ‘쓰’지 않고, 워드로 ‘친’다. 타자기까지 거부했던 글쓰기가 어느 덧 ‘글치기’에 익숙해졌다. 펜으로 글을 쓴다는 말, 생소하기까지 하다.
눈 떠 보니 다른 세상? 아니다. 그 시대(當代)를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다른 세상도 그 시대일 뿐이다. 인류 출현 이래 세상은 늘 변해 왔다. 그 변화는 점진적이었다. 인간은 그 변화에 잘 적응해 왔다. 변화에 가속이 붙긴 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자연 환경이든 사회 환경이든 간에 인간이 감당해낼 만큼의 속도로 변화해 온 것이다.
그러나 점진적 변화의 누적이 비약적 변화를 결과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선 우리는 당연히 주어진 조건으로서 불변한다고 도외시한 자연 환경에도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자연환경의 근본적 변화는 우리 삶 자체를 뿌리째 뒤흔든다는 심각한 의미를 지닌다.
지구온난화로 기후 극단화 현상이 잦게 일어나고 있다. 폭풍과 홍수의 발생 횟수가 증가하고, 최고 온도뿐 아니라 최저 온도까지 계속 갱신되고 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가뭄이 심해졌다. 지표 온도 상승은 잡초에 더 유리하게 작용하므로 식량 생산을 감소시킨다.
열대성 질병을 옮기는 벌레가 온대 지역까지 이동하도록 하여, 열대성 질병을 온대 지역까지 확산시키고 있다. 또 해수면을 상승시켜 저지대 인구밀집 지역의 삶터를 위협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바닷물고기의 요람 역할을 하는 강어귀에도 타격을 주고 있다.
문제는 기후변화에는 원인과 결과 사이에 커다란 시차(時差)가 있다는 것이다. 대양(大洋)은 이산화탄소를 무척 서서히 축적한 후에 배출한다. 그러므로 인류가 지상에서 하룻밤 사이에 모두 사라져버려서 호흡을 통한 이산화탄소 배출이 전무해도, 화석연료의 연소를 완전히 중단해도, 대기는 그 이후로도 수십 년 동안 계속 뜨거워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원인과 결과를 단순히 선형 관계로 추정한 현재의 보수적인 예측보다 지구가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뜨거워질 가능성이 무척 높다. 그렇게 되면 영구동토층과 해빙(海氷)은 당연히 녹을 것이고, 남극과 그린란드를 뒤덮은 빙상까지 붕괴할 수 있다.
개인적 삶에 치명적인, 이러한 자연환경의 근본적 변화에 개인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어떻게 대처할 수 있단 말인가. 무대책이 유일한 대책이 아닐까?
이뿐 아니다. 사회 환경도 비약적 변화를 하고 있다. 과학기술은 누적적 발전을 한다. 점진적 발전의 누적이 어떤 시점에 이르면 비약적 도약을 한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이제 인간을 뛰어넘는 기계와 기계화된 인간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영상 생성형 인공지능 ‘소라’(Sora)는 ‘수백 개의 종이비행기가 새처럼 숲을 날고 있는 장면을 만들어 줘’라고 문자로 입력하면, 1분 안팎의 동영상을 만들어낸다. 이미 영화계는 이 기술이 영화 제작 과정에서 격변을 일으킬 것이라고 걱정한다. 나아가 인간의 고유 역량으로 간주하는 창의성도 인공지능이 더 뛰어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뉴럴링크(Neualink)는 인간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칩을 인간 뇌의 피질에 이식해, 인공지능 알고리즘으로 인간의 생각과 의도를 해독한다. 첫 번째 실험 대상자는 생각만으로 마우스를 움직였다. 좀 더 발전하면 전신 마비 환자들도 스스로 눈썹을 긁을 수 있다.
곧 멀지 않은 미래에 인간을 닮은 기계와 기계화된 인간이 이 지구에 득실댈 것이다. 기계화된 인간이 보통 인간을 대체하고 흡수할 것이라는 전망도 만만치 않다. 보통 인간인 ‘나’를 뛰어넘는 기계에 개인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뉴노멀(New Normal)은 ‘새로운 정상’이다. 격변 전의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일상’이거나 ‘새로운 표준’을 말한다. 정상에서 임시적인 비정상이 발생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비정상은 해소되고 정상상태로 회복된다. 그러나 자연 환경이나 사회 환경이 크고 급격히 변화하면, 정상상태로는 이 환경에 적응할 수가 없다.
하여 과거의 입장에서 보면 비정상이 변한 환경의 최적 상태가 되어, 정상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변증법의 정(正)-반(反)-합(合)과는 좀 다르다. ‘정’은 기존부터 유지되어 오던 상태를 말한다. 모순이 누적된 이 ‘정’을 부정하여 새로운 상태를 제시하는 것이 ‘반’이다.
이 ‘반’은 모순을 극복하였다고 하나, 이 ‘반’ 역시 모순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 ‘반’에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린 상태인 ‘합’으로 나아간다. 이 ‘합’이 과거의 ‘정’과는 다른 ‘정’이 된다. 이 ‘정’은 다시 모순을 누적하게 되고……, 이렇게 역사는 정-반-합의 반복으로 발전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적어도 20세기까지는 역사는 발전해 왔다. 변증법은 이 역사발전의 설득력 있는 이론 도구였다. 그러나 ‘뉴노멀 시대’는 다르다. 역사발전의 두 축은 인간 의식(지혜)과 과학기술이다. 17세기 과학 혁명 이후로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 의식의 발전을 훨씬 앞질렀다.
과학기술은 누적적으로 발전한다. 후발주자는 선발주자가 쌓아놓은 벽돌 위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의식은 세대 단절적이다. 누구나 걸음마부터 시작해야 한다.
존 폰 노이만(1903~1957)은 ‘미래에서 온 남자’로 불릴 만큼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 칭송 받는다. 뉴튼이나 아인슈타인은 누구나 아는 천재이고 학문적 업적도 탁월하다. 그러나 천재는 아니라 할지라도 21세기의 탁월한 과학자들은 물리학 지식 면에서 앞의 세 사람보다 더 뛰어날 것이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근·현대의 하고많은 정치인과 교육자 중에서 2500여 년 전의 공자만큼 식견과 지혜를 가진 자가 있을까? 현재 80억 인구 중에서 석가모니만큼 인생에 대해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 있을까? 신라시대 선남선녀들보다 현대의 젊은이들이 더 행복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논어』와 『불경』의 가르침은 아직까지 유효하다. 그러나 그리스·로마시대의 과학책으로 아직도 공부하는 과학자는 없을 것이다.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천동설을 부정했다가 조르다노 브루노(1548~1600)는 종교재판으로 화형을 당했다. 지금은 초등생들도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과학적 지식을 갖고 있다.
과학기술은 역사 발전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 부정적 효과로 지구의 생태환경이 악화되어 인류가 절멸할 수도 있다. 과학기술이 인간의 통제 범위를 넘어서서 독자적 무한 발전으로 기계화된 인간이나 인간보다 뛰어난 기계의 세상을 결과할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세상은 ‘비정상’ 사회이다. 그러나 그 시대가 도래하면, 또 다시 우리는 그 시대를 ‘뉴노멀’이라 부를 것이다.
이런 시대의 흐름에 인간 개인의 어떤 몸짓도 몸부림에 불과하다. 그 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서기 79년 8월 24일 고대 로마 도시 폼페이는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단 18시간 만에 잿더미로 변했고, 화산재에 묻혀 버렸다. 폼페이 시민들은 운명을 받아들이는 삶의 포기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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