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제는 이미 회복할 수 없다. 횡거(장재·1020~1077)는 이 법이 시행되면, 좋아할 자가 많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좋아하는 자가 백 명이고 싫어하는 자가 한 명이라도, 그 한 사람의 힘이 충분히 백 사람의 입을 막아버릴 수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 어찌 시행될 수 있겠는가?
부자의 땅은 종횡으로 이어졌지만, 가난한 자는 송곳 꽂을 땅도 없다. 그러므로 부익부 빈익빈이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원종과 조선 태조가 ‘수전법’을 만들어 시행한 바 있다. 그러나 논밭이 많은 자는 세력도 커서, 자기 소유에 손해되는 것을 공손히 기다리겠는가? 역시 끝내 그 혜택을 펴지 못하고 말았다.
한(漢) 말엽에 ‘한민명전법’이 있었는데, 정전법에 비교하면 좀 쉬울 듯했으나, 역시 권세 있는 자에게 눌려 중지되었다.」 -성호전집/권45/잡저/논괄전(論括田)-
전통사회 부의 원천은 토지였다. 토지의 균등 분배가 민생의 최고 덕목이었다. 그러나 역사상 농사짓는 사람만 농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은 유명무실했고, 세력가의 토지겸병으로 부익부와 빈익빈이라는 불평등이 만연했다. 개혁군주나 새 왕조는 민심을 얻기 위해 토지개혁을 단행하려 했으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공한 예는 거의 없다.
한 국가 내에서의 개혁도 이렇게 어렵다. 한데 개혁의 대상을 기후위기로 하고, 범위를 세계적 규모로, 곧 글로벌화해 보자. 기후위기는 한 국가 내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촌 전체가 공동운명으로 엮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지질시대를 ‘인류세’(Anthropocene)란 개념으로 특징짓는다. 인류세란, 인간이 그 본성적인 탐욕으로 말미암아 지구라는 행성을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따라서 지금의 기후위기는 인류에 말미암은 것이다.
문제는 모든 인간을 포함하는 인류라는 개념은 책임의 소재를 가리기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같은 인간이라 해도 책임의 경중은 다르다. 이 책임 소재를 정확히 가리지 않으면, 기후위기 극복의 처방책도 ‘신발을 신은 채로 발바닥 긁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기후위기의 실체는 무엇인가? 사회경제발전-에너지 생산-온실가스 배출-지구온난화-기후극한 현상-재난피해로 이어지는 연쇄작용이다. 곧, 인간이 꾀한 사회경제적 발전이 종국에 자연재해라는 형태의 부메랑으로 인간에게 돌아오고 있는 형태인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기후위기에 의한 피해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온실가스 배출량에서 국가 간 불평등과 국가 내 불평등 때문이다. 막대한 양의 온실가스를 배출하여 부를 축적해온 국가와 집단은 더 빈번해지고 강해지는 자연재해에 견고한 대비책을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기후변화에 책임이 적은 저개발국이나 사회경제적 취약계층은 재해, 환경, 보건, 식량 등 생존과 직결된 많은 면에서 치명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세계 인구의 20% 이하인 선진국들이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70%를 배출한다. 하지만 기후변화의 피해는 전 세계 온실가스의 약 3%만을 배출하는 저위도 개발도상국의 약 10억 명이 겪고 있다.
그린피스에 따르면, 한국의 상위 10%는 연간 1인당 평균 55톤을, 하위 50%는 7톤의 탄소를 배출한다. 상위 1%는 무려 180톤을 배출한다. 하위 50%에 비해 무려 27배나 많은 양이다.
기후 불평등(부정의)은 기후난민의 형태로 이미 나타나고 있다. 주로 북아프리카와 아랍지역에서 발생한 기후변화로 인한 최악의 가뭄과 이에 따른 식량 생산의 급격한 감소, 식량 가격의 폭등, 주민들의 생활고, 국가 내 갈등과 주변 국가 간 갈등이 수백만 명의 기후난민을 양산하고 있다.
기후 변화는 국가 내에서 사회적 취약계층에게 더욱 큰 고통을 초래한다. 특히 빈곤층, 여성, 아동, 장애인, 노인, 원주민, 소수민족, 이주민, 난민 등이 더 큰 타격을 받는다. 1차 산업 종사자들일수록 기후변화에 취약하고, 도서 지역이나 저지대, 해안가에 사는 주민들의 취약성이 더 클 수밖에 없다. 폭우나 폭염, 한파와 폭설 등으로 인한 피해가 사회경제적 약자에게 집중적으로 발생하며, 이들은 그런 상황에 대처하거나 그 지역을 벗어날 능력이 거의 없다.
유엔기후변화협약은 “공통의 그러나 차별화된 책임”(Common but Differentiated Responsibilities)을 원칙으로 한다. 선진국에 역사적 책임을 적용하고 더 많은 감축의무를 부여하는 것이다.
‘차별화된 책임’의 실현이 곧 기후 정의이다. 그러나 한 국가 내의 불평등을 바로잡고자 하는 개혁도 난망한데, 국가 간의 기후 불평등 해소를 위한 ‘차별화된 책임’을 강제할 수 있을까?
가능성이 극히 낮다고 판단한다. 인류의 미래는 디스토피아에 가깝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길이 없지는 않다. 그 길은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바로 ‘자기혁명’이다.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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