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39)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5장 폭발직전 버든마을(5)

조송현 승인 2024.05.01 07:00 의견 0

보통 세 사람이면 아나고 1관이면 넉넉하련만 세상에서 제일 두렵고 싫은 것이 음식 적게 시켜 눈치 보며 먹는 것이라는 동갑내기 처형의 기분을 모처럼 맞춰주니

“우리 이쁜 제부가 오늘은 더 이쁘네.”

하며 신이 나는데

“이 남자가 이쁘다고? 언니 니가 함 살아볼래?”

영순씨의 표정이 심상찮아 다시 열찬씨가 바짝 긴장하는데

“세상에 별 남자가 있나? 우리 가서방 정도면 중간은 넘는다.”

“하긴.”

겨우 봉합이 되는 모양이었다.

15. 폭발직전 버든마을(5)

이제 영서가 초등학교에 다니니 아침에 김서방과 슬비가 출근하기 전까지 영서네 집에 가서 아이가 일어나기를 기다려 밥을 먹여 학교에 보내고 나면 학교급식으로 점심을 먹고 오후 한시쯤 하교할 때까지 영순씨도 별 하는 일 없이 자유시간이 주어지는 것이었다. 별로 하는 일이 없어 심심하기도 하지만 진장의 아버지산소가 생나무울타리로 그늘이 진데다 습기가 많아 성묘철인 음력 7월 보름인 양력 8월말이나 9월초까지 기다리면 너무 풀이 우거질 것 같아 미리 가서 1차로 풀을 좀 벨까싶어

“당신, 나하고 언양 산소에 좀 갔다 오면 안 될까?”

하니 며칠 전에 왔다간 신평 사돈을 또 부를 수 없다면서

“당신 혼자 좀 갔다 오소. 누님 집을 둘러보거나 고향친구들 만나 하루쯤 자고와도 되요.”

하고 노포동 시외버스터미널까지 실어다 주었다. 평일이라 손님이 별 없어 조용한 버스에서 꾸벅거리며 졸다 눈을 뜨니 벌써 눈앞에 장심배기골짜기에 걸린 육교와 푸렁바우 가는 길의 높다란 언덕이 보이고 길가에 있는 할머니의 산소가 보이는 것 같았다. 언양에 내려서 소주 한 병과 과자를 사서 고속도로 교각 밑에 놓인 옛날 식 뚝다리를 건너 이미 일부가 보상을 받고 떠났지만 아직 대부분의 주민들이 여전히 수용반대를 외치며 담마다 붉은 페인트로 온갖 구호를 써놓아 고향이라기 보다는 무슨 데모현장 같은 버든마을을 돌아 새빗도랑을 건너가는데

“어이, 이 국장! 열찬씨!”

약간 혀가 짧은 목소리로 뒤에서 누가 불러 돌아보니 과연 예상한 데로 옆집의 동갑친구 영관씨였다.

“아이구, 우리 구장님이 우짠 일로?”

“안 그래도 꼭 한 번 만날라캤는데 잘 됐네. 그래 진장 산소에 가는 길이가?”

“그래. 자네는 별일이 없나?”“

“저 동네 꼬라지 좀 보게. 별일이 없겠는가? 온 동네가 전쟁터고 난장판이네. 어차피 수용은 되는 거고 단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난린데 한번 변하기 시작하니 촌인심이 더 무섭네. 수용반대투쟁위원회에 돈을 내거나 협조는 않으면서 단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 수백 년 대대로 같이 산 이웃도 없다네. 뭐 돈만 받아 나가면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말이야.”

“안 그렇겠나? 우리 버든마을이 옛날부터 장돌뱅이 각성(各姓)바지들이 살아가던 빈촌이라 다하겠지.”

“좌우간 그건 종석이나 내 같은 수용반대투쟁위원들이 시준이, 인도 같은 동생들 하고 의논 맞추어 할 일이지만 자네도 꼭 알아야 하고 또 해야 될 일이 있네.”

“그래. 필요하다면 고양이손이라도 보태야지.”

“맞아. 자네 집안일도 있고 동네일이지만 자네가 아니면 아무도 못하는 일도 있다네.”

“그래?”

“내가 종석이한테 전화할 테니까 산소 둘러보고 같이 내려오너라. 같이 점심이나 먹으며 이야기하자.”

하고 헤어져 진장의 죽은 종찬형님집에 이르러

(누가 있나?)

2층을 쳐다보다 혹시 낮잠을 자다 부스럭거리며 강숙이나 해숙이가 내려오는 것도 피차 번거로울 것 같아 아래층 창고에서 낫 하나를 찾아들고 울타리 밖 아버지산소에 가니 이미 훤하게 풀을 잘 베어놓았다. 울산의 백찬이 동생이 왔으면 무덤 앞에 과일이랑 사탕부스러기라도 있을 텐데 깨끗한 것으로 보아 종찬씨의 큰아들 순우씨가 해마다 제 아버지가 하던 대로 너무 우거지기 전에 1차로 벤 모양이었다. 산소에 술 한 잔을 붓고 절을 하다

“아이고, 아버지 고맙습니다. 하마터면...”

근간에 있었던 일, 자칫 진주로 쫓겨 갈 번한 사태를 생각하며 쓴 웃음을 짓는데

“어이, 이 동장, 열찬이 왔나?”

길 건너 소 막에서 고추친구 종석씨가 불렀다. 한마을에서 동갑으로 자라며 언양농고까지 같이 나왔지만 워낙 조용한 친구라 별 접촉이 없었지만 워낙 착하고 원만하기도 해 특별히 안 친할 이유도 없었다.

“잘 있었나? 농고동창회는 자주 가나?”

“야, 니 얼마 전에 을락이 딸 치울 때 우리 만났다 아이가?”

“참 맞다.”

며칠 전에 본 친구였던 것이었다.

“영관이 전화 받았제?”

“그래 어서 산소 한 바퀴 둘러 오너라. 너거 큰아부지 산소 보고 바로 우리 집에 오너라. 내 씻고 준비할 게.”

해서 큰 공동표지의 할머니 서촌댁과 큰어머니 상남댁과 어머니 명촌댁의 산소를 둘러 다시 종찬씨집앞을 돌아 작은 공동묘지의 큰 아버지 산소를 돌아 나오니

“열찬아, 타라.”

이미 시동을 걸고 기다리는 종석씨의 차를 타니 이미 영관씨와 약속이 있었는지 바로 고속도로박스건너 <교동갈비>라는 식당에 차를 댔다. 오며가며 거기 식당이 생긴 건 자주 보았지만 막상 출입하기는 처음이라

“야, 내가 이 식당에 다 와보네. 처음 여게 식당이 생길 때 이 촌구석에서 갈비집이 장사가 될까 걱정했는데 이외로 손님이 많아 지내가다가 보면 관광버스랑 승용차가 가득하던데 말이야.”

“그래. 언양바닥에서는 육질이 최고라 값이 비싸도 전국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많이 온단다. 또 소머리곰탕도 최고고.”

“그래? 이 땅이 아마 옛날 우리 한마지기 자리 같은데.”

“아이다. 너거 한 마지기자리는 톨게이트 옮기고 국도 확장되면서 다 들어가고 여게는 그 안쪽 박일룡씨 땅이다.”

“아아, 그 만호아버지 박일용씨!”

열찬씨가 벌쭉 웃었다. 열찬씨보다 다섯 살 아래의 그 만호라는 아이는 버든마을에서 가장 부지런한 농부로 당시에 벌써 논이 스무 마지기가 넘던 부잣집 박일룡씨의 아이였는데 한동안 열찬씨가 저녁에 두 시간씩 공부를 봐준 적이 있었다. 똘망똘망 잘 쟁긴 그 아이는 머리가 나빠도 너무 나빠 콜럼버스를 가르치고 금방 물어도 대답을 못해 자신의 코를 가리키며 “코, 코, 콜럼버스!”를 연발해도 콜럼버스를 연상하기는커녕 그런 사람이나 단어가 있는 것조차도 몰랐고

“어이, 열찬아, 니만 믿는다.”

하고 안방으로 건너가 만호아버지 일용씨부부가 방장이 부스럭거리면서 묘한 소리를 내는 것을 눈치 챈 열찬씨는 철모르는 만호가 들을까 봐 일부러 목청을 높여야 했다.

“친구야. 뭐 물래? 오랜만에 고기 좀 구울까?”

먼저 와 기다리던 영관씨가 묻자

“많이 비쌀 건데.”

머뭇거리는 열찬씨에게

“걱정마라. 여게 한우 200마리를 키우는 진장 소재벌도 있고.”

“평리부락수용반대투쟁위원회 위원장에 삼남면주민자치위원장도 있고.”

둘이 주고받으며 모처럼 귀한 친구가 왔다고 1인분에 2만2천원이나 하는 최상품고기를 5인분이나 시켰다. 입에 살살 녹는 고기로 금방 소주 한 병을 비운 후에

“어이, 우리 동장시인님에 이 국장님, 친구가 꼭 알아야 될 일이 있네. 우리가 이웃에 있으면서 모르는 척 하다가 나중에 일이 터지면 친구로서 도리가 아니기도 하고.”

영관씨가 조심스레 말을 꺼내는데

“와? 우리 집안에 무슨 일이 있나? 또 동네 산을 팔았거나 숨은 땅을 찾았거나?”

“그런 일이라면 얼마나 좋겠노만 니도 짐작하겠지만 정승아재집이 심상찮다.”

“심상찮다니?”

“들리는 말로 재추댁이 화야엄마가 정승아재를 우째 꼬았는지 버든에 집하고 대추만디 두 마지기가 정승형님하고 화야엄마하고 두 사람 공동명의로 넘어갔다는 말도 있고 통째로 넘어갔다는 말도 있다.”

“그거야 등기열람해도 되고 면사무소 인감발급만 확인해도 알 건데.”

“알면 뭐 하노? 장남 용우가 그런 걸 알아서 처리해야지.”

“그래 우리 집안에서도 재작년엔가 한번 용우를 불러서 집안 제사문제랑 버든에 재산문제를 의논했는데 지는 그저 저거 엄마를 믿는다는 말만 하더라.”

“그 깍쟁이처럼 닳은 여자가 우째 저거 엄마고? 작은 엄마지.”

“그래도 지는 자기들 4남매가 아직 어릴 때 들어와서 네 살짜리 찬우를 친자식처럼 키워준 엄마를 믿는다는 거지. 또 데꼬 온 딸 창화누나가 공장에 다녀서 자기들 공부하는 학비를 댄 사실도 그렇고.”

“그거는 이미 그 아가 시집갈 때 한 살림 내어준 것으로 충분한데다 나중에 또 땅을 팔아 돈을 가져갔다면서.”

“그건 그렇지만.”

“너거 경주가씨 집안이 사람이 좋은 건지, 너무 무른 건지 동네사람들은 모두들 도통 이해가 안 된다네. 근본도 모르는 딸아이에게 성을 주고 호적에 입적시켜준 것만 해도 어덴데 말이야.”

“좌우간 사회생활 많이 한 친구가 알아서 하소. 나중에 용자, 용화 두 딸은 두고라도 용우, 찬우, 특히 장가도 못 간 찬우가 돈 한 푼도 못 받고 병든 아버지 정승아재만 쳐질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그래. 내 읍내에 상찬이 형님이랑 한 번 의논해보지.”

“그래. 그 연탄집형님이 틀림이 없기야하지만 인자 나이가 너무 많다 아이가?”

“그렇긴 하지.”

하며 또 술을 한참이나 마시고 고기를 2인분이나 더 시킨 뒤에

“인자 이건 친구 자네 아니면 안 되는 일일세.”

영관씨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니?”

“고속철공사와 협상이 막바지인데 우리 수용반대투쟁위원회에서 내건 조건중의 하나가 우리가 마을을 떠날 때 망향비(望鄕碑)를 세워주는 것을 조건으로 걸었는데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네.”

“망향비라? 그래. 그 신통한 생각을 누가 해내었단 말인가?”

“우리가 보상을 좀 유리하게 받기위해 근래에 마을이 뜯기고 강제이주를 당한 몇몇 곳, 예를 들어 반구대의 대곡댐건설로 마을이 뜯긴 두동면 삼정리를 비롯한 몇 군데의 이주민들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얻은 정보지. 보상투쟁위원회에서 주민들이 협상의 조건을 유리하게 가지기 위해서 우리는 보상이니 뭐니 돈도 싫고 오로지 조상대대로 살던 땅을 자손대대로 물려주며 눌러 살기를 원할 뿐이라며 어깃장을 놓으면 그 각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보상가도 좀 올라가고 또 망향비나 정자를 세우는 일도 대체로 협조가 잘 된다더군.”

“아, 그랬구나? 내 TV에서 얼핏 대곡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위의 도로가에 아담한 정자를 짓고 실향민 두엇이 나와 옛날을 회상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네.”

하며 삼정리 출신으로 서구청에 같이 근무했던 이청희씨가 주민복지국장으로 퇴직할 무렵 그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을 떠올리는데

“그래 수몰지역인 두동에서 댐이 보이는 높다란 언덕에 망향정을 세우는 것과 달리 평지인 우리는 아마도 조그만 소공원을 조성하고 망향비를 세우는 것으로 되어간다네.”

“그 참 잘 되었네. 그럼 내가 해야 할 일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비문을 쓰는 일이지. 친구 말고 누가 또 그 일을 하겠나?”

“그래? 그렇긴 한데...”

“와? 옛말에 하던 지랄도 멍석 펴면 안 한다더니 친구 니가 꼭 그 맞잡이네. 우리가 일껏 덕시기 펴놓으니 그 잘 쓰던 글을 다 안 쓸라카네.”

“그렇다기보다는...”

“와? 자꾸 그래 쌓노?”

“우리 마을이 생각보다 시인을 많이 배출된 곳이야. 옛날 조선말에 석암선생이라고 석찬이 저거 증조부께서 근동에서 알아주는 한학자겸 시인으로 작천정 누각에도 그 시가 걸려있고 또 해방이후 한글시인도 나 말고도 석주동생 종주하고 영만이형님하고 둘이 더 있지.”

“우리가 어데 그걸 모르나? 근간에 노야선생 영만이형님이 시집을 내고 출판기념회를 열어 우리가 갔다오기도 했고 또 종주가 시집을 내었다 소리를 들었지만 버든출신으로 시인이라면 제일 먼저 나온 사람, 또 언양초등학교 총동창회 운동회때 모교에서 출판기념회를 열고 동창들에게 시집을 2천부나 배포해서 언양사람들이 그 시가 가슴을 울린다고 좋아하고 그 시에 자기 사는 마을이나 이야기가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찾아보며 이런저런 행사 때 인용하는 것이 자네의 그 <꿈꾸는 율도국>이란 시집 아이가? 그라고 <아침마당>이니 <여섯시 내 고향>이니 수시로 방송에 시인으로 소개되어 누가 생각해도 언양출신의 대표적 시인이지.”

“글쎄 그렇긴 하지만...”

하는 순간 여태 듣기만 하던 종석씨가

“어이, 친구 봐라! 글 세(稅)는 책방에 내고 내 말 좀 듣게. 우리가 문학이니 시는 잘 모르지만 자네 시집을 읽으면 뭘 좀 알 것 같고 가슴에 울리는 게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그 뜻을 잘 모르겠다는 말이지. 몇 십 년 몇 백 년이 지나 이 마을 출신이나 그 후손이 찾아왔을 때 가슴이 뭉클하며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어야 안 되겠나? 마 친구 니가 써라.”

“그래. 한번 생각해보든지.”

“생각은 무슨 생각. 우리는 그래 알고 있으니 미리 구상이나 좀 하소.”

“그래보지. 그런데 시비는 어데 세울 끼고?”

“그건 아직 미정이다. 협상이 마무리될 때 공사 측에서 알맞은 부지를 제공하겠지.”

“그래 알았다.”

하는데

“아이구, 오늘은 본동 유지어른들이 오래도록 무슨 말씀을 그리 찰지 게도 하시는지 모르겠네. 자 커피나 한 잔 하고 하이소.”

키 작은 주인사내가 인사를 하는데 나이는 자신들보다 몇 살 많은 것 같은데 말투가 언양사람 억양이 아니었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말이 나온 김에 내 이야기 하나 더 하까?”

커피를 후후 불면서 영관씨가

“친구야, 니 구장하던

또재형님 생각나제?”

“그래. 방간집 둘째 아들 또재형님말이제? 일재형님, 또제형님, 삼제형님 셋이 우리 버든마을에서 제일 키가 큰 장군들 아이가?”

“그래. 그 형님 세상 베린 이야기 들었나?”

“아니? 언제? 와 죽었는데?”

“그 내막이 참 기가 막힌단 말일세.”

영관씨가 한숨을 쉬면서

“그 이야기는 종석이친구가 한번 해보소. 나는 입담도 없지만 후임구장으로서 입에 담기가 좀 그러네.”

하고 바통을 넘기자

“열찬아, 니 또재형님이야 잘 알끼고 그 우에 일재형님도 생각나제? 와 부산서 운전하다가 다리를 다쳐 목발 짚고 다니던 형님 말이다?”

“그래. 버든토박이 내가 와 모리겠노? 삼제형님도 알고 죽은 송자누님에 차꼴댁이도 다 생각이 난다.”

“그래 그 일재형님밑에 유락이라는 아들이 있는 것도 아나?”

“일찍 마을을 떠나 그거는 잘 모르고 또재형님하고 딸 순늠이는 생각이 난다.”

“그래 그 방간집 하동댁이가 덩치도 크고 살림도 많아 웃각단 새미끌에서는 제법 큰소리 탕탕 쳤다 아이가? 그 집이 무슨 일론가 자꾸 망해 송자누나가 죽고 하동댁이고 죽고 다리 다친 장남 일재형님, 망내이 삼제형님도 다 일찍 죽은 거는 니도 다 안다 아이가?”

“아이다. 삼제형님 죽은 소식은 처음이다.”

“그래. 좌우간 그래 알면 될 것 아이가? 벌써 몇 년 됐다 아이가? 버든에 마지막 동산(洞山) 판 돈이 나온 기 말이다.”

“그 기 언젠데?”

“한 7,8년 됐을 끼다.”

“그라면 우리는 와 몰랐을꼬? 우리 아부지가 버든마을상포계회원으로 한 모가치 받아야 될 건데?”

“내가 알기로 아마 진장에 종찬이형님이 받았을 끼다. 우리 버든사람들끼리 하는 말이 있다. 동네 산 판 돈이 나올 때마다 옛날 명촌이손 모가치는 엉뚱한 조카 종찬이형님이 다 탄다고. 한 분은 그걸 안 일찬이형님하고 사촌간에 싸움이 나서 둘이 원수가 졌다고도 하고. 또 정작 부산에서 공무원께나 한다는 열찬이자네나 언양바닥에서 경우 바르기로 소문난 상찬이형님은 그 내용도 모르는 판에 어문 종찬이형님이 목에 때를 배낀다고 말이야.”

“그래 나는 전연 몰랐는데.”

“그래. 진작 고향에 자주 좀 오면 됐을 것 아이가?”

“이 사람아, 나는 설, 추석에 벌초에 묘사에 일 년에 적어도 너댓 번은 왔다 아이가?”

“핑뎅이 불 끄듯이 명절이나 일 있을 때 휙 왔다 휙 가뿌면 뭐 하노? 친구들하고 술밥 간에 이야기나 좀 들어야 될 것 아이가?”

“그렇구나. 미안하네.”

“마실사람들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면 종찬이형님은 자기가 집 앞에 작은아부지 산소를 돌보니까 동네 산 판 돈쯤은 당연히 자신이 챙겨도 된다고 큰소리를 탕탕 쳤다 아이가?”

“그랬구나. 그랬겠지.”

10년 정도 되었다면 영주의 일찬씨가 죽기 전이나 죽은 직후였으니 그렇게 어영부영 넘어갈 수 있었겠다 싶으면서도 그 욕심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사촌 간에 또 한바탕 전쟁이 벌어지고도 남을 일, 차라리 잘 됐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미 종찬씨, 일찬씨 두 형님이 다 돌아가신 판에, 일찬씨의 초상 때 종찬씨가 울면서 사과하듯이 이제 두 사람이 저승에서는 다시 다정한 4촌 형제로 지내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데

“그래. 버든에서 동네 산 판 돈으로 난리가 난 집이 너거 집 말고 또 하나 있다 아이가?”

“그래. 그 기 바로 구장또재형님네 아이가?”

“그래?”

“죽은 일재형님밑에 유락이라는 아들, 그러니까 장손이 있었다 아이가?”

“그래. 내 어데서 들은 것 같다. 이벤트사 한다꼬?”

“그래 글마가 어데 그런 재주가 있는지 무슨 축제나 행사가 벌어지면 무대도 만들고 게임이나 행사진행도 하고 뭐 이빨이 엄청 세다 아이가?”

“그래. 이벤트사가 다 그렇지.”

“그런데 그 장손 유락이가 몇 년 지나서 동네 산 판 돈을 삼촌 또재씨가 몽땅 챙긴 걸 알았다 아이가?”

“그래서?”

“당장 또재씨를 찾아가서 당연히 그 돈은 장손인 자신이 받아야 되고 굳이 법대로 한다면 일단 자신이 수령해서 아버지 대의 3형제가 똑 같이 나누어야한다고 이야기했다 아이가?”

“그래서?”

“홍제형님이 어데 쉽게 그 말을 들을 사람이가? 묵묵부답 말을 안 했지?”

“그래서?”

“유락이가 ‘잔 아부지요, 지도 인자 아아들이 둘이나 학교에 댕기고 이벤트행사가 나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차도 장비도 말캐 낡아빠져 쓸 수 없으니 3천만 원 넘게 나온 돈 중에 단도 천만 원만 주면 암말 않겠심더.’ 하고 통사정을 했지.”

“그래서?”

“아이구, 이 친구야, 니는 우째 ‘그래서?’ 밖에 말을 안 한단 말이가?”

“그래. 내가 뭐 아는 기 있어야지.”

“점점 묵고살기는 힘든데 방금 돈 몇 천만 원이 눈앞에 왔다갔다 하니 어데 유락이 가가 일이 손에 잡히겠나? 작은 아버지가 말을 안 들으니 숙모 부뜰이엄마에게 통사정을 했지만 그 양반이 어데 들은 척이나 할 사람이가? 이미 그 돈은 다 쓰서 똥이 된지가 오래 되었으니 니 맘대로 하다고 불난 데 기름을 부었다 아이가?”

“그래서?”

“그 날 저녁에 술을 만당꼬로 묵은 유락이가 도끼를 들고 작은 아부지를 찾아간 거 아이가?”

“그래서?”

“작은 아부지, 마지막으로 사정하는데 단돈 얼마라도 내 놓으소. 안 그라면 내 작은아부지고 작은엄마고 사촌이고 없다고 으름장을 탕탕 놓았다 아이가?”

“그래서?”

“그렇다고 눈이라도 한 분 꿈뻑할 사람이가?”

“그래서?”

“니 맘대로 하라고 문을 닫아걸자 인자 내한테는 작은 아부지도 숙모도 사촌도 없다면서 도끼로 기둥을 수십 번 내리찍으니 마루는 물론 방바닥까지 온 집안이 흔들리고 퉁탕거리고 난리가 났다 아이가?”

“그래서?”

“또재형님이랑 식구들이 쥐 죽은 척 아무 말을 안 했지. 한참 만에 아직도 분이 안 풀린 유락이가 ‘내 이노무 집구석에 다시 오면 사람이 아니다.’ 하고 도끼를 던지고 돌아갔다 아이가?”

“그래서?”

“그날 밤에 또재형님이 심장마빈가 혈압인가 아무튼 자다가 죽었다 아이가?”

“뭐라? 그래 뒤탈은 없고.”

“뭐. 자다죽은 건데 뭔 일이 있을 기 뭐 있노? 남새시럽다고 쉬쉬하고 그냥 초상을 쳤다 아니가?”

“그렇구나. 그런데 명절날 진장산소에서 보니 저거 사촌 간에 군사가 많던데, 아마 사촌끼리는 화해를 했나보지?”

“그래. 안 보면 우짤끼고 이미 다 끝난 일이 아이가?”

“그래, 그렇구나.”

비로소 한숨을 돌리며 열찬씨가 시계를 보자

“그래. 너무 늦었제? 일라서까?”

하던 영관씨가

“우리 버든에선 글을 좀 배우면 열찬이 자네처럼 객지에 나가야지. 동네구장이나 농지위원같은 거 하다가 모조리 동네살림 축내고 패가망신한다 아이가?”

종석씨의 이야기를 듣다 말꼬리 <아이가>가 전염된 것 같아 실소를 터뜨리며

“그 기 무슨 말이고?”

“옛날에 광호아부지 오구장이 동네여자들데리고 극장에 가고 읍내나 울산 술집에 댕긴다고 동네사람 도장으로 농협에 엄청난 빚을 내서 동산 팔아서 갚아준 일이 그렇고...”

“또 농지위원장 둔터어른이 경지정리할 때 택도 아인 사람들 농지위원 시켜서 지 맘대로 협잡하고 채비지 팔아서 언양이 좁아 울산까지 진출해서 술과 여자에 탕진을 하고 자살한 일에 다가...”

“또?”

“또제형님도 그렇고.”

“그라고 보니 친구자네는 참 착한 구장이네.”

“그런가? 그 양반들은 간짜바리가 크고 나는 간이 콩알만 하니까 그렇지.”

“그렇구나.”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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