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50)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7장 천하장사, 순찬씨가 무너지다(4)

이득수 승인 2024.05.23 07:12 의견 0

도연씨의 얼굴에 핏기가 돌아왔다. 마침 안방에 잠이 들었던 영서가 일어나자 너무 늦기 전에 돌아가자며 내외가 일어나자

“슬비야, 니 말은 반대만 하지 말고 한번 잘 생각해보란 말인데 내가 뭐 우째 알겠노? 도연이하고 둘이서 총각도 한번 만나보고 고향이나 집안사정이랑 뒷조사도 좀 해보고 나중에 또 이야기를 하자.”

그새 많이 풀린 모양이었다.

17. 천하장사, 순찬씨가 무너지다(4)

“이것 참 갈수록 태산이네. 그렇다고 당장 그만 두라면 남희가 죽을라 칼 기고...”

남희씨와 함께 총각을 만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도연씨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남희씨보다 두 살 아래 스물여덟 살, 전라남도 바닷가마을에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혈혈단신 부산으로 건너와 미용사로 잔뼈가 굵은 총각은 그 정도면 이미 자신의 미용실을 차리고 독립을 할 나이가 되었건만 도무지 형편도 안 될 뿐더러 그런 의지도 없어보였다. 딱 하나 총각이 내세우는 것은 한사람뿐인 외삼촌이 고향에서 신부로 재직한다는 것인데 그마저 홀어머니가 외삼촌의 밥이나 해주면서 성당에서 생활한다는 바람에 감점이 되고 말았다. 사는 곳을 알아보니 다행히 장전동에 작은 연립주택에 산다고 해서 주변 복덕방에 알아보니 시가가 5천만 원이 조금 넘는 낡은 연립에 은행융자가 3천만 원이나 걸려있다고 했다. 그 때 복덕방을 나서며

“이 정도면 거의 빈털터린데. 남희 니 생각은 어떻노?”

“...”

“단순히 돈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총각이 불성실하거나 낭비가 심하다는 말이지. 바람기가 있는 줄도 모르겠고.”

“...”

“결혼해서 계속 남의 집에 있을 것도 아니니 조그맣게 미용실도 오픈하고 연립주택을 팔아 보태 집장만도 해야 되고”

하는 도연씨를 제지하며 슬비씨가

“지금은 어떤 말을 해도 소용없어요. 아가씨, 그래도 결혼할 마음에는 변함이 없지요.”

“예.”

하는지라

“처음부터 다 갖추고 결혼하는 사람들이 어데 있노? 연립주택이라도 있으니 거기 도배해서 신혼집 차리고 아가씨가 여태까지 번 돈이 있을 테니 식도 올리고 작은 미용실도 얻고.”

하는 순간

“언니!”

남희씨가 손을 잡았고 그렇게 세 사람 간에는 이미 약조가 되었으니 이제 남은 일은 어머니 금자씨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더니 마침 금자씨가 백기를 들었다. 슬비씨와 도연씨가 노는 일요일 날 손서방이 될 미용사총각의 연립주택을 다시 도배하고 꾸미느라 적잖은 돈이 들었다. 금자씨는 그렇게 완강히 반대하던 것과 달리 순순히 그간에 꿍쳐두었던 줌치 돈을 풀었다. 그렇지만

“없다, 없다 해도 이렇게 알뜰히도 없는 사람은 처음 보네. 도대체 그 동안 밥은 어떻게 안 굶고 살았는지 모르겠네.”

하면서 가끔씩 손을 놓고 한숨을 푹푹 쉬는 걸 조심스레 슬비씨가 달래어야 했다.

마침내 장전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치르는 날 전라도의 신랑 측에서는 어머니와 외삼촌 단 두 사람의 혼주가 참석하고 신부댁도 그리 집안이 너르지 않아 가뜩이나 엄숙한 성당 안은 너무 조용하여 어쩐지 무거운 느낌마저 들었다. 장전동성당의 신부(神父)와 신랑의 외삼촌이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모양으로 식순에 따라 역할을 바꿔가며 예식은 엄숙하게 잘 진행되었고 신랑신부가 신혼여행 길에 오르자 양측을 통해 겨우 3,40명의 하객들이 미리 예약된 한정식 집에 들러 갈비탕으로 식사를 했다. 여느 피로연이면 의례히 떡과 과일이 오르고 경상도출신들은 상어고기내장이나 개복치를 눌린 두투나 돼지수육이나 편육, 서울이나 전라도출신들은 홍어회를 놓는 등 식당에서 내는 음식 외에도 상이 푸짐하기 마련인데 그날은 떡 한 접시와 밀감 몇 개가 추가로 상에 오를 뿐이었다. 술잔을 돌리면서

“허허, 그 참! 신부님이 두 분이라 은혜와 축복은 차고 넘치더니 잔칫상은 좀 거시기하네.”

하객이 부족하다고 애써 초청한 황서방, 김서방, 두 동서와 처제들과 상을 받은 열찬씨가 민망해서 말하자 영순씨가 금방 옆구리를 찌르며

“시끄럽소. 사돈 측 사람이 들으면 우짤라고 그라요?”

하더니 안사돈은 잔치자체에 신명이 안 나 아무것도 더 할 생각이 없는 걸 슬비씨가 강권하다 시피해서 그나마 떡과 밀감을 샀다고 귓속말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신혼살림은 두 사람이 각각 다른 직장에 다니는 데다 쉬는 날이 달라서 그런지 말수가 없어서 그런지 보통신혼처럼 깨가 쏟아지기는커녕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어 제대로 돌아가는지 아닌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거기다 가게를 핑계로 새신랑 손서방이 도무지 신평의 처가걸음을 않았고 명절 같은 때 피지 못 해 와서도 도무지 말이 없이 밥숟갈을 놓자말자 남희씨가 쓰던 3층 골방에서 잠을 청했다. 장모 금자씨 역시 결혼 전의 탐탁찮던 감정이 그대로 남았는지 그저 둘 다 소 닭 보듯이 하는 것이었다.

거기다 신부 남희씨 역시 어떤 말이나 감정내색도 없이 두 살적은 신랑이 있는 골방으로 자석에 끌리듯 들어가 버렸다. 그래도 1년이 지나자 떡두꺼비 같은 아이를 낳았고 친정에서 석 달을 조리하는 동안 아비되는 사람은 겨우 서너 번 오는 정도였다. 새로 차린 가게가 바빠서 그렇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았다. 남들 다 일하는 일요일에 쉬고 월요일엔 또 남들이 다 쉬니까 자신도 쉰다면서 주간 이틀을 쉬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쉬는 날 낚시를 간다거나 등산을 하는 취미활동마저 없어 도무지 무슨 낙으로 사는지 모르겠다고 도연씨가 혀를 끌끌 찼지만 그렇다고 뭐라고 할 일도 못 되었다. 그저 하루하루 일하는 것이 지치고 지겹고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조금씩 넋을 놓고 쉬는 것,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자리 펴고 자는 것이 취미인 것만 같았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출산 휴가를 마치고 복직한 남희씨가 도무지 적응을 못 하고 집에만 들어오면 파김치처럼 지쳐 쓰러지고 전처럼 책을 읽거나 무슨 말을 하는 법이 없이 그저 멍한 눈길로 한숨만 푹푹 쉬는 거였다. 심지어 자신이 낳은 아기가 울거나 칭얼거려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도로 어미인 자신이 금방 울음을 터뜨릴 표정이었다. 온 집안에 칙칙한 어둠과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어쩐지 손이 잘 안 가는 갓난아이에 실어증에 빠진 딸을 견디다 못한 금자씨가 며느리에게 울먹이며 전화를 했다.

단숨에 시가집에 달려간 슬비씨가 어디에서 출산우울증이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을 떠올렸다. 슬비씨의 권유로 휴직을 내니 남희씨의 얼굴이 좀 밝아지며 밥을 먹거나 이야기를 하며 아기를 들여다보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창 나이에 이렇게 펀펀 놀아서 언제 돈을 벌거냐며 금자씨의 볼이 메었다.

그 아이의 이름을 열찬씨에게 지어주라는 부탁이 있어 우현(宇顯)이라고 지어주었는데 부모 둘 다 세상사에 대한 관심이나 열정은 물론 말이 없는 편인데도 무럭무럭 잘도 자라 신학기가 오면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한두 번 더 복직을 시도해보았지만 매번 실패한 남희씨는 마침내 취업을 포기하고 집에서 쉬면서 독서삼매에 빠졌다.

우현이가 점점 자라 어린이집에 다니면서 신평의 외가에 올 일도 차츰 줄어들 즈음 오래 고생하던 도연씨의 부친이 돌아가시자 금자씨 혼자 텅빈 집에 남겨지게 되었다. 그러자 기다리기라도 한 듯 이웃에 사는 올케를 비롯한 신평시장에 터전을 두고 살아가다 나이가 들어 장사를 손 놓은 6,70대 여인들이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혼자 된 금자씨를 위로하러 찾아오고 시간이 좀 흐르자 안부가 궁금해서 찾아오더니 마침내 방석을 펴고 점 100 고스톱을 치기 시작하고 아무도 걸릴 것이 없는 분위기에 금방 노인들의 집결소로 변했다.

처음 라면을 끓여 소주를 한잔 하려 개평을 떼기 시작한 것이 횟수를 거듭함에 따라 액수가 커지니 라면이나 떡국 같은 간단한 식사에 소주 한 두병을 넣어주고도 집주인에겐 하루에 몇 만원씩의 푼돈이 떨어지더니 차츰 액수가 늘어나면서 금자씨의 눈빛에 아연 활기가 돌았다.

당시 부산바닥엔 나이가 들었거나 밑천이 짧아 거금이 들어가는 사행성 오락실에 갈 엄두를 못 내는 중늙은이들이 모이는 고스톱 방이라는 신종사업이 생겨날 때였다. 상대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손님들끼리 고스톱을 치고 광을 팔면서 어떤 형태로건 수입이 천원이 넘으면 1/10인 백 원씩을 떼는 식이었는데 너무나도 자연스레 형성된 고스톱방인 셈이었다. 조금씩 회원도 늘어나고 판도 커져 갈수록 수입이 늘어 하루 5,6만원이 넘는 날이 예사니 늙은이수입으로서는 더 할 나위가 없었다. 그사이 파출소에 신고가 들어가 몇 번이나 출동을 했지만 이웃 할머니들끼리 점 백을 쳐서 점심을 먹고 소주를 마시는 정도니 그냥 훈계만 하고 돌아갔다.

거기에 고스톱 방으로서야 한 단계 도약할 전기가 되었지만 세상이치로 따져 도무지 맞지 않는 엉뚱한 일이 일어났는데 일본에 살면서 거의 연락이 없던 금자씨 바로 손위언니가 70도 한참이나 넘은 나이에 귀국을 해 오빠와 여동생이 사는 신평시장에 셋방을 얻고 자리를 잡은 일이었다. 젊어서 일본에 들어가서 산다고 들었지만 한 번도 도연씨가 얼굴을 본적이 없는 이모의 실물을 보니 역시 금자씨와 닮아 역시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야무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무얼 하고 어떻게 살았으며 남편이나 가족이 있는지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언급이 없었다. 그러면 넉넉하게 노후를 보낼 재산을 들고 왔느냐고 물어도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었다.

집을 사지 않고 방을 얻는 것만 보아도 큰돈이 없는 것을 짐작을 했지만 며칠 뒤 동사무소에서 귀국신고를 하고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고 나자 지금은 한국이 세계적으로 가장 잘 먹고 잘 사는 나라, 심지어 먹고 살 여력도 없는 늙은이들에을 먹여 살리고 병을 치료해주는 복지정책이 선진국인 미국이나 일본보다 나아 재일교포들 중에 재력이 없는 사람들이 귀국하는 것이 유행이라는 것이었다.

젊어 한 평생 남의 나라에 가서 무얼 했는지는 몰라도 잘 먹고 잘 살던 호시절엔 나라에 세금 한 푼 내지 않던 사람들이 다 늙어서 입만 들고 돌아왔다며 몇 몇 노파들, 특히 그날 끗발이 안 나서 돈을 잃은 노파들이 수군댔지만 이모는 뜻밖에도 당당했다. 잘 사는 조국에 신세를 좀 지면 어떻단 말인가, 그러면 나는 조선사람이 아니고 대한민국국민이 아니냐는 말에 누구도 할 말이 없었다.

이모는 금방 고스톱방의 종업원이나 되는 것처럼 오전에 출근해 판이 끝나는 저녁에 돌아가면서 소소한 심부름을 하며 금자씨를 돕고 아직 손님이 둘 밖에 없어 멤버구성이 안 될 때 직접 선수로 뛰기로 하며 신평시장의 멤버로 어엿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참 니도 고생이 많다. 시아버지 돌아가시니 얼굴도 못 보던 시이모가 다 나타나고.”

영순씨가 혀를 끌끌 차는 이유는 가뜩이나 회사가 문을 닫느니, 마느니 하는 판에 부양대상자가 하나 더 는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간 명절만 되면 시어머니와 열찬씨 내외에다 구포의 외할머니와 신평의 홀로된 시외숙모까지 다섯 개의 용돈봉투를 준비했는데 이제 또 하나의 봉투가 늘어난 셈이었다.

“대신 우리 시가처럼 명절 쐬기 좋은 시집이 어디 있어. 그저 먹기지 뭐.”

하며 슬비씨가 웃었다. 명절이라 특별히 성대한 제사상을 차리는 것도 아니고 오래 잔뼈가 굵은 신평시장의 단골들에게 꼭 필요한 제수(祭需)만 사다 간단히 차리면 되니 미리 며느리를 불러 지지고 볶고 할 일도 없어 명절안날이 오히려 푸근하게 쉬는 날이라는 말이었다. 거기에다 시누남편인 손서방마저도 가게가 바쁘다며 명절에도 거의 처갓집에 오지 않거나 오더라도 달랑 밥 한 끼 먹고 돌아가기가 바쁘니 아예 시집살이가 없는 편이기도 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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