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68)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8장 만두가게 개업(8)

이득수 승인 2024.06.24 08:00 의견 0

“너거 작은아부지 식사하게 떡국이라도 어셔 가주 오너라.”

상찬씨가 챙겼지만 덩치도 크고 손도 큰 형수, 시동생인 자신은 물론 공부 잘 하는 조카라고 온 동네에 자랑하고 다니는 정석이에게 끔찍이 뭔가 챙겨 먹이려던 형수가 없으니 영 분위기가 살지 않았다. 홍근이에게 병원호수를 물어 휴대폰에 입력하고 일찍 일어나서

“아버지, 명촌으로 갈까요?”

“아이다. 바로 부산으로 가자. 요번 추석은 영 기분이 안 난다. 집집이 사람들만 쓰러지고.”

곧바로 부산으로 차를 몰게 했다.

18. 만두가게 개업(8)

“내 팔월이나 설을 거꾸로 쉰다는 소리를 들어도 우리가 그럴 줄은 몰랐네. 팔월 쉬자 말자 병문안이 다 뭐고? 그것도 두 건이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명촌의 금찬씨가 잔뜩 신이 났다. 평소에 차를 타고 훨훨 어디론가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데다 열찬씨네와 동행하는 일이면 따로 교통비가 들어가지도 않고 끼니때마다 외식을 하는 데다 자기가 클 때나 시집가서 고생한 이야기를 하면서 제 감정에 복받쳐 눈물까지 흘리며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었다.

“고 서방이 몸이 아파 운전을 못 하면 자기 옆에 끼고 사는 아들 셋이나 다 자가용이 있는데 굳이 부산 사는 동생의 댁을 보고 차를 가지고 오라는 사람이 어디 있노? 동생 돈은 돈 아이가?”

장촌의 덕찬씨가 심기가 좋지 않았다. 어릴 때 고생을 하고 남편이 일찍 죽어 고생을 했다는 것을 내세워 친정집 행사에 형제 간이 만나면 절대로 돈 한 푼 쓰는 일 없이 자기 스트레스를 푼다고 하는 말이 남의 염장을 지르는 줄도 모르고 마냥 신이 나는 것이 싫은 것이었다. 거기다 덕찬씨가 가장 불만인 것은 끼니때만 되면

“저게 황쏘가리회는 얼매나 맛이 좋으면 저래 금이 비싸노?”

하고 늘 식당에서 제일 비싼 메뉴를 가리키며

“아따, 묵고 죽은 구신은 얼굴도 좋다는데 한번 묵어나 보자!”

하면

“와? 언니 니가 돈 낼 끼가?”

“돈? 혼자 사는 내가 돈이 어디 있노? 출세한 내 동생도 있고 또 장촌부자 니도 있는데.”

하고 당연히 덕찬씨나 열찬씨가 사야 될 것으로 치부했고 기가 막힌 열찬씨가

“묵고 죽은 구신이 화색이 좋다 해도 만날 때마다 그 말 하고 묵기만 하고 죽지는 않은 우리 누님을 위해서 일단은 묵고 봅시다. 아버지 제삿날 동생들 만나서 맛난 거 먹으려고 일 년 내내 기다리던 우리 누님 원이나 없게.”

하고 십만 원이 넘는 메뉴를 시키면

“사람이 아무거나 묵고 배부르면 되지 우리가 뭐 재벌에 자식들도 아이고 꼭 이래 젤 비싼 거로 묵어야 되나?”

막내 백찬씨도 볼멘소리를 내었다. 언양에서 누님 둘을 태우고 부산서 올라온 열찬씨 내외까지 태우고 수원을 갔다 서해안을 한 바퀴 비잉 둘러오는 코스가 여간 먼 것이 아니지만

“아나. 이 거 도로비나 보태라.”

고속도로에 올리면 5만 원짜리 하나를 던져주는 열찬씨 외에는 기름 값이 얼마나 들든 도로비가 얼마나 나오든 누구하나 신경 쓰지 않는 것이었다. 대신 열찬씨는 돌아오는 길에 부둣가에 쉬면 회나 해산물로 점심을, 그도 아니면 언양이나 경주까지 내려와 소고기를 좀 굽거나 그럴 듯한 저녁을 한 끼 사는 것이 보통이었다. 학수고대하던 제사여행인 만큼 첫 끼니에 기대가 가득한 금찬씨의 점심은 주로 부자소리를 듣는 장촌의 고차대씨가 사는 것이 보통인데 그렇게 비싼 황쏘가리 회를 시켜 매운탕까지 포식하고 나오면서

“그 놈의 황쏘가린가 뭔가 돈 요량하고 별맛이 없네.”

가뜩이나 15만 원이 넘는 거금을 쓰서 기분이 언짢은 제부의 부아를 돋우는 거였다.

“형님, 맛있어서 고맙다고 인사는 못 할망정 돈 쓴 사람 생각해서 맛이 있고 없고 소리는 안 해야지요.”

“내사마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거짓말은 못 한다.”

해서 단단히 화가 난 덕찬씨가 자신을 노려보는 것도 모르고

“도리뱅뱅이탕인가 뭔가 그 놈의 서비스 나오는 것도 맵기만 하고 개 코도 맛이 없더라.”

기어코 결정타를 날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두 번 당하고 난 장촌의 고 서방은 나이 70이 넘은 사람이 장인제사를 모시러 그 먼 곳까지 가기에는 몸이 너무 피로하다고 걸음을 끊으니

“어이, 장촌에 고부자, 고 서방이 안 와도 점심은 니가 사제?”

차가 추풍령을 넘어 남강휴게소가 다가오면 몇 번이나 덕찬씨를 보며 확인을 하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금강휴게소에서 차를 돌려 매운탕단지가 있는 산골짜기에 들어서 단골 부산식당에 앉으면

“너거 자영한테 돈 얻은 기 얼마 안 돼서...”

덕찬씨가 민망한 표정으로 5만 원짜리 두 장을 열찬씨에게 건네는 것, 그러니까 보태서 내라는 것이었다.

“그래요. 오늘은 마 메기랑 빠가사리 매운탕을 먹지. 쏘가리나 황쏘가리가 귀해서 비싸지 맛이 좋아 비싼 것도 아이고.”

열찬씨가 금찬씨의 눈을 똑 바로 쳐다보고 말하면

“젠장 생일날 잘 먹을라카다가 굶어죽었다더니 아버지제삿날 잘 묵을라카다가 그만 헛방이네.”

툴툴거리는 금찬씨에게

“누님도 생각을 해보소. 암만 부자라 캐도 우리 자영이 장인제사에 가는 누님에게 십만 원씩 준 거도 작년부터고 그전에는 5만원씩 줬는데 장촌누부가 무슨 돈으로 한 접시 10만원짜리 쏘가리를 사겠능교? 5만원은 제사비 주고 5만원 내놓으면 호주머니에 단돈 2,3만원도 없을 사람을.”

하면

“와 누가 작기 가오라캤나? 은행에 쳐동개논 돈이 하도 안 쓰서 곰배기가 필 형편일 밑에 돈이 우에 돈 보고 아파 죽는다고 난린데 그 까짓 것 한 돈 백만 원 가주오면 되지?”

“그 기 또 무슨 소리요? 장촌에서는 어데 땅 파서 번 돈이요? 태화강 물을 퍼서 번 돈이요? 안 묵고 안 쓰고 교통순경한테 걸려도 천 원짜리 하나가 아까워서 줄똥말똥 하는 바람에 순사가 내 참 더러버서 당신 돈은 안 받는다고 할 정도로 애껴서 번 돈이지?”

“그렇게 개처럼 힘들데 벌었으면 정승같이 쓰란 말 아이가? 형제들간에.”

“아이구, 우리 돈 벌 때 꼭 지가 보태준 사람들처럼 말하네.”

혀를 끌끌 차던 덕찬씨는 파젯날 전국일주를 하다시피 하고 언양에서 저녁을 먹고 상북 가는 버스에 금찬씨를 태워주고는

“형제간이 뭐 자기한테 빚진 사람들이가? 평생 제사비 한 푼 안 내고 제사음식을 잘 했니 못 했니 타박이나 하고 평생 밥 한 번 안 사고 음식 맛이 있니 없니 하다가 두 손 탈탈 털고 집에 가는 인간이. 하다 못 해 휴게소에서 씹은 커피라도 한 잔 안 사고.”

하며 영순씨를 바라보면 영순씨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 울산에 백찬이는 바빠서 못 온다 카제?”

“주말에나 틈 봐서 혼자 한 바퀴 돈다 카데요.”

금찬씨 물음에 영순씨가 대답을 하자

“그래도 안 보이 섭섭하네. 팔월에도 안 오고.”

추석날 진장에서 만나 같이 산소를 한 바퀴 돌고

“나는 명촌에 한 번 가볼 건데 니는 안 갈래?”

열찬씨가 물으면

“민우가 친구하고 약속이 있어서요.”

하고 그냥가기가 일쑤였다. 그게 꼭 민우가 약속이 있어서가 아니라 누님집이라고 가 봐도 자기 집은 예수를 믿어 제사를 안 지낸다며 썰렁한 집에 혼자 앉아 있어

“아아들은 다 어데 가고?”

“큰 아는 전라도 처갓집에 길이 멀어 추석예배 보자말자 떠났고 작은 아아들도 다 저거 처갓집에 간다고 방금 떠났지.”

하며 사과와 단감 몇 개를 내어놓고는 점심 차릴 염도 않는 것이었다.

“그래 점심은 먹고 혼자 앉았나?”

“추석예배 보고 아침을 늦까 먹어서.”

“현주는 언제 온다 카더노?”

“있다가 지녁에 안 오겠나?”

“그래 처갓집에 오면 씨암탉 잡아준다는데 사위 줄 음식은 좀 해 놨어요?”

“며느리한테 살림 능가준지가 언젠데 내가 뭐를 아노? 현주 지가 찾아 묵겠지. 할렐루야!”

천하태평에 자기 배가 안 고프니 손님점심 챙길 생각도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형님, 사위는 형님이 챙기야지. 일식이각시가 무슨 책임이 있다고요?”

장가들고 처갓집에 첫 행차를 한 사위 위 서방이 장모가 해주는 따뜻한 밥 한 끼도 못 얻어먹고 언양에서 사먹고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펑펑 울던 현주가 생각난 영순씨가 말해도

“물 거 없으면 사 묵으면 되고. 지난번에는 내까지 가천린포그에서 소고기만 잘 묵었다.”

사위접대는커녕 사위 덕에 고기를 잘 먹었다는 투였다.

“...”

더는 할 말도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며 열찬씨가 봉투하나를 꺼내 주면

“동생 니는 김해 새이 살았을 때까지는 내 한테 봉투 안 준다 캤다 아이가?”

하면서 덥석 받으면

“그래도 명절인데.”

하는 두 사람을 백찬씨는 애써 외면했다. 결코 인색하거나 제 할 일을 안 하는 사람이 아닌데 누님이 하는 모습이 결코 정상이 아니고 경우가 아닌 담에야 자신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투였다.

동생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금찬씨로서는 그저 한 자리에 모이는 것만도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우리 백찬이를 첨 낳을 때 얼굴이 허연 기 눈도 크고 코도 커서 인물이 얼마나 좋은지 일주일 후에 놓은 자기 아들 상철이를 보고 형부가 장모는 장군을 낳았다고 안 했나? 진차이 낳았다고 진찬이라 부르기도 했던 그 망내이가 인자 우리하고 같이 늙어가니 말이다.”

“오늘은 와 또 그 이야기 안 나오노 했다. 와 아편쟁이 의사 김종률이 이야기는 안 하노?”

덕찬씨는 벌써 부아를 먹은 모양이었다.

“이노무 가시나가 뭐 못 묵을 거를 묵었나? 아침부터 되게 툴툴거리네.”

“내가 툴툴거리는 기 아이라 세이 니는 아들 서이나 차 있는데 굳이 부산에서 여까지 올캐 차 오라칼 이유가 뭐 있노 말이다.”

“와? 내가 동생이 없는 것도 아니고 동생집에 차가 없는 것도 아이고 형제간에 같이 댕기면 안 되나?”

“그래, 말 잘했다. 언니 니는 와 형제간의 일에 아들 서이 차 다 놔두고 한 번도 안 쓰는데?”

“우리 아아들은 다 바뿌다 아이가? 없는 부모 밑에 태어나 묵고살기가 바빠서.”

“누는 없는 부모 밑에서 안 태어났나? 고생하기로야 부산 동생만큼 고생한 사람이 어딨다고?”

“지는 그래도 머리도 좋고 많이 배우고 출세도 하고. 내 동생 고생한 바람에 올케가 팔자가 폈으니 차 가지고 올만도 하지. 내가 그런 집 며느리라면 올케들을 말케 업어주겠다.”

“이이고 키는 난장이 똥자루만 해도 쇠몽디는 서 발이나 되는가 베. 말 하나는 청산유수네.”

하는 사이에 차가 양산신도시의 부산대학교 양산병원에 닿았다. 막상 병원에 들어서자

“참, 형수 이름이 뭐더라?”

열찬씨가 골똘히 생각을 하는데

“우리가 말캐 덩덕군이다. 문병 온다면서 이름 석 자도 모르고 호실도 안 물어보고.”

금찬씨가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생긴 듯 웃는데

“올캐야, 여게 매점이 어데고? 쥬스나 박카스라도 한 박스 사야지.”

“그거 사가도 다 짐만 됨더. 그만 봉투로 하이소.”

“너거 시숙이 문병 두 군데 가는데 10만원밖에 안 조서 말이다.”

“그냥 두 군데 5만원씩 하이소.”

“그라면 밥은 뭐로 묵고?”

“슬비아빠가 살 깁니더. 화명동에 참게매운탕 잘 하는 집 있다고 자기가 살라캅디다.”

“그런가?‘

하면서 안내하는 사람에게 봉투하나를 얻어 돈을 넣는데

“아, 생각났다. 유길자씨가 몇 혼지 알아봐 주소.”

열찬씨가 마침내 족보작업을 할 때 본 이름을 기억해내는데

“안 나옵니다. 퇴원을 하셨는지.”

“아일 낀데. 옳지. 그럼 류길자로 찾아보이소.”

“예. 나옵니다. 917호.”

“감사합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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