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66)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8장 만두가게 개업(6)

이득수 승인 2024.06.20 08:00 의견 0

“그렇구나. 아무튼 미안하고 죄송해요. 나는 편하게 잘 지내는데 당신은 하루하루를 괴롭게 지내서.”

“우짜겠능교? 팔자인데.”

“그래요. 우짜든동 마음잡고 잘 주무세요.”

“예. 열찬씨도 잘 주무세요. 참 그런데...”

하는 순간이었다.

18. 만두가게 개업(6)

“보소!”

등 뒤에 영순씨가 서 있었다. 휴대폰도 동시에 방바닥에 구르고

“이기 무슨 꼴이요? 진주여자 띤 지가 얼마나 됐다고 또 이 짓이요? 이번엔 누구요?”

“...”

“참 환갑진갑 다 지난 사람이 해도 참 너무 하요? 나는 뭐 사람도 아니고 성질도 없는 줄 아능교?”

“그, 거기 아이고 순영씨 아이가?”

“아니, 그 여자가 와요? 부잣집 마나님으로 잘 산다면서요?”

“영감하고 사이가 좋지 않아 늘 삐걱거리는 가 봐.”

“와? 그라면 자기도 이혼하고 당신도 이혼하고 둘이 합치기라도 하잡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데?”

“자식들을 봐서라도 자제를 해야지. 더구나 이 깊은 밤에.”

“그래. 미안해.”

“언제든지 그 여자한테 갈라카면 말만 하이소.”

“...”

“내가 이기 무슨 꼴인지 모르겠네. 남들한테 사모님소리 들으면 뭐 하노? 영감탱이 영혼은 첫사랑한테 가고 첫정은 진주여자한테 가고 나는 뭐 꿩 대신 닭인가?”

“...”

하고 문을 쾅 닫고 안방으로 건너갔다. 휴대폰을 집어 드니 또 전원이 켜지지 않았다. 냉장고를 뒤져 먹던 소주병을 꺼내 마시며 김치를 우적우적 씹다 스르르 거실바닥에 무너져 잠이 들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이러고도 내가 마누라라고 영감 아침밥을 챙기네.”

영순씨가 혀를 끌끌 차더니 숟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세수나 하고 옷 갈아입고 나오소.”

“와?”

“휴대폰 고장 났다면서요? 서비스센터 가야지 우짤 기요? 좌우간 휴대폰 세 번째 날아가면 내가 당신하고 안 살 거요. 마 있을 때 잘 하소.”

“미, 미안해.”

이러고서 명륜동의 서비스센터에서 휴대폰을 고치고 나오다가 마침 길 건너가 온천천이라

“내 한 시간쯤 걸을 게. 당신은 미혜처형이랑 있다가 나중에 같이 점심이나 먹지.”

하고 헤어져 길을 건너 온천천을 한참이나 걷는데 따르릉 벨이 울려

“여보세요?”

하는 순간 또 가슴이 철렁했다. 순영씨였다.

“우째? 별일은 없고?”

열찬씨가 더듬거리는데

“열찬씨 놀랐지요?”

“뭐, 내사 뭐...”

“그 기 아니라 한창 통화중인데 거실에 발자국소리가 나서 말입니다. 아마 영감님이 화장실에 간다고 나왔겠지만 어쩌면 우리가 통화하는 걸 다 듣고 있었는지도 몰라서 내가 황급히 전화를 껐지요.”

“...?”

그렇다면 영순씨가 수화기를 뺏기 전에 순영씨가 먼저 전화를 끈 셈이었다.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래 지금은 화해했능교?”

“아니요. 생각보다 길어질 것 같아요. 오후에 동래시장에 가서 돼지고기 사다 수육도 좀 삶고 막걸리랑 걸게 한 상 차려드려야겠어요. 둘이 싸워도 먹고 힘을 내어 싸우도록...”

“그래요. 우짜든동 마음을 달래면서 살아야지요.”

영순씨의 사정을 모른다는 점에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참, 내 정신 봐라. 또 잊을 번했네. <영남알프스 오딧세이>라는 책 보냅니다. 작품 쓸 때 많이 참고가 될 겁니다.”

“예. 고마워요.”

“건강 조심하시고.”

“당신도.”

“예에.”

전화를 끊고 혼자 걸으며

(거 참 인연도 묘한 인연이다. 아내 영순씨가 전화기를 두 번 던져 두 번 서비스를 받았는데 그 첫 통화가 귀신처럼 순영씨라니...)

고래심줄처럼 질긴 인연, 그러면서도 코스모스처럼 애잔한 인연을 생각하다 어느 새 수영강이라 한 참이나 수면에 뛰어오르는 숭어떼를 바라보는데

“아이구, 우리 잘난 제부 지금 어뎅교?”

사촌처형 미혜씨였다.

“아, 수영강이라고? 영순이가 원동교로 오라카네요. 해운대쪽에서 밥 먹자고.”

남의 말은 듣는지 마는지 일방적으로 소리치다

“우리 동갑제부 첫사랑이 대단한 미인에 부자라면서? 그래도 부산천지에 영순이 만한 여자는 없소. 정신 바짝 차리소.”
“....”

추석 전날이었다. 서울의 정석이네 식구가 도착하자말자 새로 태어난 사촌동생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한 영서의 성화로 슬비네도 금방 들이닥쳐 생후 8개월의 가화와 6개월의 현서 동갑나기 두 아이의 칭얼거리는 소리, 억지로 웃겨 방실거리는 모습으로 좁은 아파트에 사람 사는 훈기가 가득했다. 가화는 아직 이목구비가 두루뭉술한 얼굴로 열찬씨 내지 정석이를 빼닮은 작은 눈과 납작한 코가 영락없는 가가네 자손이었지만 현서는 일단 눈이 크고 얼굴윤곽이 동그랗고 맵시가 있었다.

“이크, 아무래도 미모로선 우리 가화가 안 되겠군. 그래도 일단 키는 월등히 크니 다행이고. 또 모르지. 앞으로 공부는 나을지 모르지만 둘 다 제 할아버지 닮았으면 그것도 백중세겠지.”

하는 사이 영순씨가 주문한 생선회가 도착해 식탁에 점심을 차리자 아이를 보는 어미들은 나중에 먹고 사위와 아들을 거느린 열찬씨 3부자가 먼저 먹기로 하고 건배를 하는데 열찬씨의 휴대폰이 울려

“여보세요?”

전화를 받는 순간 화면에 김해 순찬씨의 큰 딸 미숙씨가 떴다.

“외삼촌!”

“그래 미숙아, 니가 우짠 일고?”

하는 순간 뭔가 불길한 예감이 스쳐

“그래 엄마는 잘 있고?”

하자 기다리기다도 한 듯

“사실은 엄마가...”

“그래 누님이 어쨌단 말이고?”

“사실 요양병원에 입원을 했는데요.”

“입원을? 와 증세가 더 심해졌나?”

“예, 구정에 외삼촌 다녀갔을 때만 해도 말수가 좀 적어 그렇지 말귀도 잘 알아듣고 혼자 화장실도 잘 다니고 했는데 그 후로 자주 넘어지고 화장실 쓰는 것도 엉망이 되고 어버이날에 5남매가 만났을 때 요양병원으로 모시느냐 아니냐를 의논하다 조금만 더 두고 보며 그 사이 마땅한 요양병원이나 알아보자며 용철이오빠가 몇 곳을 알아보는 사이에 그만 일이 터졌지요.”

“일? 무슨 일?”

“엄마가 불을 냈다 아입니껴? 냄비에 물을 올리고는 가마득히 잊어버리고 꾸뻑꾸벅 조는 사이 물이 다 졸고 냄비가 다 타고 집안에 연기가 오소리 잡듯이 가득차서 집밖으로 새어나가 노인정의 할머니들이 와서 가스를 끄고 창문을 열고 해도 눈만 멀뚱멀뚱하더랍니다.”

“그래 큰일 날 뻔 했구나.”

“예. 이내 진영소방서에서 소방차가 들이닥치고 화재원인을 조사하던 소방관이 벌써 두 번째 사고라고, 할머니를 아무래도 요양병원에 보내는 것이 좋다고 해서.”

“그래. 그럼 지금 요양병원에 있단 말이지?”

“예. 그래도 추석은 집에서 쇠게 할라꼬 용철이오빠하고 내 하고 모시러왔다 아잉교.”

“그래. 누님 얼굴 좀 보자.”

하는 순간 회색의 환자복을 입은 순찬씨가 화면에 뜨는데 머리가 완전 백발이 되고 살이 빠져 두 볼이 합죽하고 짧게 깎은 머리가 한 곳으로 뭉쳐 누가 봐도 정신이 좀 온전 찮은 모양새였다.

“누님!”

“...”

“누님, 내요. 누님동생 열찬이!”

불러도 눈만 멀뚱멀뚱 대답이 없다가

“엄마, 열찬이 외삼촌 나왔네. 뭐라고 말 좀 해 보소,”

하는 순간

“보자. 니가 내 동생 열찬이가?”

“예. 누님!”

“나는 인자 정신이 없어 내 동생 열찬인지 눈지 생각이 잘 안 나서 잘 모리겠심더.”

하고는 완강하게 입을 다물어버렸다.

“외삼촌, 접니더. 용철이.”

이번에는 둘째 생질이 화면에 나타나

“그래, 니가 고생많제?”

“아, 아입니더. 엄마가 정신은 좀 없어도 하도 곱게 아파서 큰 고생은 안 합니더.”

“그래. 늙어도 곱게 늙어라 카디마는 우리 누님이 그래 곱게 병치레를 한다는 말이지.”

“예. 병원사람들도 치매를 앓으면서 이렇게 조용히 눈만 끔뻑끔뻑하고 아무 저지레도 안 하는 사람은 처음이라 하지만 교회에서 오는 사람들은 더 놀래지요. 천하의 이순찬권사가 이렇게 조용하게 말 한마디 없이 곱게 지내는 것이 정말 하느님의 은혜라고 말입니다.”

“그래. 그건 참 다행이구나. 만약에 너거 엄마 성할 때부터 하루 종일 전도를 한다고 돌아 댕기며 이사람 저 사람을 잡고 할렐루야에 주여, 를 외치고 찬송가를 불러 제끼면 누가 다 감당을 하겠노?”

“예. 맞습니다. 아주 드문 경우로 말을 잘 안하는 치매가 왔답니더.”

“그래. 불행 중 다행이다. 그런데 사람은 알아보나?”

“예. 처음 만나면 한참 들여다보다가 간혹 니가 상철이제, 또 용철이제, 미숙이제? 하면서 간혹 알아보기도 하지만 눈이 잘 안 보이는지 그냥 멀뚱히 쳐다만 보다가 엄마 내가 누고? 하고 물으면 그 제서야 니 상철이제? 내 아들 상철이 하고 알아 볼 때도 있고 보통은 니 열찬이제 부산 사는 내 동생 열찬이! 하고 저냐 형님이나 사위들이나 어떤 때는 며느리나 딸들까지 그냥 부산 사는 내 동생 열찬이제, 를 반복한답니다.”

“그래? 누님이 평소에 내를 많이 챙겼지.”

하는 순간 그만 눈앞이 흐려지며 울컥 가슴에 싸한 강물이 흘러갔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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