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78)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9장 물만골의 으뜸 농부(5)

이득수 승인 2024.08.10 09:00 의견 0

19. 물만골의 으뜸 농부(5)

만두가게의 호황과 더불어 또 하나의 봄소식은 어린 현서가 무럭무럭 잘 자라는 것이었다. 어린아이치고 귀엽지 않은 아이가 어디 있으며 하물며 핏줄임에야. 그러나 열찬씨에게 현서는 그런 보통의 손자하고 다른 것이 지금껏 자신의 핏줄로 태어난 아들과 딸과 영서, 가화 두 손녀가 마치 빵틀에서 붕어빵을 찍어내듯 눈도 작고 코도 낮고 이마도 좁아 무엇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자신의 판박이라 잘 생기지 못한 콤플렉스가 자기 당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외모지상주의로 흘러가는 세상에서 참으로 말 못할 상처였는데 희한하게도 이번에 얼굴도 둥글고 희며 이목구비가 다 또록또록한 아이가 태어나니 이게 무슨 조화인지 내게 이런 행복이 어떻게 온 건지 모두 신기하기만 한 것이었다.

가뜩이나 발육이 느리고 말수가 적으면서도 조금만 배가 고프거나 귀저기가 젖으면 금방 표정이 굳어지는 저 어린 아이의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는 그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엄마!” 다음에 뜻밖에도 열찬씨를 보고 방글거리며 “할비!”하는 소리에 그만 온몸이 노골노골할 정도로 행복한 것이었다. 그게 아마도 매일 유모차를 끌어주며 자주 눈을 맞춘 때문일 거라 생각하면서 제 언니 영서역시 고만할 때 안아주면 “하아부지!”하고 부르던 것과 억양이나 표정이 어딘가 다르고 작은 놈이라 그런지 현서가 부르는 “할비!”소리가 훨씬 더 다정한 것 같았다.

그런데 아이가 조금씩 자라는 것이 나름대로 다 단계가 있는 것인지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서 서랍이나 문갑을 뒤져 온갖 잡동사니를 꺼내기를 좋아하거나 보행기를 타고 달리기에 신명을 내다 벽을 잡고 서면서는 어느 새 바깥세상이라는 걸 인식했는지 시도 때도 없이 나가자고 하는데 그 바깥세상의 안내자이니 아기로 봐서도 친밀하고 살가울 수밖에 없을 터였다. 겨우 서는 놈을 망미고가도로 밑 운동기구 앞에 내려놓으면 예전 제 언니가 그러듯 이제 어딘가 매달리고 오르는 데 필이 꽂혔는지 여러 가지 놀이기구에 기어오르고 매달리다 기구가 움직이기라도 하면 깜짝 놀라면서도 그 진동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렇게 주로 바닥을 기거나 엎드려 지내는 것도 한 동안일 뿐 마침내 걸음마를 시작하자

“옳지, 현서야 이리와, 옳지, 내 새끼!”

두어 발 앞에서 팔을 벌리며 비틀비틀 서너 걸음을 떼다 열찬씨의 품에 쓰러지는 그 발갛게 상기된 얼굴과 혼곤한 젖 냄새가 너무나 좋았다. 마침내 열찬씨의 손에 매달려 나란히 걷기 시작하면서 교각아래 설치한 분수대를 가동하기 시작하자 아이는 그게 신기한지 한참이나 바라보다 슬금슬금 물기둥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해 말리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날씨가 따뜻해지자 수건과 속옷을 챙겨가서 풀어놓으니 유치원생, 초등학생 틈을 누비며 잘도 놀았다. 그렇게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또 하나 순풍에 돛을 단 일이 있었는데 구서동 물망골의 채소농사였다. 교장선생과 같은 밭뙈기의 구석 쪽 40평에는 열무, 오이, 토마토, 가지, 감자 등 평소에 심던 채소 외에 양파를 심고 위쪽에 김성철씨가 나간 밭에는 실험사마 마늘을 심었는데 모든 작물이 다 순조로운 것 같았다. 한 가지 불편한 것은 현서를 돌보는 영순씨가 밭에 갈 수가 없어 열찬씨 혼자 배낭에 간식과 막걸리를 넣어 짊어지고 버스를 타고 가는 일이었는데 늘 승용차로 도시고속도로로 단숨에 휘익 달려가다 아파트 앞에서 15분 간격으로 49번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넘게 걸리는 동안 장전동 부산대학교학생들의 등교시간과 중복되면 그 긴 시간을 서서 흔들리며 버티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학생들은 머리가 허연 열찬씨와 눈이 마주치면 대부분 황급히 눈길을 돌리며 자는 척하고 행여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이 잘 없었다. 저들도 매일 취업난의 압박 속에서 힘들게 공부해 많이 피로할 것이라고 이해하려 하지만 세상이 참 야박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안락로터리에서 수안4거리까지 충렬로가 매일 정체되는 데다 동래에서 부곡시장까지도 막히기가 일쑤라 어떤 때는 무려 한 시간 반이 걸리는 수도 있어 종점인 롯데캐슬아파트 앞에서 내려 경사진 아파트경내를 가로질러 산복도로를 건너고 다시 숲길을 걸어 올라가는 15분에 집에서 정류소로 나와 49번을 기다리는 2,30분을 포함해 보통 한 시간 반, 막히면 두 시간이 걸리는 밭에 가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만약 등교시간 같이 정해진 시간을 맞추어야 한다면 새벽밥을 먹고 나가야할 일인데 소일사마 즐기는 주말농장이 도로 스트레스를 주는 것 같은 날도 있었다.

그렇게 오래 시내버스를 타는 동안 나름대로 출발점 토곡에서 도착지까지 마음속으로 3개의 구간을 정하고 각 구간이 20분을 넘지 않기를 기대하고 시간을 재지만 첫 구간 동래 시장까지도 정체되기가 일쑤고 거기서 부곡시장까지의 구간도 너무 건널목이 많은데다 한번에 2,3분씩 신호대기를 하는 경우가 빈발해 계속지연이 되었다. 그래서 다음 단계는 그 세 개의 구간 안의 각 정류소간의 시간소요를 또 가늠하다 마침내 수십 개나 되는 버스정류소의 이름을 달달 외울 정도가 되자

토곡, 연제예식장, 태광아파트, 한양아파트, 연산8동파출소파출소, 연천시장, 경상대후문, 연동시장, 경동아파트, 연안교, 우성아파트, 봉생병원, 한양아파트, 동래고등학교, 동래시장까지의 1구간 15개 정류소구간은 토곡사거리와 대한색소사거리, 안락로타리의 신호를 짧게 받느냐 길게 받느냐에 따라서 20분 이내에도 도착하지만 3,40분이 걸릴 때도 있고

다음구간 동래전화국, 동래우체국, 명륜초등학교 한국소방안전본부, 온천입구, 온천장지하철역, 부산정보관광학교, 부곡시장의 구간은 수안로터리와 명륜동4거리 온천입구 4거리가 매일 막혀서 불과 8개구간에 늘 2,30분이 걸리며

마지막 금정세무서, 대우아파트, 부산대지하철역, 부산은행, 부산대후문, 부산대정문, 현대아파트, 장전1치안센터, 장전동 중앙교회, 장전동 어린이 놀이터, 장전동지하철역, 장전초등학교, 예그린 아파트, 국민은행구서동지점, 구서시장, 롯데캐슬입구까지 16개 구간은 부산대학교 일대만 잘 통과하면 일사천리로 15분내지 20분 안에 통과한다는 걸 알게 되자 다음단계로 어느 로터리, 어느 교차로나 4거리를 오늘은 별 정체 없이 통과하느냐, 더럽게도 오래 정체되느냐로 고민을 하고 시간을 재다 어느새

토곡, 연제예식장, 태광아파트, 한양아파트, 연산8동파출소파출소, 연천시장, 경상대후문, 연동시장, 경동아파트, 연안교, 우성아파트, 봉생병원, 한양아파트, 동래고등학교, 동래시장...

마음속으로 구간별 정류소를 외우다 자기가 평소 알고 있는 토곡은 실제로 망미주공아파트로, 연제예식장은 부산소방본부로, 연산8동파출소는 연산8치안센터로 안내방송이 나오는 공식정류소명임을 알게 되었고 한양아파트도 토곡한양아파트와 동래한양아파트로 따로 지명이 붙고 경상대입구는, 부산경상대 입구, 봉생병원은 동래봉생병원이라고 또 다시 지역을 나타내는 것까지 줄줄 외게 되자

(이게 무슨 짓인가? 내가 시청대중교통과 버스담당직원도 아니고...)

하면서 여전히 공무원티를 못 벗어나는 자신이 스스로 멋쩍어서 웃곤 했다.

그 동안 또 한 가지의 발전이 있었는데 이제 같은 교장선생 땅의 경작자이면서 늘 술이 취해 벌건 얼굴에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간섭하기를 좋아하는 예비군 중위 출신의 이호열씨(평생 소원이던 대위진급에 연연해 남들이 이대위로 불러주기를 원해 가끔 이대위로 불리는)와 몸도 약하고 목소리도 약한데다 도무지 말도 없고 농사도 짓는 둥 마는 둥 하는 윤씨, 또 젊어 동래시장골목에서 양화점을 하며 통장 일을 본 일이 있어 통장님으로 불리는 김씨와도 친해져 이제 가끔 통장님의 원두막에 초청을 받아 미나리지짐에 막걸리를 먹거나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는 회식에 끼게 되자 소식을 들은 영순씨가 토종닭 큰 놈 두 마리와 마늘과 대추에 닭죽이 될 찹쌀과 녹두까지 챙겨 보내자 통장부인이 참 야무지게도 잘 챙겼다고 칭찬을 하면서 살갑게 대하기 시작하여 가끔 국수를 삶아먹을 때도 빼지 않고 불러주었다.

그래서 조금씩 가까워지자 비로소 속내를 드러내었는데 처음 물망골에 나타난 열찬씨를 보고 공무원출신이 퇴직한 기분으로 시작은 하지만 금방 지쳐 그만 둘 것으로 짐작했는데 이외로 뚝심 좋게 삽질도 잘 하고 특히 풀을 잘 베어 언양농고 제초과를 나온 줄 알았다고 했다.

그 후 교장선생네 밭으로 옮겨올 때는 공무원출신의 외통수로는 저 노회한 교장선생, 특히 하루에도 열두 번 더 말을 바꾸고 심통을 부리는 사모님에게 많이도 속고 당하며 곤욕을 치를 것으로 보았는데 그럭저럭 잘 지내는 것이 남에게 물 한 잔 주는 것도 아까워하는 사람들에게 열찬씨와 영순씨가 조리 기구를 갖추고 커피는 물론 컵라면과 만두는 물론 외식까지 물량공세를 펴기 때문인데 사모님의 심술에 걸리면 언제 도로 땅을 내놓고 나가라고 할 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이야기로 매일 귀착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이 비로소 열찬씨를 식구로 받아들인 것은 평소에 내외가 인사성도 밝고 사람이 좋아 보이는 점도 있지만 이 물망골에서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그 어렵다는 고추농사와 마늘농사를 시작하는 것을 보고 저게 과연 될까 싶어 바라보다 무난히 활착을 시키자 자기들도 따라하면서 부터라고 했다. 특히 통장님은 지난해 마늘씨와 마늘비료만도 10만 원이 더 들고 마늘은 단 한 접도 못 거두었는데 열찬씨를 보고 다시 또 심으면서 마음을 열었고 또 얼마 전 윤씨가 밭에 오려고 건널목을 건너다 승용차에 부딪혀 입원을 했을 때 열찬씨가 뜻 밖에 문병을 온 것을 보고 완전히 저들의 식구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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