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첫 주, 모처럼 쉬는 일요일에 두 집 가족 여섯이 구덕포 한성횟집에 가서 회를 먹다
“엄마, 혹시 마늘하고 양파 남는 것 있으면 좀 더 주면 안 되나?”
딸의 말에
“와? 그 많은 마늘하고 양파를 다 우쨌노? 가게에 마늘, 양파를 쓸 것도 아이고.”
하는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도연씨가
“현서야, 바다구경 갈까?”
하고 아이를 업고 나가자 비로소 딸이 입을 여는데 지난 주말 신평의 시어머니와 장전동의 시누이가 놀러왔다 갔는데 아이가 칭얼대서 재우느라 돌아갈 때 작별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이튿날 베란다에 빨래를 널러갔다 그만 눈이 휘둥그레졌다는 것이었다. 반접짜리 마늘 세 뭉치와 양파가 수북이 쌓여있던 자리가 뭔가 허술해서 보니 마늘은 묶어둔 줄기는 그대로 둔 채 마늘꼭지만 가위로 툭툭 잘라 비닐봉지에 담고 양파도 그 굵은 대포알 만 한 것 다섯 개중 하나만 남기고 두 모녀가 가지고가서 남은 것은 굵은 양파하나와 뭉치 당 7,8 개씩 남겨둔 마늘 한 20개였다.
“아이구, 아상도 하제? 보통사람들 같으면 아들집에 못 보태줘서 안달인데 자식집의 것을 우째 몰래 들고 갈까? 좋지도 않은 것을 엄마하고 빼닮은 시누이도 그렇고.”
영순씨가 혀를 끌끌 차자
“엄마, 꼭 그런 건 아니야.”
“아니라니, 출가외인이라고 벌써부터 시어마시 편을 드나?”
“그게 아니라 우리 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바깥사돈이 농사를 지으니 밭에만 가면 마늘과 양파는 얼마든지 있는 줄 알지. 마치 우물에 물을 퍼 듯이.”
“저런? 그래도 아들과 손자 먹을 것은 남겨두어야지.”
“없으면 당연히 사돈이 또 줄 것으로 짐작하지.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결정적이라?”
“그렇게 가져간 마늘과 양파는 김치도 담고 그냥도 먹고 하우스손님들의 반찬이 되어 자기 수입이 되어 돌아오는 거지.”
“그래서.”
“그렇게 악착같이 번 돈을 다시 우리 도연씨 줄 것이잖아? 그래서 도연씨나 나는 손해가 없어. 단지 죽자, 살자 땡볕에 농사짓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고생이지. 자, 아빠. 소주 한 잔 더 드세요.”
하며 잔을 채워주어 그냥 웃고 넘어갔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집에 있는 마늘 반접과 밭에 있는 양파를 가져다주는데
“마늘을 기왕 줄려면 한 접을 주지.”
열찬씨 말에
“한 접 주면 사돈이 또 잘라가게. 이번엔 마늘을 미리 잘라 냉장고나 어디에 넣어두고 먹으라고 할 거야.”
하는 것이었다.
이제 밭농사의 중심은 고추농사로 넘어갔다. 물망골에선 처음으로 거름을 듬뿍 넣고 골을 넓게 탄 열찬씨네 고추밭이 새파랗게 우거지다 붉은 고추를 가득히 매달자
“야, 물망골에도 김장고추가 다 되는구나? 저 고추 크기 좀 봐. 아주 실한 총각은 몰라도 우리 늙은이 고추는 근방에도 못 가겠어.”
고추구경을 한다고 셋이 내려와서 이호열씨가 너스레를 떨자
“모른다이. 우리 통장님은 젊을 때 동래읍일대에서 고추하나로 소문이 난 사람이니까?”
평소 말이 없는 윤병균씨의 말에 김통장도 빙그레 웃는데
“저 큰 놈은 진짜 길이가 10센티, 아니 15센티는 되겠네. 평소에 저 정도라면 사람물건이 아니라 말 물건이지.”
평소에 입이 건 이호열씨의 입가에 거품까지 비어져 나오며
“우리 이 국장 고추는 영천사람 고추네. 영천 말 고추 말이야.”
하며 제각기 이제 거의 수확할 때가 되어 터질 듯한 붉은 빛을 발하는 고추를 만져보고 재어보고 하는데
“우리 교장선생 고추도 제법 크네. 우리들 고추하고는 비교가 안 되네. 하긴 이 국장이 거름을 거의 다 대어주지, 약 쳐주지, 순 따는 것 가르쳐주니 안 될 이유가 없기도 하지만.”
하고 돌아갔다. 졸지에 물망골의 상 농군이 된 열찬씨를 이제 한 가족처럼 받아들인 삼총사가
“이 국장, 국수!”
하고 저 위에서 젓가락질 흉내를 내거나
“어이, 파전 익었다! 한 따까리!”
하고 막걸리 사발을 들어 들이키는 흉내를 하면 얼른 올라가 같이 어울려 점점 격의가 없어졌다. 7월 하순에서 장마가 오기 전까지 영순씨는 고추 따는 재미에 푹 빠졌다. 허리를 넘는 고추밭에 엎드려 빨간 고추를 따며
“세상에 고추 따는 재미가 이래 좋은 줄 몰랐네. 작대기로 이파리 제끼고 애호박 따는 재미는 재미도 아니네.”
하며 만면에 웃음을 띠우다
“아이고, 이 고추 좀 봐. 세상 어느 총각의 고추가 이렇게 실할까?”
눈빛까지 변하며
“원래 별 크지도 못 한 우리 영감의 고추는 인자 통 구경할 수도 없으니...”
하며 웃었다. 다 해야 80포기인지라 한 번에 한 자루쯤 따다 물에 깨끗이 씻어 아파트옥상에 말려 저울에 달면 보통 서너 근, 많은 때는 대여섯 근이 되었다. 고추를 널어놓은 날은 어디 외출을 하거나 딸네 집에 있다가도 잠깐 하늘이 흐리거나 바람이 불면
“아이구, 옥상에 우리 고추!”
하고 부리나케 달려가서 다시 햇빛이 나면
“야, 똥깨 훈련 한 번 잘 했다. 그래도 재미만 좋네.”
하며 대도시 한복판에서 남 안 하는 고추 말리는 재미를 지긋이 즐기는 것만 같았다. 8.15 광복절 한 주가 지나면 처서인데 처서에 맞추어 김장 무와 배추를 심기위해 고추를 뽑으며 계산을 하니 열찬씨네는 총 스물두 근을, 교장선생은 열두 근을 수확한 폭이 되었다. 시중에 고추 값이 한 근에 만 오천 원에서 만 팔천 원 사이라 다 해봤자 3,40만원어치 밖에 안 되지만 영순씨는 마치 큰 부자나 된 것 같았다.
한 달이 지난 9월 중순에 배추 모종을 사다 심어 활착을 하니 노란 떡잎사이로 파란 본 잎이 나서 자라며 팔랑팔랑 가을바람에 나부끼고 고추잠자리가 날아오르고 코스모스가 피자 졸지에 물망골전체가 아늑한 선경 유토피아가 된 것 같았다. 이제 한 가족 처럼 아무 스스럼없이 통장님 원두막에 올라가 막걸리반주로 국수를 먹은 열찬씨가 소나무그늘에 누워 낮잠을 자다 눈을 뜨니 그만 시흥(詩興)이 도도해서
파실파실 채마밭
보슬보슬 보슬비
굼실굼실 배추 싹
덩실덩실 어깨춤
질척질척 장맛비
어정어정 한세월
꺼칠꺼칠 손마디
하늘하늘 한 평생-
대충 시구(詩句)를 맞추고 <흙의 리듬>이라고 떠올린 제목이 마땅찮아 벌떡 일어나 통장님 원두막으로 올라갔다.
같이 막걸리를 마신지라 이호열씨는 평상위에 누워 자고 통장님은 난간을 잡고 졸고 윤병균씨는 최여사, 김여사와 함께 점에 10원짜리, 그마저도 시작할 때 동전깡통을 부어 나누고 마칠 때 다시 깡통에 붓는 고스톱에 열중하고 있었다.
“통장님, 그리고 사모님, 레이디 엔 잰틀먼스!”
커다랗게 소리치더니
“오늘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고 그래서 제가 노래를 한 곡 하면 안 되겠습니까?”
“좋지!”
하는데 자는 줄 알았던 이호열씨가 눈을 뜨며
“이 국장, 똑 바로 해! 군대식으로 하란 말이야.”
소리치는 순간
“예비역 육군하사 가열찬 노래일발 장전!”
“발사!”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서에 봄날은 간다.
“잘 한다!”
통장님의 탄성에다
“사이! 사이!”
이호열씨도 신명을 내고 고스톱을 치던 셋도 화투장을 놓고 물끄러미 바라보다
“아니 낼 모래가 추석인데 봄날이 가다니?”
김 여사가 딴죽을 걸자
“아니 기분만 좋으면 됐지. 봄날이면 어떻고 가을날이면 어때?”
통장사모님 김 여사가 받더니
“우리도 같이 할까? 하고 손뼉을 치니 이호열씨도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새파란 꽃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 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딸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그렇게 노래가 끝나자
“인생살이 한 바탕 꿈과 같다는데 오늘 참 꿈같은 한세월이 흘러가네. 우리 늘그막의 이 한적한 골짜기에 우째 이국장 같은 사람이 다 나타나서 이래 좋은 날을 보내는지 모르겠네. 앞으로 5년, 10년 이래 좋은 세월만 보냈으면.”
하면서 통장님이 다시 찬물 통에 담아둔 막걸리 통을 건져온 적도 있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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