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래 시인이 읽어주는 좋은 시(54) 복노인을 기리다 頌福老 - 김기호

조승래 승인 2024.09.05 10:14 | 최종 수정 2024.09.11 12:29 의견 0
[사진=의령신문]

복노인을 기리다 頌福老

김 기 호

푸른 산의 봄은 알리지 않고 와도 알겠고
동쪽 이웃 노인들은 해 저무는 걸 절로 아네.
고요하게 어둠 내리니 사립문을 닫고
두견새 소리 들으며 새벽부터 절구에 쌀을 찧네.
며느리 나가서 아이 부르고 또 부르니
초당에서 일하는 아이 게으르게 일어나는구나.
빗질하는 흰머리에 비스듬히 햇빛 두르고
울지 말라며 손자 달래는 손으로 장미를 꺾어주네.
해당화 가지 헤아리니 막걸리가 석잔이라
술 마신 뒤 주방에 저녁밥을 재촉하는구나.
천천히 식사하던 사람들이 늦복이 많다고 하니
월나라 범려도 부럽지 않은 큰 부자일세.

범려: 월나라 재상

- 『묵묵옹집』, 김기호 시 김복근 옮김, 도서출판 경남, 2024.

김기호 시인 [사진 출처=의령신문]


시 해설

‘내 한 몸을 보더라도 어째서 묵묵‘이 이처럼 많단 말인가? 묵묵에서 나고, 묵묵에서 자라고, 묵묵에서 늙어가니, 외롭고 쓸쓸한 나의 옛 모습은 할 말이 없어 앉아 있고, 바쩍 야위어서 피골이 상접하여 말이 없어도 행한다’. 묵묵옹 默默翁 김기호 선생의 자서에서 인용했다. 책을 옮긴 손자 김복근 박사는 ‘할아버지는 행동하는 시인이요 지성이었’다고 한다. 김기호 선생의 많은 명작(350여 편)을 접하고 난 뒤의 평이다.

푸른 산을 보면서 봄이 온 걸 알겠고 동쪽에 사는 노인들은 서쪽으로 해가 저무는 걸 절로 안다는 구절만으로도 얼마나 순리를 따라 살았는지 알겠다. 어둠이 오면 대문 단속하여 밤 짐승 기웃거리지 않도록 하고 새소리 들으면서 절구에서 쌀을 찧는다. 하루치만큼 먹거리를 준비한다는 것 같다. ‘빗질하는 흰머리에 비스듬히 햇빛 두르’던 그분은 손자에게 꽃을 주면서 울음 그치라 달랜다. 햇빛을 정면으로 바라볼 필요가 없음을 아는 지혜로.

해당화 보면서 천천히 막걸리도 마셨다. ‘천천히 식사하던 사람들이 늦복이 많’으니 서두를 것 하나도 없음이라 이런 삶인데 월나라 재상 범려가 왜 부러운가, 마음은 천하를 가진 부자로다. 참으로 유유자적의 삶을 사신 분이시다. ‘묵묵옹’이라 부른 이유를 알겠다.

조승래 시인

◇ 조승래 시인은

한국타이어 상무이사, 단국대학교 상경대학 겸임교수(경영학박사)를 했고,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이사, 문학의 집 서울 이사, 계간문예작가회 부회장, (구)포에지창원 '시향문학회' 회장, 가락문학회, 시와시학회, 함안문인회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취미생활로는 검도를 하고 있다(4단. 대한검도회 영무검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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