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문서없는 노예가 되어(8)
주춤주춤 따라가도 돌아보지 않고
“고추를 심든지 아예 여기 살든지 당신 알아서 하소.”
부웅, 매연 한 줄기를 뿜어내고 영순씨의 차는 고개를 내려가 버렸다.
“허허, 참!”
문득 기획계장시절 이청희예산계장과 싸우던 일이 떠올랐다. 교통사고를 겪고 지팡이를 짚은 몸으로 돌아와 청내의 모든 직원들이 고생했다고 위로하는데 단지 자기와 사무관승진시험의 라이벌이 된다는 이유로, 그것도 자기보다 선임인 기획계장으로서 근무평정의 고과점수를 더 받는다는 이유로 아직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사람을 사정없이 덮치던 사람, 동료들이 말려서 베란다로 나와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끊은 지 7년이나 되는 담배를 벌컥벌컥 피우다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된 그 기막힌 일이.
그런데 나중에 곰곰 생각해보니 상대도 그럴 만을 하겠다, 자기의 유일한 희망을 가로막는 버거운 존재하나가 영원히 사라진 줄 알았는데 다시 나타났으니 얼마나 당황했겠느냐는 생각이 들고 둘 다 사무관이 된 후에 서로 화해를 하고 같이 고스톱을 치러 다니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지금 영순씨가 화를 내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열찬씨 입장에서 안 그래도 마음이 상하고 힘든 자신을 몰아 부치는 것이 야속하지만 그녀로서는 충분히 화낼 이유가 되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지. 혼자라도 해야지.)
한참 숨을 돌리고 검정비닐 통을 고추이랑 끝에 고정시키고 끝을 잡고 앞으로 나가는데 아뿔사, 펼쳐진 비닐에 강풍이 몰아부쳐 팽팽하게 긴장되더니 픽, 손에서 비닐이 빠져나가 펄럭거리기 시작했다. 끝을 잡으려니 거대한 흑룡(黑龍)처럼 하늘을 향해 치솟는지라 바닥 쪽에 손을 잡고 한 뼘, 한 뼘 끌어내려 다시 끝을 잡고 전진하는데 이번에 열찬씨의 몸이 휘청하더니 다시 비닐이 빠져나갔다. 한참이나 씨름을 해도 도무지 방법이 없자 이번엔 창고에서 마늘을 심는 검정 비닐을 들고 나왔다. 가로 10센티, 세로 10센티 간격으로 마늘 심을 구멍이 뚫렸으니 그 구멍으로 바람이 빠져나가면 한결 쉬울 것 같았다. 비닐을 펴기에 좀 힘이 들긴 했지만 펄럭거림이 많이 수그러들었다. 팽팽하게 당긴 끝에 재빨리 커다란 돌맹이 세 개를 가운데와 양가에 놓아 고정시킨 뒤 허겁지겁 삽으로 흙을 파서 양가의 비닐자락을 덮으니 마침내 고추 골 하나가 완성되었다. 오전 내내 그렇게 열한 골을 완성하고 배가 고파 방에 들어오니 다행히 영순씨가 양지머리를 넣은 육개장을 냄비에 담아 가스랜지 위에 올려두어 불을 붙이고 냉장고의 김치를 꺼내 막걸리부터 한 사발을 마셨다.
점심을 먹고 커피를 끓인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의자에 앉아 커피 잔을 든 채 잠이 든 모양이었다.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두시 반이었다. 다시 밖으로 나와 이번에는 가지와 오이, 토마토와 방울토마토, 청양고추와 아삭이 고추 심을 골을 덮었다. 이미 오후 세시 반, 비로소 고추모종을 심을 구멍을 40센티 간격으로 두어 골 표시하다 눈에 익자 따로 표시를 않고 바로 심어도 간격을 맞출 것 같아 모종을 하나하나 심어나가는데 첫 골을 심고 두 번째 골을 심어나가는데
“아니, 시방 당신 뭐하고 있는 거요?”
심술궂은 기름집 노인이 땅땅한 노인하나를 거느리고 나타났다.
“어세오세요. 영감님들.”
열찬씨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데
“내 살다살다 고추 심는데 마늘비닐 덮는 별 희한한 꼴을 다 보네. 당신 정신이 있소?”
바로 삿대질을 해대자 뒤의 땅딸막한 영감이 저지하며
“너무 섭하게 생각하지 마이소. 이 양반 귀가 어두워 남의 말을 못 알아들으니 성질도 급하고 목소리도 크고...”
미안해하자
“어쨌든 우리 집에 오신 손님이니 들어가십시다.”
하고 방수탁자로 안내하고 김치와 막걸리를 꺼내오니
“우리는 막걸리를 딱 한잔씩만 하는데 위에서 먹고 왔어요.”
하는 바람에
“그럼 커피나 한 잔!”
하고 물을 올리는데
“울타리그물을 치려면 좀 단단히 치든지 넘어지고 펄럭거리고 딱 우리 윤여사 성나기 좋을 뽄새야!”
키 큰 영감이 또 티끌을 잡기 시작하며
“농사는 뭐 아무나 짓는 건줄 알고? 택도 없다. 공무원출신이면 조용히 연금이나 받아먹고 들어앉았을 일이지. 만사 부하들 시켜먹고 주민들 괴롭히다 직접 하니 모양이 말이 아니지?”
연속되는 지청구에
“너무 괘념하지 마이소. 천성이 저런 것을 우짜노?”
키 작은 영감이 미안해하며
“자, 형님 그만 커피나 들고 갑시다.”
하고 말리는데
“영감님, 오늘은 집에 내려가시나 본데 저는 영감님이 집에 안 가고 밭에서 주무시는 날 저 위쪽에 불빛을 보면 너무나 반갑고 든든한데 영감님은 도대체 제만 보면 와 그러시는지 모르겠네요.”
하고 쳐다보자
“뭐라꼬?”
영감이 그나마 좀 들린다는 왼쪽 귀를 갖다 대는데
“우리 형님이 말투가 사나워서 그렇지 천성은 착하답니다. 꼭 이선생을 나무라기보다 걱정이 된다는 말인데...”
키 작은 영감이 열찬씨의 눈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
“형님 갑시다. 버스시간 늦습니다.”
키 큰 영감을 일으켜 세워 나가는데
“농사도 제대로 못 짓는 반 벙거지 하나가 굴러들어와 오리들판을 다 조져놓네. 나 원 참! 내가 다 부끄러워서...”
기어이 한 마디를 더 던지고 두 영감이 사라졌다. 또 다시 옆에 담배가 있으면 한대 피우겠다 싶었지만 참고 고추모종 포트를 찾아들고 다시 네 골을 심어 제법 파릇파릇 밭모양이 나는 것을 보고 심은 모종과 포트에 담긴 모종모두에 물조리게로 물을 준 뒤에 손을 씻고 방으로 들어왔다. 텔레비전을 트니 벌써 일곱 시, 야구는 2회 초 3:0으로 롯데가 지고 있었다. 육개장에 밥을 말고 김장김치까지 넣어 간간한 국물에 소주를 마시니 안주로서 손색이 없었다.
(역시 우리 마누라는 음식솜씨가 좋군. 인물이나 맵시도 무난하고 대인관계도 무난하고 시가식구들도 잘 대하는데 딱 하나 나에게만 잔소리가 심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만 빠져나가려 하고...)
내가 속이 상했으니 지도 속이 상했으리라 싶어 전화를 하려다 그만 두었다. 안 그래도 매사 열찬씨가 잘못 한 걸로 밀어붙이는 사람에게 먼저 굽히고 들어가다간 모든 잘못이 오로지 자신 탓으로 돌아올 것만 같았다. 몸이 피로해 절로 눈이 감겼지만 혹시나 하고 꾸벅꾸벅 졸면서도 롯데를 응원하는데 결국 9:1로 참패를 하고 말았다.
이튿날 나머지 고추를 다 심고 물을 주었다. 역시 롯데는 지고. 다음날 수요일은 고추가 아닌 허드레 작물만 심어 비교적
수월하게 오전에 일이 끝났다. 점심을 먹으며 곰곰 생각하니 순서로 보아 고추지지대를 세워야 하나 당장 급한 일은 아니니 나중에 영순씨가 오면 하기로 하고 모처럼 숨을 돌릴 겸 오후에는 고사리를 뜯기로 했다.
오후 두시부터 한 시간 반 정도 억새와 갈대와 청미래덩굴이 얼크러진 야산을 뒤져 크고 살찐 놈 근 70개를 꺾어 돌아오니 이제 고사리를 삶을 일이 걱정이었다. 아내 영순씨가 있다면 공기 좋고 햇볕 좋은 은 농막에서 삶아 말리면 제격이련만 토요일이 되어야 올 것이고 대신 자신이 부산에 가지고 가면 해결이 되지만 이번 수요일만은 내려갈 마음이 나지 않았다. 내가 내키지 않으면 저도 내키지 않을 것, 이참에 한 댓새 서로 좀 떨어져 있으면서 냉각기간을 가지는 것이 좋으리란 생각을 하다 이게 뭐 이혼조정도 아니고 노사조정도 아닌데 꼭 공무원티를 내는구나 싶어 픽 웃음이 나왔다.
기왕 한 나절을 쉬는 김에 샤워나 좀 하자며 사방을 살펴보다 웃통을 벗고 수돗가의 물통에 물을 받아 한참 끼얹고 개운한 기분으로 물기를 닦는데 삐익, 경적음이 울리더니 정문 앞에 닭먹이 짬밥차를 세운 닭장주인 50대 사내가
“어르신 몸매가 죽이는데요. 아직 물이 안 차가워요?”
아는 척을 해 씩 웃으니
“닭똥거름 안 필요하세요? 하도 열심히 하시는 게 보기도 좋지만 안쓰럽기도 해서 말입니다.”
“아, 주면야 고맙지. 안 그래도 생땅이라 거름기가 없어서 걱정인데.”
하자 손을 흔들며 떠났다. 바께스에 물을 받아 창고 안에서 아랫도리까지 깨끗이 씻고 모처럼 개운한 마음으로 커피를 한 잔 하는데 삐익, 울타리 밖에서 경적이 울리더니
“어르신, 닭똥 왔습니다.”
닭똥을 가득 실은 1,5톤 포터차가 두 대나 정차하더니 대문을 열어주자
“어디 부어드릴까요? 한 가운데가 좋겠지요?”
얼굴이 꼭 닮은 사내 둘 중 나이가 든 축이 말하자 뒤차에서 또 얼굴이 꼭 닮은 청년둘이 넓적한 거름 삽을 들고 내렸다.
“이게 웬 사람들이고? 나는 젊은 사람 하나에 나이든 사람 하나 부자간이 하는 줄 알았는데?”
“예. 저하고 동생하고 둘에 우리 아들하고 조카하고 넷이서 하지요.”
“저런 하도 서로 닮아서 나는 그런 줄도 몰랐네.”
“예. 우리 네 부자사이에 어르신이 스타랍니다. 작년에 돌아가신 우리아버지와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머리가 허연 분이 하도 열심히 일을 하셔서 참 대단하기도 하지만 보기 좋다고 우리 넷이 늘 이야기하지요.”
“그래요? 돌아가신 부친은 연세가 얼마나 되셨는데?”
“예순일곱이요.”
“그럼 사장은?”
“저는 마흔 일곱, 동생은 마흔 다섯.”
“야, 오 새끼네. 저 총각들은?”
“스물여섯에, 스물넷이지요.”
“저런, 저런? 아이나 아비나 전신만신 나이가 다닥다닥 붙었네?”
“예. 우리는 조생종 닭을 길러 재빨리 알을 빼야하는 관계로 우리 아부지 때부터 서둘러 장가를 들어 그렇게 되었지요.”
“그렇구나!”
이야기 하면서도 트럭위의 화물칸거치대 하나를 열고 넷이 부지런히 삽질을 해 한 트럭을 내리고 다시 나머지 트럭을 들이대는데
“자, 커피나 한잔하지.”
열찬씨가 종이컵 커피 한 잔씩을 돌리자
“어르신 갑바쪼가리 있으면 찾아 오이소. 비오면 큰일 나니까 우리가 덮어주고 갈게요.”
해서 방수 천을 찾아오니 넷이 거름을 당근하게 끌어올리고 천막을 덮고 사방을 돌로 눌러 고정까지 시키고
“아이고 시원하다. 우리가 다 속이 후련하다.”
하고 떠나면서
“스물여섯 우리 아들도 아들을 낳았고 스물네 살 조카도 여자가 있어요.”
묻지도 않는 말을 하면서 넷이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히야!”
작은 산봉우리만한 거름더미가 볼수록 흐뭇했다. 육개장을 덥혀 소주반주로 저녁을 마치고 모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야구를 시청했다. 그날은 처음부터 타선이 폭발하더니 무려 11:1로 쉽게 이겼다. 흐뭇한 마음으로 자리를 깔려는데
“당신, 오늘은 안 올 끼요?”
영순씨의 전화가 와서
“그래 나도 고사리도 좀 따고 해서 집에 갈까 했는데 닭 키우는 집에서 닭똥거름을 두 대나 싣고 와서...”
“당신이 그렇게 목을 매던 거름부자가 됐겠네.”
“그렇지. 안 묵어도 배가 부르다.”
“고추밭 비닐은?”
“혼자 쳤다.”
“바람이 세서 우째?”
“구멍 난 마늘 비닐로 쳤다.”
“저런? 구멍구멍이 풀이 날 낀데?”
“나면 뽑지.”
“고추도 심고?”
“다 심었다. 주말에 당신 오면 고춧대 심고 매어주면 된다.”
“칫, 누가 밭에 간다 캤나?”
“올 맘 없으면 전화는 와 하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해서.”
“알았다. 그만 자자.”
하고 밖으로 나와 서늘하게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을 맞으며 이슬이 축축한 진입로를 한 바퀴 돌아 방수탁자에 앉아 한참이나 밤하늘을 바라보는데 전화벨이 울리더니
“보소. 거게 철문 열어놓으소.”
“문은 와?”
“내 지금 가고 있다.”
“이 한밤중에?”
“당신이 안 오니까 그렇지? 반찬이고 묵을 거고 다 떨어졌을 거 아니가?”
“아이구, 고양이 쥐 생각하네.”
“마, 시끄럽소.”
“그래 지금 어덴데?”
“개좌터널 넘어서 철마 지났다.”
“아, 알았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