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 - 외물의 유혹에 끄달리지 말고 본래의 모습을 바로 찾아가라
사람의 마음에 저마다 하나의 참 문장이 있건만
옛 사람이 남긴 몇 마디 조각난 기록 때문에 모두 묻혀버리고,
저마다 한 곡조의 참된 음악이 있으나
요염한 노래와 춤에 가리어 막혀버렸다.
모름지기 배우는 사람은 외부 사물에 끄달리지 않고
곧장 본래면목을 찾아야만
비로소 참다운 묘미를 얻게 될 것이다.
- 都被(도피) : 모두 ~당함. 都는 ‘모두, 전부’.
- 被(피) : 입다, 덮다(씌우다), 당하다 여기서는 ‘당하다’ 의 뜻으로 쓰임.
- 殘編斷簡(잔편단간) : 잔멸(殘滅)된 책과 끊어진 간독(簡牘).
- 封錮(봉고) : 갇히고 막히다, 봉쇄(封鎖)되어 막힘.
- 了(료) : 원래 ‘마치다, 깨닫다’ 의 뜻이나, 문장에 마지막에 위치하여 종결사의 기능을 하니 굳이 옮기자면 ‘ ~해 버리다’ 에 해당한다.
- 一部眞鼓吹(일부진고취) : 한 가락의 참된 음악. 鼓吹는 鼓歌吹奏(고가취주)의 약어(略語)이니 鼓는 두드리는 타악기요, 吹는 부는 관악기요, 歌는 노래요, 奏는 연주(演奏)이니 곧 음악 그 자체를 뜻한다.
- 湮沒(인몰) : 인멸(湮滅)되어 사라짐, 파묻혀 사라짐.
- 掃除(소제) : 쓸어내어 없애다. ‘청소(淸掃)하다’ 의 뜻인데, 곧 ‘장애가 되는 가림막을 걷어낸다’ 는 뜻이다.
- 外物(외물) : (본질을 흐리는) 외부의 사물. 여기서는 앞에서 말한 殘編斷簡과 妖歌艶舞를 뜻함.
- 直(직) : 바로 ~하다.
- 覓本來(멱본래) : 본래의 모습을 찾다. 여기서 本來는 앞에서 말한 眞文章과 眞鼓吹를 가리킴.
- 纔(재) : 겨우, 비로소, 방금, 그야말로. 여기서는 ‘비로소’ 의 뜻이다.
- 眞受用(진수용) : 참다운 묘미를 맛봄. 즉 참다운 문장과 음악을 향유(享有-누림)함을 뜻한다. 受用은 향수(享受)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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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본래면목(本來面目)이란?
모든 사람에게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원만하고 진실한 면모를 가리키는 불교용어로 본분사(本分事)·본분전지(本分田地)·본지풍광(本地風光)이라고도 한다.
본래(本來)는 처음부터, 원래, 근본 등의 의미로서 천성적이고 자연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본래면목은 인위적인 행위가 가해지지 않은 것으로 시비가 없고 분별이 없으며 조작이 없고 생멸이 없이 타고난 그대로의 모습을 말한다.
본래면목은 이치적으로 처음부터 부처와 중생이 하등의 차이도 없이 완전하게 동일한 모습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으로 본래청정자심(本來淸淨自心)을 의미하고, 자기의 생활 이전에 발생해 있는 그 모습인 본래심(本來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 '심'은 심리현상이 아니라 생명활동 그 자체를 가리키는 자기의 본래적인 생명활동이며, 자성 청정한 진실의 사람을 가리키는 본래인(本來人)이고, 본래의 모습은 맑고 적정하다는 것을 가리키는 본래담적(本來澹寂)의 상태를 일컫는 말로서 제법이 본래부터 청정하다는 자성에 대한 속성을 표현한 말이다.
석가모니의 탄생게에 나오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에서 말하는 아(我)도 본래면목을 지시한 것으로서 중생세간에 속하는 천상과 천하에서 본래면목을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설파한 말이다.
선에서 추구하는 수행은 바로 이와 같은 자신의 본래면목을 파악하고 자각하는 행위이고, 선의 깨달음은 곧 본래면목의 터득이기도 하다. 달마로부터 유래되는 중국 선종의 조사 선풍에서는 그 본래면목조차 본래부터 각자에게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까닭에 그것을 깨달아가는 행위가 바로 수행이고 깨달음의 실천으로 간주된다.
혜능(惠能)이 종보본 『단경(壇經)』의 첫 대목에서 “깨달음 곧 보리의 자성은 본래부터 누구에게나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다만 그것을 그대로 활용할 수만 있으면 그것이 바로 성불하는 것이다.” (『단경』 행유품(行由品), 『대정장』 48, p.347 하)라고 말한 것도 중생의 본래면목에 대하여 자각할 것을 선언한 것이다.
“선이라는 생각도 하지 말고 악이라는 생각도 하지 말라. 바로 그러한 경우에 그대 혜명상좌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종보본 『단경』 행유품, 『대정장』 48, p.349 중)라는 혜능의 말은 본래면목의 성격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곧 분별의 망상이 발생되기 이전의 본래면목에 대하여 질문한 내용이다. 여기에서 가리키는 선과 악은 도덕적인 그리고 윤리적인 의미의 선과 악의 개념이 아니라 수행 혹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경우를 선이라 말하고 그 반대의 경우를 악이라 말한 것이다. 이처럼 선과 악이 발생하기 이전의 순수한 자신의 본래면목은 선과 악의 경우처럼 상대적인 개념으로는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분별심을 벗어난 혜명상좌 자신의 진실한 모습이 무엇인가를 물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선어록(禪語錄)』에서 흔히 언급되고 있는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 의 경우에도 부와 모는 나를 낳아준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상대적인 개념의 분별심을 의미한다. 때문에 나 자신의 경우에 내 마음에서 일체의 상대적인 분별심이 발생하기 이전의 순수한 본래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를 궁구하여 묻고 있는 선문답으로 설명된다.
선문답에서는 흔히 본래면목에다 상징적이고 우회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단순하고 분명하게 제자를 깨워주는 수단으로 활용하는데, 흔히 스승이 제자에게 질문하는 것으로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라는 질문은 단순히 어느 지방에서 왔는가 하는 뜻으로 제시되는 말이라기보다 그대가 태어난 바로 그것이 무엇인가를 재촉하는 질문이다.
남악 회양(南岳懷讓)의 경우에 육조 혜능(六祖惠能)으로부터 “무엇이 이렇게 여기에 왔느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회양 자신의 본래면목에 대한 답변을 찾지 못한 까닭에 그에 대하여 즉시 답변을 하지 못하다가 이후로 홀로 고군분투하면서 8년을 지낸 어느 날 육조 혜능에게 나아가서, '본래면목에 해당하는 무엇이라 말하는 것도 정작 본래면목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을 뿐'이라고 답변하여 마침내 인가를 받았던 경우 (『단경』 기연품(機緣品), 『대정장』 48, p.357 중)도 이에 해당한다.
본래면목이라는 말이 이후 선종 수행의 역사에서 간화선(看話禪)에서는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인 깨달음의 대상 가운데 하나로서 화두로 중요시되었고, 묵조선(黙照禪)에서는 좌선 수행을 통한 자각이 성취되어 드러나 있는 상태로서 중요시되었다. 보조 지눌(普照知訥)은 “텅 비어 있고 고요하며 신령스럽게 이해하는 마음이 바로 그대들의 본래면목이다” (『수심결』, 『대정장』 48, p.1007 상)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중생 모두에게 갖추어져 있는 본래면목의 속성에 대하여 말한 것으로 불생불멸하고 고요하며 움직임이 없고 어디에 의지함이 없고 분명하며 뚜렷한 것임을 드러낸 말이다.
이러한 본래면목의 전통은 한국의 선법에서도 태고 보우(太古普愚)의 『태고어록(太古語錄)』, 청허 휴정(淸虛休靜)의 『선가귀감(禪家龜鑑)』, 환성 지안(喚惺志安)의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 등에도 반영되어 전승되었다.
- 『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서
<배움의 공동체 - 학사재(學思齋)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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