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있는 인저리타임] 그 남자와 앵무새 / 김길녀

김길녀 승인 2019.02.24 14:47 | 최종 수정 2019.02.24 15:03 의견 0

그 남자와 앵무새 / 김길녀

 

여름 끝 가을이 오는 길
조금 느렸던 대학로

오래된 술집 테라스
몇몇 시인과 남자
지워지는 여름꽃 이름 무심히
불러주며 차가운 술과 꽃 섞인 샐러드로
오후의 허기를 달랜다

말보다 글이 편한 사람들
술잔 비우듯이 말의 잔도 자주 비워진다

조용한 행간으로 스며드는 남자의 앵무새 이야기

뒷산이 배경이 된 미끄럼틀과 그네가 있는
놀이터가 남자의 말로 소환된다

집을 떠나 홀로 살아야 하는 남자에게
친절한 여자가 선물한 뉴질랜드 출신 앵무새 연인

남자도 새들도 낯선 집에 익숙해지기 위해
아프지 않은 노력을 필요로 했다

서울행이 잦았던 남자
새들과 기차를 타고 서울 거리를 함께 했다
가끔은 남자가 없는 집에서 새들만의 파티가
열리고, 서로에게 충실했던 새들과 남자

어느날 갑자기 떠난 해외출장에서 돌아온 남자의 집
기다림에 지친 새들은 열려진 창문으로
남자를 찾아 날아올랐다
나는 법을 잊고 살았던 새들은
세상 가장 견고한 종이컵 옹관묘에 누워
놀이터 뒷산 긴서어나무 아래에서
남자와 비밀스러운 이별식을 가졌다

낙엽 쌓이는 깊은 가을이 오면
남자는 습관처럼 긴서어나무 아래를 서성거린다

그런 날이면,
아이들과 바람도 없이 놀이터에서
그네가 흔들린다고 말하는 남자
서늘한 눈빛 안으로
가을이 빠르게 당도하고 있었다

김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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