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리(平里) 선생의 명촌리 일기 (5)그 마을로 가는 길

포토 에세이 936, 일흔 살의 봄날들36

이득수 승인 2020.04.12 18:38 | 최종 수정 2020.04.14 00:33 의견 0
사춘기 추억을 소환하는 마을길.

고래뜰을 걸으려 사광리 언덕길을 넘어가다 환하게 새로 핀 복숭아꽃을 보면서 저도 몰래 걸음이 멈춰지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제 또래로서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저렇게 분홍빛 살구꽃이나 복사꽃이 핀 골목길을 괜스레 가슴을 울렁이며 걸어가던 생각이 날 것입니다. 초록색 보리 골에 나는 배추흰나비만 봐도 가슴이 뛰고 구불텅한 개울가에 핀 찔레꽃이 한 잎 두 잎 물위에 떠가면 그만 오만 감정이 다 치밀던 그 가슴여린 시절 말입니다.

그러나 그 시절의 기억 중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내 해도 까만 교복을 입은 맵시 좋은 여학생들이 삼삼오오 지나가던 골목길이나 신작로, 아득히 사라져버린 강 건너나 산 너머의 마을에 대한 동경(憧憬)입니다. 목덜미가 희고 볼우물이 예쁜 소녀들, 쌍갈래머리를 나부끼며 너무도 단정하게 걸어가 한 번도 말을 붙여보지 못한 소녀들이 저는 저렇게 복사꽃, 살구꽃이 흐드러진 마을이나 앵두꽃이 앙증맞은 우물가의 마을에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한 번도 그 마을을 찾아갈 용기는 내지 못 하고...

오늘 사진은 복사꽃 옆의 축사로나 썼을 긴 슬레이트지붕이 50년도 더 된 새마을운동시절의 추억을 불러오기에 충분합니다. 왼쪽의 밋밋한 2층집도 건너편의 낮은 대숲도 다 오붓하고 오른 쪽 시누대에서 창공을 향해 뻗어가는 두 가닥의 전선도 추억의 도화선(導火線)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하늘도 맑고 날씨도 좋고 거기다 자신의 그림자까지 노출시킨 서툰 사진사도 밉지만은 않습니다. 

평리(平里) 이득수 선생

모처럼 멋지고 포근한 사진 한 장, 제 포토 에세이의 독자들이 대부분 40대 이상의 중장년들인데 오늘 특별히 타임머신 하나씩을 선물하겠습니다. 모두들 한 3, 40년, 길게는 5, 60년 전 사춘기의 마을로 돌아가 그리운 사람들과 기억들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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