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리(平里) 선생의 명촌리 일기 (3)들길의 대화

포토 에세이 934, 일흔 살의 봄날들

이득수 승인 2020.04.10 16:27 | 최종 수정 2020.04.10 16:41 의견 0

텔레비전만 켜면 코로나19 방송이 나와 맘이 스산한 오후에 황사까지 심해 산책을 갈까 말까 망설이다 어서 나가자고 마루에서 시위를 벌이는 마초(평리 선생의 애완견 이름) 때문에 단단히 마스크를 쓰고  나섰습니다. 
 
고래뜰을 지나 이불뜰의 수로를 따라 천천히 걷는데 앞서가던 마초가 길가의 밭둑에 엎어놓은 빨간 플라스틱 물통에 대고 오줌 일발로 사정없이 영역표시를 하더니 제가 다가가자 괜히 앞발로 땅바닥을 긁어 먼지가 부옇게 일어나는데 

“저 노무 똥강아지가 아저씨 갱교?”

원예용 반송(盤松)그늘에 전동스쿠터를 세워놓고 밭둑에서 뭔가 캐던 저 또래의 여인이 쳐다보는지라

“예, 먼지 일바치서 미안합더. 그런데 아지매는 지금 뭐 캐능교?”

“뭐를 캐는 기 아이고 정구지 빈다 아잉교? 아재는 정구지도 모리능교?”

“아, 그라고 보이 정구지네.”

도랑둑과 밭둑에 멀찍이 떨어져 대화가 시작되는데

“나신 아재네. 어데 사능교?”

“아, 명촌 등말리요.”

“얄궂은 영감이네. 촌에 살면서 일 안하고 노닥거리며 길만 걷는 영감이 어딨능교?”

도무지 질문공세를 멈추지 않을 태세라

 “아지매, 수고하이소.”

 돌아서려는데

“아, 영감요, 내 좀 봅시더.”

 “...”

 “내가 혼자 사는데다 사흘이나 남하고 말을 못 해봐서...”

 “예에...”

 “입에 거무줄이 칠라캐서 말인데...”

 “...”

“저 노란 강새이는 세빠똔교?”

“아, 예...”

평리 이덕수 선생

근 10분이나 시달리고 비로소 걸음을 떼며 돌아보니 열굴 가득 웃음이 번지며 여간 후련한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일만 하고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만나고 대화도 좀 하고 간혹 누굴 기다리거나 그리워하면서 살아야 인간적이지 아니겠습니까? 가뜩이나 혼자 사는 독거노인이 코로나19 때문에 자식도 이웃도 잘 만나지 못 한 것 같았습니다. 

 아이구, 산다는 것이 뭔지, 늙는다는 건 또 뭔지...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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