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리(平里) 선생의 명촌리 일기 (6)눈물 꽃 연달래

포토 에세이 937, 일흔 살의 봄날들37

이득수 승인 2020.04.14 00:10 | 최종 수정 2020.04.14 00:33 의견 0
연달래

두릅을 따러 저도 모르게 제법 높고 험한 산에 오르다 해발 400미터 고산에서 만난 <연달래>입니다. 

이른 봄에 반도의 산야를 분홍으로 물들이는 소월(素月)의 진달래보다 좀 연하기는 하지만 자세히 보면 무단히 사람의 마음을 싱숭생숭 들뜨게 하며 괜히 온갖 슬픔을 떠올려 눈물짓게 만드는 <눈물 꽃>이기도 합니다.

굶주린 옛날엔 꽃이 얼마나 보다도 꽃잎을 먹을 수 있나, 없나가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을 요즘의 젊은이들은 아마 이해하기 힘들 겁니다. 그래서 꽃의 개화시기 함께 먹느냐 못 먹느냐를 따지면,
제일 먼저 피는 진달래(언양말로 참꽃)는 먹을 수 있고, 
두 번째 저 연달래는 먹을 수는 있지만 주로 고산지대에 살아 잘 접하기 어렵고, 
세 번째는 4월 중순쯤 피는 철쭉인데 언양에서는 이걸 진달래라고 하기도 하고 개꽃이라고 하는데 찐득찐득한 진액이 흘러 먹으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신불산, 황매산, 천관산등 고산지대에 맨 늦게 철쭉제를 지내는 철쭉이 있는데 보기는 엄청 탐스럽지만 역시 먹지는 못 합니다.

다음은 연달래꽃에 따른 이야기 하나.
제가 맨 처음 사물을 인식하고 기억이 생기던 서너 살 때 제 큰 누님은 자형이 전사하고 시어머니 구박이 심해 아버지의 손길에 끌려 우리 집에 돌아와 친정살이를 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진장만디에 참꽃이 활짝 피던 봄날 녹의홍상(綠衣紅裳), 우테(옷) 한 벌을 새로 해 입고 동구 밖 앞세메 돌아 마구뜰 지나 지금 고속도로가 달리는 장승백이고개를 넘어 20리도 넘는 통도사앞 옹기점마을로 두 번째 시집을 갔습니다.

돌처럼 굳은 황토 흙이 너무나 붉어 옹기밖에 구울 것이 없는 옹기점마을에서 농사를 짓다 나중에 어머니로부터 언양장터의 난전을 물려받아 채소와 미꾸라지를 팔며 전처자식 둘을 포함한 6남매를 길러낸 누님은 장날에 주말이 끼면 <부산동생 득수>를 기다리다 지금은 곰탕으로 부르는 <소피국물> 한 그릇 사먹는 것을 최고의 보람으로 쳤습니다. 

평리(平里) 선생

그러다 평범한 농부 자형이 돌아가시자 간암이 걸리고 정신이 혼미해저 혼자 빈집에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민들레나 앉은뱅이꽃(제비꽃 또는 오랑캐꽃으로 불림)처럼 몇 년을 버티다 죽었는데 제가 마지막 문병을 가자 머리를 빡빡 깎은 주먹만 한 얼굴로 품에 안겨 참새처럼 바들거리며 아버지 어머니가 보고 싶기는 하지만 아직은 죽기도 싫고 겁이 난다며 매달렸습니다. 

그 얼마 후 퇴직을 얼마 앞두지 않은 제가 중국 장가계로 공로여행을 가자 꿈속에 나타난 누님과 점심참을 가지고 아버지가 소를 모는 논으로 가다 자꾸만 논둑에서 미끄러져 제가 계속 끌어올리는 꿈을 꾸다 깨었는데 그 시간에 누님이 운명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왜 가난하고 힘든 내 누님들이 말년엔 그렇게들 저를 연연해하는지 오늘도 우리 큰 누님을 닮은 연달래를 보면서 그만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그 누님이 가신 지 벌써 14년이 되었습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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