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옹(進翁) 시인의 간월산 산책 (1)시간 속의 언양(彦陽)

언양읍성, 남문 영화루 그리고 아전 토색질에 대한 읍민 40명의 진정서

이득수 승인 2020.04.16 23:34 | 최종 수정 2020.04.19 00:27 의견 0
언양읍성 [사진=이득수]

석탄절을 맞아 평소 눈여겨보았던 언양지방의 폐사 간월사와 그 뒷산인 간월산에 대한 특집을 한동안 연재토록 하겠습니다.

그러자면 부득이 언양과 불교에 관한 이야기가 흐름을 이루게 되는데 사실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정치나 향토색처럼 함부로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운 난제(難題)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소설가를 지망해 일평생 유교의 사서삼경을 비롯해 기독교의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이야기는 물론 불교의 기본 경전인 금강경(불법), 연화경(부처의 생애), 화엄경(구도와 보살행)도 빠짐없이 읽고 무릉도원의 신선도와 동학, 인도철학과 신화까지 섭렵하며 그냥 인문학적 관심에서 포토 에세이에서도 간혹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올렸으니 이번 연재도 그냥 편안하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언양>의 지명은 신라가 아직 조그만 부족국가 서라벌 또는 사로(斯盧)국으로 불리던 시절 낙동강에 물린 철(鐵)의 왕국 가야(伽耶)와의 접경지역 최남단에서 국태안민의 제(祭)를 올리던 고헌산 (高巘山)의 <헌>(巘, 산에서 술잔을 올릴 헌) 자(字)가 구개음화현상으로 <언>으로 변해 고헌산 아래 양지바른 마을(그 시초는 상북면 길천면 이이벌), <언양>으로 불리면서입니다. 

언양읍성의 남문 영화루 [사진=이득수]

예로부터 살기 좋아 대곡리 반구대 고래암각화가 있고 삼국시절 화랑의 유적인 천전리 각석(刻石)이 있는 유서 깊은 이 고장은 통일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이 나라를 왕건에게 바치고 고려에 귀부(歸附)한 이후 졸기에 망국의 수도가 되어 반란이 우려되는 변방으로 의심당하며 교려 때는 포은 정몽주등의 유배지로나 쓰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엔 경상좌도 81군현(郡縣)의 수령방백(守令方伯)중 가장 낮은 직급의 현감이 부임하는 조그만 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형적으로 형산강 지구곡에 속해 교통이 편리해 한성에서 부산포에 이르는 역마와 봉수대의 거점이 되어 지금 삼남면 교동리 덕천고개에 총 근무자가 300명이 넘는 역참, 덕천역이 있어 마발(馬勃)과 보발(步撥)을 띄우느라 그에 따른 둔전과 녹봉, 내륙과 해안을 연결하는 언양장의 성시(成市)로 많은 재화가 들끓어 중앙관리들의 수탈의 대상이 되고 더더욱 왜구의 침탈이 잦아 참으로 살기 힘든 고장이라 할 것입니다. 

1894년 갑오년 세습 세 아전의 토색질을 진정하는 40명 읍민의 진정서. 그러나 마패를 다섯 개나 찍어준 순무사(巡撫使)는 탐관오리아전과 한 편이 되어 사건을 유야무야했고, 오히려 진정자 40여 명은 무고로 멸문지화를 당했다. 이 진정서는 소송의 우두머리인 소두(疏頭) 의흥(義興) 박(朴)씨의 고가(古家)가 헐릴 때 발견되었다. 위의 내용은 필자가 번역한 것임. [사진=이득수]

<시인·소설가>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