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57)토정비결 해설 ⑩토정이 살던 시대는?

말년일기 제1258회(2021.2.26)

이득수 승인 2021.02.25 16:46 | 최종 수정 2021.03.02 16:53 의견 0
Hans Holbein,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자기의 소신인 주권재민을 지키다 오랜 벗인 헨리 8세의 도끼날에 죽어간 '유토피어' 의 작가 토마스 모어 [Hans Holbein/ Public domain]

그렇다면 토정이 살던 16세기 중후반은 어떤 시대였을까요? 우리가 한 시대나 인물 또는 한 분야에 대한 연구를 하려면 지금껏 인류사의 문학과 미술, 음악과 조각, 심지어 음식과 복장에 종교까지 모든 문화적, 예술적 요소가 바로 그들이 당면한 일상에 스며들면서 조금씩 변해간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토정선생이 태어난 이조중엽 16세기에 해당되는 1512년은 살인의 광기가 가득한 조선의 왕조가 기적처럼 찾아온 세종의 황금기를 넘어 강한 숙부가 약한 왕 조카를 시해하는 변고를 치른 뒤 처음으로 나라가 안정되고 유교중심의 국가체제가 자리를 잡았던 성종시대가 연산군의 등장으로 졸지에 삼악도에 빠져 휘청거리다 중종반정을 통하여 비로소 백성의 참상을 챙기기 시작한 시기, 아직도 유교이념에 젖은 봉건주의가 동지섣달 꽁꽁 언 얼음처럼 반도를 덮고 있던 시절입니다.
 
그러나 당시 서양에서는 교황과 성당,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종교를 업은 군소국의 왕과 영주들이 각자의 기사를 거느리고 가난한 농부를 노예처럼(農奴)처럼 부리던 암흑시대 중세에서 아직도 한밤중인 조선과는 달리 인류사를 바꾼 중대한 몇 가지의 변화의 조짐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먼저 왕의 권능(權能)이 하늘로부터 왕권신수설이 아니라 각자의 모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각자의 인격과 살아갈 권리, 생존권을 가졌다는 주권재민설이 왕과 기독교의 압제가 없고 세금이 없으면서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가운데 일반의 백성들이 오손도손 살아가는 지상의 낙원 <유토피아>를 꿈꾸는 영국의 학자이자 재상인 토머스모어가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는 바람에 바람둥이에다 지독한 남아선호자인 폭군 헨리8세에 의해 높은 단에서 도끼로 참살당하는 사태, 민주주의의 떡잎이 바야흐로 지표를 뚫고 나오던 때입니다.(1535)

문학과 음악 등 예술전반에 무려 천년, 10세기를 넘게 서양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기독교와 농노제에서 벗어나 그 옛날 가장 화려한 문화와 자유로운 토론을 누리던 그리스, 로마시대로 돌아가자는 문예부흥운동 즉 르네상스운동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레오나르드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대 화가가 등장해 회화 <모나리자>를 비롯해 천장화 <천지창조>, 조각상 <피에타>와 <천국의 열쇠>등 수많은 인류사의 명작이 탄생하지만 그 중에서도 발군의 천재인 레오날드 다빈치는 오늘날의 자동차나 비행기를 꿈꾸고 그 설계를 해 본다든지 인체의 구조와 신비를 전과는 완전 다른 각도로 파헤치는 엄청난 내부적 변화를 몰고 오는가 하면 이탈리아 제노아출신의 공상가 콜럼버스가 새로운 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그곳이 신대륙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죽은 지 10년도 채 안 되는 시기에 토정 이지함이 태어난 것입니다. 

 동양의 대표적 그림인 신사임당의 화훼초충도 [국립중앙박물관]

이를 좀 더 요약해 정리하면 1512년에 태어나 1582년에 죽은 토정 이지함은 지구의 반대쪽 유럽에서는 바야흐로 인본주의 문예부흥 르네상스가 일어나 완강한 교황의 지배체제와 농노제에 균열이 일어나고 주권재민의 각성이 일어나며 밖으로는 모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시작으로 인류의 시선과 활동범위가 신세계로 향하는 대항해시대가 열리던 시대입니다. 

그렇지만 이 변화의 시대에 우리 조선의 사정은 어떠했을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명장 이성계가 공양왕의 양위로 나라를 물려받아 새로이 국명을 바꾼 조선은 사실상 그 이성계를 지탱한 두 개의 기둥 유학자 삼봉 정도전의 이론적 바탕과 5남 방원의 무력으로 출발한 왕업인데 피 묻은 자신의 손으로 어렵게 개국한 조선을 부왕 이성계는 늦게 얻은 막내 7남 방석에게 물려주려는 것을 알고 쿠데타를 일으켜 먼저 개국과정에서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웠던 조선의 건국이념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부터 죽여 버리고 왕자의 난을 일으켜 결국은 사진이 태종이 된 핏자국과 광기에 가득 찬 왕국을 세운 것입니다.    

이어 가끔 기적적으로 세종과 성종 같은 성군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조선은 태종 이방원에 조카 단종을 죽인 세조에 어떻게 표현하기마저 힘든 최악의 왕 연산군에 이르기 까지 늘 살기가 등등하고 궁궐의 안뜰이 치정으로 어두운 엄청 음학(淫虐)한 왕조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상식으로만 판단한다면 미래를 보는 예견력에 사서삼경을 단번에 꿰는 명철함에 열흘을 굶어도 배고프지 않고 아무리 추워도 추위를 타지 않아 장가 간 첫날 추워서 발발 뜨는 세 아이를 보고 제 두루마기를 삼등분해 입혀주었다는 이 기상천외한 사나이, 키가 남들보다 머리 하나정도가 더 크고 희고 넓은 얼굴의 두 눈에 정기가 넘치며 맨머리에 솥을 이고 그 위에 갓도 아닌 벙거지를 쓴 기괴한 차림으로 길가에 서서 잠을 자다 사람들에게 부딪히면 이리저리 떠밀리며 열흘을 자다 머리 위의 솥을 벗어 밥을 해먹고 어디론가 훌쩍 사라지는 이런 기인은 그가 보통집안의 사람이라면 당장에 역적으로 몰려 죽었겠지만 목은 이색에 이어진 명문이요, 현재 영의정 이산해의 삼촌인 만큼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아 마포나루에 흙으로 집을 지어 기거 하고 통나무로 조그만 배를 지어 손으로 저어 제주도를 두 번이나 방문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토정 이지함은 이씨조선을 지탱한 유학의 가장 깊은 심장에서 태어나 마포나루에서 수많은 거지와 비렁뱅이가 굶고 얼어 죽어가는 민생(民生)을 목격하고 자신이 가진 온갖 괴력을 다 발휘하여 당시의 가난한 민중을 구하는데 힘쓴 사람, 오늘날로 치면 멀리 남 수단의 성자(聖者) 이태석신부와 같은 사람, 가수로 번 돈을 생활비 한 푼도 없어 탈탈 털어 기부를 하는 김장훈 같은 진정한 복지사업가에 기인이자 기부왕인 것입니다.(그러나 토정이 죽은 얼마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작은 키에 신출귀몰한 재주로 의병이 되어 싸우는 김덕령을 어깨죽찌 밑에 날개가 돋았다는 무고로 한 사람의 병사가 급한 판에 일당백의 장수를 참살했음) 그런 조선왕조에서 이지함 같은 선비가 살아남고 <토정비결>이 쓰여 졌다는 점은 참으로 기적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시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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