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프롤로그 - ‘메멘토 모리’의 뿌리 찾기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아나모피즘
#종교개혁의 상황을 빗댄 은유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무덤 파는 광대’(Grave-digger)의 인류를 향한 애도(哀悼)④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 땅의 환대와 손님
광대의 첫 노래 4행은 원문 소네트(이 연재 13회 말미)의 제1연을 차용했지만 4행 중 3행을 광대가 개작해 문맥이 통하지 않는다. 반어(反語)를 사용하는 습성이 밴 광대가 ‘늘이다’(prolong) 대신 ‘줄이다’(contract)를 읊조려 비문을 만들었다.(To contract, Oh! the time, for, ah! my behove). Oh!나 ah!는 시의 일부가 아니라 광대가 삽질을 하며 힘쓰는 신음 소리이다. 어느 문화권에서나 노래에는 맥이 통하지 않는 어휘(nonsence)가 있음을 고려하면 광대를 탓할 일은 아니다. 억지 번역이 가능하다. 필자가 13회에서 소개한 원문의 번역문 제 1연을 참고하시길 바란다.
광대1. ... 요한네 주막집에 가서 술이나 한 통 사오게.
[광대2 퇴장. 광대1은 땅을 파며 노래한다.]
젊은 시절 내 사랑할 때는
너무나 달콤하다 여겼지.
나 좋아라고, 오, 세월을, 아, 줄이려(늘이려) 하나,
오, 내 생각에, 번듯한 것 하나 없더라. (5.1.61-64)
First Clown. ... Go, get thee to Yaughan; fetch me a stout of liquor.
[Exit Sec. Clown. He digs and sings.]
In youth, when I did love, did love,
Methought it was very sweet,
To contract, Oh!, the time, for, Ah!, my behove,
Oh, methought, there was nothing meet.
세월을 벌어 오래 살든 세월을 줄이든 무덤에 들 때는 번듯한 것 내 놓을 것 없음을 광대가 노래한다. 광대가 부르는 두 번째 연은 원문 제3연 1-2번 째 행과, 원문 제 13연의 3번 째 행, 그리고 광대가 붙인 마지막 4행으로 이루어져 처연한 애가가 만들어졌다.
광대1. [노래 부른다.] 발소리 죽인 세월
손아귀에 날 움켜쥐고,
땅 밑으로 날 던져 넣었네.
내겐 청춘이 없었던 듯 여겼네. (5.1.70-73)
[해골을 하나 집어던진다.]
First Clown. [Sings.]
But age, with his stealing steps,
Hath claw'd me in his clutch,
And hath shipped me intil the land,
As if I had never been such.
[Throws up a skull.]
육신이 “땅 밑으로 쑤셔 박히고 청춘이 부정당하는” 이 모든 일이 무덤 파는 광대에게는 무엇인가? 세상의 제왕들이 연루된 간계와 시해, 그리고 애욕과 전쟁은 광대에게 또한 무엇이겠는가? 독자들은, 혹은 극중 장례행렬은 광대로부터 연민의 정(情)과 비분강개를 기대하는가? 우리는 답을 안다. 앞의 두 질문에는 “허망한 일상”과 “부질없는 짓”, 마지막 질문에는 “기대 난망”이 답이다. 덧붙여, 광대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자아내는 공포와 허무에 직업적으로 습득한 지식만으로 반응한다.
햄릿. 사람이 땅 속에 들어가서 썩기까지는 얼마나 걸리느냐?
광대1. 글쎄올시다. 죽기 전에 이미 썩어 있지 않다면-
요즘 같아서는 매독에 걸린 자가 하도 많아 미처 묻기도 전에 썩어 버리는
판국이라-한 팔구년은 걸립니다요. 무두장이라면 구년은 넉넉히 견딥죠.
햄릿. 어째서 무두장이가 더 오래 가느냐?
광대1. 그야, 나리, 무두장이 놈의 가죽은 직업이 직업인지라 무두질이 워낙
잘 되어 있어서 물을 막아주기 때문입죠. 물이란 시신을 썩히는 데는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습죠. (5.1.158-166)
광대의 이 무감각이 극에 비극성을 고양시키는 으뜸 요소로 작용하는 데는 햄릿의 역할이 크다. 햄릿이 도제가 되어 장인(匠人)인 광대의 정신세계를 답습한다. 햄릿이 “알렉산더가 진토로 화(化)했다. ...그 진토로 흙 반죽을 만들고, ...그 흙 반죽으로 맥주통 주둥이를 막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제왕 시저도 죽어 진흙으로 화하면, 구멍 메우는 바람막이가 된다.”(202-7)를 주문처럼 외는 것이다. 세 번째 노래는 원문 제 8연 그대로이다.
광대1. [노래 부른다.] 곡괭이와 삽 하나
수의 한 벌
땅속 흙집 만들어지리니,
뭇 손님에게 다 맞춤이라. (5.1.92~95)
First Clown. [Sings.]
A pikeax and a spade,
And eke a shrowdyng shete,
A house of claye for to be made
For such a gest most mete.
예술적 긴장의 이완과 대비의 효과를 위해 마련된 이 장면에서 무덤 파는 광대들이 드러내는 주검에 대한 비정한 무관심, 오필리아의 죽음이 자살인지의 여부를 판단하느라 벌이는 외경심 없는 논쟁, 시신과 함께하는 일상을 농담과 노래로 채우는 무감각은 슬픔과 연민의 정을 자아내는 원천이다. ‘무덤이라 일컫는 땅의 환대에 손님(gest)으로 누가 초대될 것인지를 우리는 안다’(Variorum, p.386). 얼마나 많은 재물과, 영광, 아름다움, 사랑, 고뇌, 상심, 그리고 상념이 흙구덩이에 파묻히고 있는지도 우리는 안다. 인류에 대한 애도는 인류애 없는 광대의 몫으로 남겨졌다.
● 햄릿의 선언과 고백
이 장(章)을 마무리하며 오필리어의 무덤에서 햄릿이 선언하는 느닷없는 정체성과 맥락이 닿지 않는 오필리어에 대한 사랑 고백의 의미를 살피고자 한다. 사랑은 진부한 주제이지만 이 소제목을 제대로 맺기 위해 살핌이 불가피하다. 이를 위해서는 햄릿과 오필리어 간의 사랑의 실체가 밝혀져야 하지만 텍스트에서 우리가 듣는 바는 햄릿이 3인칭으로 불리는 오필리어의 진술(1.3.99-100, 109-110, 2.1.75-98)과 햄릿이 오필리어에게 보낸 편지(2.2.109-123)가 전부이다. 햄릿의 직설화법은 없다.
오필리어. ... 아버님, 최근 그 분께서는 소녀에게 여러 번
애정을 고백했사옵니다. (1.3.99-100)
편지는 오필리어가 아버지 폴로니어스에게 자의로 전해 주었고 폴로니어스는 햄릿의 광기의 근원을 파헤치느라고 이 편지를 왕에게 대놓고 낭송한다.
폴로니어스. ... 아, 사랑하는 오필리어, 나는 시에 서툰 사람, 애타는 이 가슴에 품고
있는 번민, 토로할 재주는 없으나, 그대 향한 내 사랑은 한이 없나니, 아,
믿어주오. 한이 없는 내 사랑을, 안녕히.
지극히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이 육신에 생명이 있는 한
언제까지나 그대의 것이 되고자하는, 햄릿으로부터.
셰익스피어 극단이 『햄릿』 공연 시에 시대에 뒤쳐진 신파 연기로 일관해야 할 배우 한 명을 정했다면 그는 당연히 폴로니어스이다. 이 폴로니어스에게조차 이 편지의 문구는 ‘졸열하고, 서툴다.’(“이것은 졸열한 문귀. 서툰 표현이옵니다”)(2.2.110-1). 햄릿과 오필리어 간의 사랑의 실체를 살피기 위해서는 햄릿이 썼다고는 믿기 어려운 이 ‘졸열한’ 편지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햄릿』에 내재된 비극은 의외의 사건에서 비롯된다. 오필리어의 남성 가족들이 햄릿과 오필리어와의 관계에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할 것으로 확정해 버린 것이다. 오라비 레어티스는 누이 오필리어가 햄릿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도록 정치적 이유를 들어, 그리고 “정욕의 총탄과 위험”(1.3.34)으로부터 정조를 지키라고 설득한다.
레어티스. ...그 분의 지위로 보면 자신의 뜻대로 하실 수 없는 분,
그 분도 타고난 신분을 저버릴 수 없을 터인 즉,
비천한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 자신의 뜻대로 하실 수는
없을 것이다. ... 그러니 그분께서 너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더라도 그저 그 정도라고만 믿는 것이 현명한
처신일 것이다. ...
내 귀여운 누이동생아, 애정의 후방으로 물러나 정욕의 총탄이
닿을 위험이 없는 곳에 진을 치도록 해라. ...
심사숙고하는 것이 상책이다. 청춘의 혈기는 누가
가까이에서 유혹하지 않아도 억누르기 힘든 법이니라. (1.3. 16-44)
이에 합세해 오필리어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는 “공수표와 같은 그따위 고백을 실재로 지불될 수 있는 돈으로 여기지 말라. ... 사내의 맹세를 믿지 말라. ... 지금 이후로는 햄릿 왕자님에게 말을 걸거나 어울려 얘기도 하지 말라. ...명령이다.”(1.3.106-135) 라며 딸의 애정을 질식시키려 들고 오필리어는 이에 순종한다. 오필리어의 자아는 부자(父子)관계인 두 가부장들의 통념에 의해 한 치 오차도 없이 측량되고, 조종되고, 처분되었다. 자아실현이나 확인은 그 싹이 짓밟힐 위험에 처했다. 이후의 과정이 이러하다.
3막 1장에서 햄릿이 고뇌어린 “To be or not to be”독백을 뱉으며 자살대신 삶을 택한 직후 기도하는 오필리어를 발견한다. 왕과 폴로니어스가 햄릿의 광기의 진위를 밝히려 햄릿과 오필리어가 대화하는 장면을 엿듣기 위해 오필리어를 햄릿이 다니는 통로에 “풀어놓고” 둘은 휘장 뒤에 숨어 있는 상황이다. 오필리어를 본 순간 햄릿의 혼잣말은 “아름다운 오필리어! 숲속의 요정이여, 그대의 기도 가운데 내 죄의 용서도 빌어주오.”(88-9) 였다. 직전의 장면에서 염탐꾼 로젠크란츠와 길던스턴에게 인간이라는 “만물의 영장”(paragon of animals)은 “먼지의 정수”(quintessence of dust)(2.2.307-8)에 다름 아닌 것으로, 그리고 “인간은 날 기쁘게 하지 못한다”(2.2.309)고 선언했지만 “To be...”독백으로 정서가 고양되어 있던 햄릿이었다. 이 햄릿에게 오필리어가 지난 날 햄릿에게 받았던 선물을 돌려주려 한다. 그녀가 가족 가부장들에게 조종당한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오필리어가 조종당한 것을 직감한 햄릿이 그녀가 ‘미끼’로 던져진 것과 휘장 뒤의 염탐을 동시에 직감한다. 이 직감으로 인해 햄릿이 그녀의 부자(父子)보다 더 냉혹한 가부장으로 돌변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치 않다. 그 속도만큼 오필리어의 운명도 급전직하로 파국을 맞는다. 실성을 가장한 채 그는 그녀에게 선물을 준 일도, 그녀를 사랑한 일도, 그녀에게 진실했던 순간도 없었노라 응수한다.
햄릿. 그대는 나를 믿지 말았어야 했소. 낡은 나무 등걸에
미덕이란 가지를 접붙여도 그 본 바탕은 버릴 수 없는 일.
나는 그대를 사랑하지 않았소. (3.1.117-9)
오필리어의 자아실현의 싹을 짓밟는 햄릿의 언행은 이후 계속된다. 여성의 ‘아름다움의 힘’(power of beauty)과 ‘정절’(honesty)은 양립불가능임을 선언한 햄릿이 “아름다움의 힘이 정절로 하여금 그 본성을 버리게 하고, 음란한 여자로 타락하게 만드는 것은 쉬운 일”(112-3)임을 오필리어에게 주지시킨다. 어머니 거트루드의 근친 재혼으로 인해 햄릿의 내부에 형성된 여성에 대한 혐오가 순전한 오필리어에게 향하는 것이다. 이어 햄릿의 “수녀원” 발언이 이어진다.
햄릿. 그대가 결혼한다면, 그대에게 결혼 선물 대신 이런
악담을 줄 터이니, 그대가 얼음처럼 정숙하고, 눈처럼 순결해도
그대는 세상의 구설을 면치 못할 것이오. 수녀원으로 가시오.
잘 있으시오. 결혼을 해야겠거든, 바보와 하시오.
영리한 자들은 자신이 머리에 뿔난 괴물이 되리라는 걸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이오. 수녀원으로 가시오.
...
여자들은 ... 자신들의 음탕한 짓을 무지의 탓으로 돌리지.
... 그 덕에 나는 미쳤소. 감히 말하건대 더 이상의 결혼은 없다.
이미 결혼한 자들은―한 명만 빼고―살려 주겠지만,
나머지는 독신으로 남아야 될 것이다. 수녀원으로 가시오. [햄릿 퇴장.](3.1.136-151)
... I say we will have no more marriage. Those
that are married already-all but one-shall live;
the rest shall keep as they are. To a nunnery, go. [exit.](3.1.149-151)
16-7세기 셰익스피어 극의 관객들 중 누구도 “수녀원”의 상스러운 두 번째 의미가 ‘매음굴’임을 놓치지 않았다. “머리에 뿔난 괴물”은 부정한 아내의 남편, 즉 ‘오쟁이진 남편’(cuckold)을 일컫는다. 당대의 희극 중 ‘오쟁이진 남편’ 역의 배우는 머리에 뿔이 돋은 괴물의 모습으로 무대에 등장 했다. 오필리어의 자아실현은 햄릿의 이 혐오감으로 인해 종언을 고했다. 햄릿이 죽이고자 하는 “한 명”(all but one)이 선왕을 독살한 현왕임을 휘장 뒤에 숨어 있는 현왕 그 자신은 안다. 햄릿이 퇴장한 후 휘장에서 나온 왕에게 햄릿은 ‘왕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지닌 반역자’로 각인되었다. 즉각적으로 왕은 햄릿을 처단할 방법을 생각해 내고 다음 장에서 이 계략이 실천된다. 왕이 퇴장하며 마지막으로 뱉는, “지체 높은 자의 광기를 결코 방관해서는 아니 된다.”(Madness in great ones must not unwatch’d go.)(3.1.190)는 경고는 ‘지체 높은 자의 광기는 튜더 왕조의 적(敵)’(“madness” was the Tudor state’s enemy)(Karin S. Coddon)임을 에둘러 일컬은 완곡어이다. 튜더왕조와 스튜어트왕조에 걸쳐 ‘지체 높은 자의 광기’는 다름 아닌 ‘왕위를 찬탈하려는 야망’을 일컫는 경구였다. 햄릿이 초연되고 12-3년 후 웹스터(John Webster)가 자신의 복수극 『말피의 공작 부인』(The Duchess of Malfi, 1612-1613)에서 이 시대의 관용어를 축약해 표현했다. “야망은, 부인, 위대한 자의 광기이지요.”(“Ambition, madam, is a great man’s madness.”)(1.2.125)
또 한 명의 가부장 햄릿이 오필리어의 질식당한 자아에 숨길 열어주기를 거부했다. 그가 복수를 명분으로 실성을 가장하면서 오필리어와 이 거짓 광기의 비밀을 공유하지 않은 것이다. 이 인색함으로 햄릿은 오필리어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자신은 반역자의 신세로 영락했다. 거짓 광기를 참이라고 믿는 오필리어가 온전한 이성으로 뱉은 최후의 레토릭이 이러하다.
오필리어. ...세상의 여인들 가운데 가장 비참한 처지에 빠진 나,
한 때는 그 분의 맹세라는 달콤한 꿀을 맛보기도 했건만,
이제는 감미로운 종소리 같았던 그 고귀하고 당당하던
이성의 조화는 흐트러져서 시끄러운 잡음만이 요란하고,
꽃다운 젊은 시절의 그 비길 데 없던 그 용모, 그 자태도
광기로 인하여 시들어 버렸구나. 아 슬프다.
옛 모습을 보았던 이 눈으로 현재의 이 모습을 보다니. (3.1.157-163)
둘의 사랑의 실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장면은 이것으로 끝이다. 시간이 지나 관객들이 실성한 오필리어를 목격하는 장면은 4막 5장이다. 그 사이 햄릿과 오필리어는 ‘극중극’의 장면에서 마지막으로 조우하지만 햄릿은 오필리어에게 더 심한 광증을 연기했다. 이제는 지금까지의 단서들로 햄릿의 사랑 고백의 진의를 살필 때이다.
● “오라비 사만명의 사랑의 합을 능가하는 사랑”
다시 5막 1장이다. 햄릿과 광대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장례행렬이 등장하고 장례절차가 이어진다. 광대가 파놓은 무덤구덩이에 오필리어의 관이 안치되자 레어티스가 구덩이에 뛰어 들어 그 관을 부여잡고 오열하며 햄릿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다. 숨어서 이를 보고 듣던 햄릿이 은신처에서 벗어나 레어티스와 맞선다. 아래에 다소 길게 인용되는 부분은 독자들이 향후 발휘할 상상력의 소재(素材)이기에 인내하시기 바란다.
레어티스. 아, 삼중의 재앙이
수십 배가 되어 그 저주받을 놈의 머리에 떨어져라.
그 놈의 그 흉악한 행위가 너에게서 그 영민한 정신을
빼앗아 가버렸으니―잠깐 흙 끼얹기를 멈춰라.
저 애를 내 품안에 한 번 더 안을 때까지. [무덤 안으로 뛰어 든다.]
이제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위에 흙을 퍼부어 같이 묻어라.
...
햄릿. [앞으로 나오면서] 도대체 어떤 인간이,
그 애통해 하는 소리로 천상의 유랑하는 별들에게
마술을 걸어, 마치 경외감으로 얼어붙은 청중들처럼,
멈춰 서게 할 만치 그렇게 요란을 떠는가? 나로 말하자면,
덴마크의 군주 햄릿이다. [레어티스를 따라 무덤 속으로 뛰어든다.]
레어티스. [그를 움켜잡으며] 이 악마가 잡아갈 놈!
햄릿. 그 따위 욕설은 거두어라.
내 목을 잡고 있는 네 놈의 손이나 놓아라.
비록 내 성미가 급하거나 격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위험한 기질이 숨어 있으니 잘 헤아려서
조심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이 손 치워라.
국왕. 저들을 뜯어 말려라.
...
[시종들이 그들을 떼어 놓는다. 둘은 무덤 밖으로 나온다.]
햄릿. 아니, 이 문제에 관해서라면 저 자와 싸울 테다.
더 이상 두 눈을 뜨지 못할 때까지.
왕비. 오 아들아, 무슨 문제 말이냐?
햄릿. 나는 오필리어를 사랑했다. 사만명의 오라비가 그들의
사랑을 모조리 합쳐 덤벼도 내 사랑에는 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 여자를 위해 넌 무얼 하겠느냐?
국왕. 오, 저 자는 미쳤다. 레어티스.
왕비. 제발 그 애와 대적하지 말아요.
햄릿. 빌어먹을, 무얼 할 것인지 말하라.
울겠느냐? 싸우겠느냐? 단식을 하겠느냐? 옷이라도 찢을 테냐?
식초를 마실테냐? 아니면 악어를 잡아 먹을테냐?
나라면 그렇게 할 테다. 이곳에 통곡하려고,
그녀 무덤 속으로 뛰어들어 날 면목 없이 만들려 왔느냐?
오필리어와 함께 산 채로 묻히고 싶다면 나도 그렇게 하겠다...(5.1.264-274)
극에 결코 드러나지 않은 햄릿의 내면과 처한 형편을 잠깐 살피자. 햄릿은 사실상 거대한 복수의 제단 위에 사랑과 오필리어를 희생 제물로 바쳤다. 그 치명적 희생에도 불구하고 복수는 극이 끝나기 직전까지 한 치도 진전되지 않았다. 무모한 선택을 한 것이다. 그가 '메멘토 모리'에 경도된 것도 이 진퇴양난에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부왕이 시해 당했음을 인지한 이후 햄릿은 오필리어와의 사랑을 단념했다. 의도치 않게 오필리어의 아버지를 죽이고 난 이후 사랑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가슴 속 연민의 끈들을 다 끊어내 그로인해 오필리어를 망가뜨리고 그녀의 이성을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이 희생의 대가로 햄릿이 얻은 것은 통한의 쓰라림이다. 이 쓰라림을 숨기기 위해 햄릿은 실성을 가장했고 크로디어스는 이 실성을 반역으로 확신한다. 햄릿이 단두대의 제물로 전락한 것이다. 크로디어스가 꾸민 영국으로의 항해가 순조롭게 이행되었으면 햄릿은 이 반역의 대가로 이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현왕(現王)의 면전에서 햄릿이 뱉은 선언, “나로 말하자면, 덴마크의 군주 햄릿이다.”(This is I, Hamlet the Dane.)(250)는 여지없는 반역의 선언이다. 햄릿이 구사한 어휘 ‘the Dane’은 단순히 ‘덴마크인’을 뜻하지 않는다. 왕권에 근접한 인물들이 이 어휘를 뱉을 때는 전통적으로 ‘왕’이나 군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뒤이어 “오, 저 자는 미쳤다.”(O, he is mad.)는 왕의 진단은 햄릿의 선언을 반역으로 확인하는 어법이다. 햄릿은 미치지 않았고 더 이상 실성을 연기할 명분도 없는 상태이다. 앞서 간략히 적은 바, 이성(reason)의 상실, 즉 ‘실성’(mad)을 반역(treason)으로 몰았던 튜더왕조 통치 이념의 잔재가 『햄릿』에 기록된 것이다.
햄릿의 이 정체성 선언(This is I, Hamlet the Dane.)에 대한 마샬(Frank A. Marshall)의 추론이 새롭다. 그는 이 선언에 “나는 자네의 아버지를 죽이고 누이를 실성하게 만든 것으로 자네가 저주를 퍼붓고 있는 햄릿이다. 내가 그 일을 자행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무심결에 행한 일들이다. 나를 저주하고 자네 뜻대로 날 다루어도 내가 감내하겠지만 자네의 슬픔이 나의 슬픔보다 큰 것인 체하는 위선을 내가 감내하지는 않을 것”임이 함축되었다고 믿는다(Frank A. Marshall. A Study of Hamlet. p. 97). 이 추론은 필자가 햄릿의 고백의 진위를 밝히는데 요긴한 실마리를 제공했다.
● 인류를 향한 진혼곡
햄릿의 고백에서 진실 혹은 ‘진실다움’(verisimilitude)을 찾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우리가 아는 한 햄릿은 오필리어에게 “오라비 사만명의 사랑의 합을 능가하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다. 부왕의 부음(訃音)을 듣지 않았으면 비텐베르크를 배회하느라 오필리어를 잊은 채 덴마크로 돌아올 기약조차 할 수 없었을 햄릿이다. 앞에서 언급한 햄릿의 편지는 떠버리 폴로니어스가 신파 연기의 발성법으로 낭독하기에 적절한 수준으로 쓰였다. 수수께끼이지만, 필자는 셰익스피어가 이 편지에 햄릿의 진정을 담은 것이 아니라 런던 관객들이 한바탕 실소하도록 웃음거리를 담았으리라 믿는다. 셰익스피어의 수많은 소네트 그 어느 구절에도 이 편지의 조악(粗惡)함을 흉내 낸 구절이 없다는 판단에서 그러하다. 달리 말해 이 편지로 햄릿의 정서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햄릿이 뱉은 이 고백의 ‘진실다움’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독자들은 무덤 주변에서 햄릿이 보고 뱉은 사물과 말들을 상기해야 한다. 또한 극의 앞부분에서 햄릿이 보인 정서를 살펴야 한다. 햄릿은 덴마크 궁정으로부터, 왕으로부터,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심지어 자신에게 지워진 복수자의 역할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려고 했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햄릿은 덴마크 세계에 존재하기를 (“to be”) 거부했다. 그러나 사지(死地)인 영국으로의 항해로 부터 살아 돌아 온 그는 변했다. 주인공의 변화는 고전 비극이 견지했던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는 신의 섭리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알렉산더 대왕의 위대한 시신이 흙으로 변해 술통 마개로 쓰이는 현재를 숙고했다. 당대 최고의 재담꾼 요릭의 해골에서 턱뼈가 떨어져 나간 괴이함을 목격했다. 수많은 토지관계 서류를 꾸몄던 법률가의 해골을 광대가 두들기고 팽개치는 장면도 목격했다. 그 해골을 집어 살피기도 했다. 햄릿이 타인의 수많은 주검을 처음 목격한 것이다. 정치적 의도에 덧붙여 정체성의 선언은 햄릿이 덴마크의 땅을 밟고 살겠다(“to be”)는 뜻을 천명한 것이다.
묘지는 인간의 격렬한 열정의 분출을 용인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온전한 자기 통제력을 지닌 자의 감정적 일탈도 너그러이 받아들인다. 햄릿은 사랑할 대상을 파멸로 몰아갔고 그 대상은 이제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햄릿에게 ‘오라비’ 레어티스의 오필리어에 대한 사랑 토로는 ‘위선’이다. 햄릿에게는 오필리어에 대한 “오라비 사만명의 사랑의 합을 능가하는 사랑” 고백 외에 레어티스의 위선을 질타할 다른 수단이 없다. 독자들이 수긍하지 않을 것이지만, ‘묘지이기에’ 이 고백이 ‘진실’(다움)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무릇 온 세상은 무대이고’(All the world is a stage) 인류는 무대 위에 오르고 내릴 때를 기다리는 배우들이다. 배우들은 무수한 아름다움, 사랑, 고뇌, 상심, 그리고 상념이 흙구덩이에 파묻히는 광경을 매 순간 목격하고 있다. 광대가 이 슬픈 배우들에게 진혼곡을 부른다. 이 진혼곡이 오직 오필리어의 혼만 위로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다. 극에서 광대가 아직 부르지 않은 애가가 11연이나 남아 있다.
<전 한일장신대 교수 / 영문학 박사(셰익스피어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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