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룡 교수의 셰익스피어 이야기] 『햄릿』(12) ‘무덤 파는 광대’(Grave-digger)의 인류를 향한 애도(哀悼)②

김해룡 승인 2020.09.06 18:10 | 최종 수정 2020.10.10 16:14 의견 0

목차
#프롤로그 - ‘메멘토 모리’의 뿌리 찾기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아나모피즘
#종교개혁의 상황을 빗댄 은유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무덤 파는 광대’(Grave-digger)의 인류를 향한 애도(哀悼)㊥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오필리어 [Alexandre Cabanel / public domain]

이제 오필리어의 무덤을 파며 두 명의 광대가 나누는 토론을 살필 때다. 그레바니에르(Bernard Grebanier)는 이 토론이 런던의 하이드 파크(Hyde Park)나 뉴욕의 유니언 스퀘어(Union Square) 변두리에서 언제든지 들을 수 있는 수준의 무지와 허세로 가득 차 있다고 진단한다. 광장에서나 무대에서 무지와 허세를 자랑하는 자들은 광대이다. 광대들은 필히 청중들을 각성시킨다. 광대로 인해 청중들이 각자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무지와 허세를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광대들의 무지와 허세는 청중/관객들에게 삶의 의미를 묻는 수단이고 각성된 관객은 세상이 무대/광장에 녹아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11회에서 『햄릿』이 공연되기 50년 전의 역사를 살폈다. 그로 인해 관객들은 두 광대의 대사에 과거의 잊힌 사건들이 그 흔적을 남겼음을 알게 될 것이다. 무죄한 제인 그레이의 처형에서 비롯된 제임스 헤일즈의 자살, 그 자살의 실체를 가름하기 위한 법정공방, 자살에 대한 당대의 엄혹한 시각, 그 공방에서 펼쳐진 언어유희 등이 이 무덤장면에 배어있다.

이 인물 둘의 호칭은 원문 버전에 따라 ‘광대들’(Clowns), ‘무덤 파는 자’(Grave-diggers), 혹은 ‘교회지기’(sexton) 등 다양하다. 이 글에서는 이후 편의상 광대라 칭한다. 셰익스피어 극에 등장하는 광대는 대부분의 경우 이 장면에서처럼 둘이서 짝을 이룬다. 한 명은 유식을 가장하고 상대역은 좀 더 우둔하다. 이 묘지 장면의 광대는 지혜와 재치로 무장한 『헨리 5세』(Henry Ⅴ)의 ‘폴스타프’(Falstaff)나, 『12夜』(Twelfth Night)의 ‘패스테’(Feste), 그리고 『리어 왕』(King Lear)의 ‘바보’(Fool)와는 구별된다. 이 셋은 언어 구사의 천재들이다. 반면, 이 광대 둘은 놀라울 정도로 어휘의 뜻을 혼동하고 있다. 그 실상의 일단이 이러하다.

[5막 1장]

엘시노어. 교회 묘지, 편백나무 몇 그루, 묘지 입구.
광대 둘이 삽과 곡괭이를 가지고 등장.

광대 1. 이 여자를 기독교적으로 장사지낼 것이란 말이지, 여자가 작정하고 구원의 길을 찾아 갔는데도?
광대 2. 그렇다고 했잖으냐. 그러니 교회 벽 따라 구덩이나 어서 파게. 검시관 나리가 자초지종을 얻어 듣고서는 기독교적 매장이라 판결을 내렸다 이 말씀이야.
광대 1. 어찌 그럴 수가 있냐, 그 여자가 정당방위로 물에 빠져 죽지 않은 이상 말이야?
광대 2. 그만, 그렇게 정해져 버렸다니까.
광대 1. 제 몸뚱이에 공격을 가한 거야, 분명해. 내 말의 요점은 바로 이거야. 만약에 내가 작정을 하고서 물에 빠져 죽으면, 그건 어떤 행동인 것인데, 이 행동이라는 것은 세 가지 가닥이 있단 말씀이지— 그건 하는 것, 해 치우는 것, 저지르는 것이란 말씀이야. 그런 까닭에, 그 여자는 자신을 물에 빠뜨려 죽이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야.
광대 2. 아니, 들어 봐, 이 묘구덩이나 파는 놈아—
광대 1. 내 말 먼저 들어 보라니까. 여기 물이 있어—좋았어. 여긴 사람이 서 있고—좋았어. 만약 이 사람이 물을 향해 가서 스스로 몸을 던져 저승으로 간다면, 그건, 싫던 좋던 간에, 그 짓을 한 것은 이 사람인 것이지, 그걸 명심하게. 그러나 만약 그 물이 이 사람에게 가서 이 사람을 덮쳐 죽인다면, 이 사람은 자살이 아닌 것이지. 그러니까, 자신의 죽음에 죄가 없는 이 사람은 자신의 명 단축을 하지 않은 거지.
광대 2. 법에 그렇게 되어 있다고?
광대 1. 당연하지, 그렇고 말구. 검시법이란 말씀이지. (5.1.1-20)

무덤 파는 광대 [public domain]

Clown 1. Is she to be buried in Christian burial that wilfully seeks her own salvation?
Clown 2. I tell thee she is: and therefore make her grave straight: the crowner hath sat on her, and finds it Christian burial.
Clown 1. How can that be, unless she drowned herself in her own defence?
Clown 2. Why, 'tis found so.
Clown 1. It must be se offendendo; it cannot be else. For here lies the point: if I drown myself wittingly, it argues an act: and an act hath three branches: it is, to act, to do, to perform: argal, she drowned herself wittingly.
Clown 2. Nay, but hear you, goodman delver,--
Clown 1. Give me leave. Here lies the water; good: here stands the man; good; if the man go to this water, and drown himself, it is, will he, nill he, he goes,--mark you that; but if the water come to him and drown him, he drowns not himself: argal(ergo), he that is not guilty of his own death shortens not his own life.
Clown 2. But is this law?
Clown 1. Ay, marry, is't; crowner's quest law.

등장인물이 어휘의 뜻을 혼동하거나 우스꽝스럽게 오용(誤用, malapropism)하는 경우, 그 부분의 우리 말 번역은 난제이다. 혼동/오용된 그대로 옮기든지, 아니면 구사하는 어휘와는 상관없이 그 인물이 의도하는 바대로 옮기든지 선택적일 수밖에 없다. 어느 쪽을 택하든지 문맥이 통하지 않아 길고 지루한 각주는 필수적이다. 이 무덤장면이 이 혼동/오용으로 가득 차 있다. 부디 독자들이 인내심을 발휘하기를 바란다. 그리하면 기존의 우리말 번역서들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블랙홀 같은 이 장면이 보석 같은 장면으로 바뀔 것이다.

● “영혼의 구원을 찾다”(seeks her own salvation)

원문 2행의 “seeks her own salvation”의 직역은 “(천국에서) 영혼의 구원을 찾다”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자살하다’(commit suicide)의 완곡어구(euphemism)이다. 우리 말 관습에 ‘죽다’를 ‘돌아가셨다’ 혹은 ‘영면에 드셨다’로 칭하는 것과 동일한 어법이다. 이 무덤의 임자인 오필리어가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팍노트》(sparknotes, 셰익스피어 극들을 현대어로 옮긴 버전)의 현대 영어대로 “여자가 자살을 했는데도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겠다고?”(Are they really going to give her a Christian burial after she killed herself?)로 옮겨도 된다. 그러나 셰익스피어 극에 등장하는 광대의 주된 임무를 상기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정련되고 복잡한 어휘를 이해 못하거나 임의로 해석해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는 일이 광대의 역할이다. 광대1이 이 역할을 능히 해내고 있다. 그는 완곡 어구를 글자대로(축자적으로) 구사하는 동안 ‘구원’을 ‘멸망’으로 이해하는 무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객석에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다. 이 축자적 번역의 불가피성에는 더 근원적 이유가 있다.

광대가 완곡어구를 구사하는 것은, 그 구절의 이해 여부와는 무관하게, 오필리어의 시신에 예의를 갖춘 것으로 비쳐진다. '의도적으로' 천국에서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구하는 것(wilfully seeks her own salvation)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그러함에도 이 광대는 오필리어의 시신을 기독교적 격식에 따라 매장하는 것에 반대하며 분노하기도 한다. 이 광대는 오필리어 가문의 사회적 지위로 인해 검시관이 부당하게 영향을 받았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만약 이 여자가 신사양반집 딸이 아니었더라면, 기독교식 장례식은 꿈도 꾸지 못할 판인데. (5.1.24-25)

그는 검시관이 오필리어의 자살을 부당하게 자연사로 인정해 기독교식 장례를 허용했다고 믿는 것이다. 그의 판단에 오필리어의 장례는 기독교적으로 치를 수 없다. 결국 이 판단(‘오필리어의 장례는 기독교적으로 치를 수 없다’는)과 “여자가 구원의 길을 찾아 갔다”는 완곡어법이 충돌한다. ‘광대의 어법답게’ 조리에 닿지 않는 것이다. 어휘 사용에 교란이 생겼기에 그러하다. 주석가들은 『햄릿』에 주석을 달기 시작할 때부터 이 광대가 어휘를 오용해 “seeks her own damnation”(자신의 멸망을 쫓다)이라고 뱉을 것을 “seeks her own salvation”(구원의 길을 찾아 가다)으로 뱉었다고 기록했다. ‘멸망’(damnation, destruction)이라는 용어를 구사할 자리에 ‘구원’(salvation)을 뱉어 오용이 발생한 것이다.

이 각주에 의존하면 광대1에게 ‘자살하다’는 “seeks her own salvation”이 아니고 “seeks her own damnation”으로 인각되어 있다. 따라서 광대1은 텍스트대로 오필리어가 ‘구원의 길을 찾아 갔다.’라고 뱉으면서 “제멋대로(작정하고) ‘멸망’의 길을 찾아 나섰다.”는 의미를 억양과 표정으로 광대2에게 전달하고, 광대2는 광대1이 의미하는 바대로 받아들여 그에 따라 응대한다. 광대2도 ‘구원’(salvation)을 ‘멸망’(damnation)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얼간이, 바보’(simpleton)와 거의 동의어인 ‘광대’(clown)들에게 ‘구원’ 혹은 ‘멸망’이라는 어휘는 과한 어휘이다. 필자가 보잘 것 없는 경력이나마 연극 연출의 경험자로서 감히 말하건대, 이 장면을 연기하며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낼 수 있는 배우는 세계연극사에 이름을 남길 만하다. 휘장 뒤에서 대화를 엿듣다 햄릿의 칼에 찔려 죽은 떠버리 연극 전문가 폴로니어스의 어투를 빌면 그 연기는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입술로 ‘구원’을 뱉으며 ‘멸망’을 전하다니!

이 무덤장면은 관객들이 두 시간 이상 지속된 침울한 비극적 분위기에서 잠시 벗어나도록 마련된 ‘막간 희극’ 혹은 ‘희극적 완화’(comic relief)의 장면이다. 지친 관객들이 웃도록 해야 한다. 바리오럼(Variorum ed.) 판의 각주에 의하면 ‘광대 1이 구덩이 파기를 시작하며 껴입고 있던 상의(조끼, waistcoat) 12벌을 힘겹게 벗는 것이 최근까지도 관례였고, 이는 셰익스피어의 시대 배우들로부터 전승되어 온 무대 전통이었다. 광대의 이 옷 벗는 장면에 관객들은 항상 박장대소했다.’ 난해한 대사로 웃음을 자아내기는 난망이었을 것이다. 대신 12벌의 상의를 벗는 우스꽝스러운 연기는 웃음을 자아내기에 훨씬 용이하다. 동시대에 공연되었던 『말피의 공작부인』(Duchess of Malfi)에서도 박사(The Doctor)는 관객의 웃음을 유발할 목적으로 네 벌의 외투(cloak)를 벗는다.

왕과 여왕 앞에서의 오필리어 [Benjamin West, 1792.  public domain]

● “make her grave straight”

원문 4행의 “straight”는 ‘즉시’, ‘지체 없이’(forthwith)의 뜻으로 가장 널리 쓰인다. 따라서 “make her grave straight”는 “그 여자 묘나 어서 파게”로 번역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각주(Johnson)가 있다. 이 각주에 의하면 중세 영국 교회들은 교회 머리를 동쪽에 두고 동서의 방향으로 지어졌고 교회 공동묘지(church yard)의 무덤들도 교회와 평행으로 머리를 동쪽으로 향해 조성되었다. 자살자들의 시신은 교회 북쪽의 성별(聖別)되지 않은 땅(unconsecrated ground)에 남북 방향으로 묻혔다. 이 관례에 따라 “make her grave straight”는 자살하지 않은 그녀의 묘를 남북 방향, 즉 가로 지르는(athwart) 방향이 아닌, “교회 벽을 따라” 평행의 방향으로 쓰라는 의미이다. 반론도 있다. 마론(Malone)은 셰익스피어의 시대에 교회의 방향을 따라 정돈된 교회 묘지는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매력적인 주석이다.

광대의 번역문 5~6행 (“어찌 그럴 수가 있냐, 그 여자가 정당방위로 물에 빠져 죽지 않은 이상 말이야?”)은 의미가 통하는 듯하다. 오필리어가 “자기방어로”(in her own defence) 익사하지 않은 한 기독교식 장례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행은 비문(非文)이다. 이 광대는 자기방어를 위한 살인은 ‘정당 살인’(justifiable homicide)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극소수의 예외를 인정하더라도) 자기방어로 자살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광대는 모른다. 자기(정당)방어는 살인의 경우에만 인정되는 것이다. 광대가 희극적 효과를 위해 그리고 무지로 인해 정당방위의 법적 효능을 살인에서 자살까지 확대한 것이다. 불행히도 웃음을 자아내기에는 너무 미묘한 비문이다.

● ‘자신에 가한 공격’-se offendendo

광대1의 다음 대사는 긴 해설을 필요로 한다. 광대가 법률용어를 구사했다. 전통적으로 우둔한 인물로 그려진 광대가 정련된 라틴어 법률 용어 se offendendo를 구사하는 것만으로도 유머였다. “제 몸뚱이에 공격을 가한 거야, 분명해.”(It must be se offendendo; it cannot be else.)에 동원된 se offendendo는 ‘자신에 가한 공격[해악]’(in self-offense)의 의미이다. 튜더왕조와 스튜어트 왕조 초기에 검시관들은 이 글 11회에 언급된 자살한 제임스 헤일즈의 경우에서 보듯 자살을 중범죄(felony), 혹은 se offendendo로 단죄했다. 자살자는 가해자이지 희생자가 아니었다(perpetrators, not victims). 자살은 용서받을 수 없는 ‘절망적인 죄’(desperate sin)였고 “하나님과, 왕과 자연에 맞선 대적(對敵)”(it is an offense against God, against the king, and against Nature.)행위로 규정되었다. 또한 자살은 ‘살인의 가증스러운 형태’(hideous form of murder)였고, 자살자는 자신에게 가장 사악한 행위를 가한 범죄자였다. 중세인들의 뇌리에 자살자는 바로 살인자였다.

검시관에 의해 자살로 판결될 경우, 그 자살자의 유가족은 잔인한 처벌을 받았다. 유가족에게 남은 동산(動産), 즉 농기구, 연장, 현금, 이들 소유의 채권은 물론 임차지조차 왕실, 혹은 왕실 특허권 소유자에게 몰수 되었다. 이 자살자에게 기독교적 장례가 허용될 리 없었다. 검시가 끝난 날 밤에 교회지기나 그의 조력자들이 시신을 갈림길(crossroad)에 끌고 가 파놓은 구덩이에 발가벗긴 채 던져 넣었다. 이들은 십자가 대신 나무 막대기를 시신의 몸뚱이에 박아 넣고는 비로소 구덩이를 흙으로 채웠다. 기도가 낭송되지도 않았고 성직자는 참여하지 않았다. (Michael MacDonald and Terence R. Murphy, Sleepless Souls, Clarendon, Oxford, 1990. p.15). 오필리어의 시신은 왕의 배려가 없었으면 상기한 바의 흉측한 만행을 당할 뻔 했다. 그러나 여전히 자살로 의심받는 오필리어의 장례는 그녀의 오빠인 레어티스로서는 참을 수 없을 만치 그 절차가 간소화되었다. 다음 회에 텍스트를 바탕으로 이 부분을 부언할 것이다.

자살한 제임스 해일즈의 미망인이 남편에게 선고된 ‘자살자’라는 오명을 벗기려고 변호사 월쉬(Walsh)를 선임한다. 이미 선고된 판결을 뒤집기 위한 일환으로 월쉬는 자살의 과정을 셋으로 구분했다.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용한 것인지를 심사숙고하는 ‘상상’(imagination)의 단계, 자신을 파괴하기로 마음속으로 결정하는 ‘결심’(resolution)의 단계, 그리고 결심한 바를 결행하는 ‘완료’(perfection)의 단계이다. 한 행위가 이 세 과정으로 구성되었다는 주장이다. 덧붙여, ‘완료’를 ‘시작’과 ‘끝’으로 나누어 산 자의 자살행위(‘시작’)로 인해 죽은 자가 피해를 당한다(‘끝’)는 논리를 폈다. 따라서 죽은 자는 자살행위에서 무죄라고 주장했다. 언어유희이며 기만적인 세분화이다. ‘차이 없는 구분’이다.

● 패러디-‘상상’, ‘결심’, ‘완료’는 한통속

우둔한 광대가 변호사 월쉬의 이 세분화를 영국무대에 처음으로 소환했다. ‘상상’, ‘결심’ 그리고 ‘완료’라는 정련된 어휘를 “to act, to do, to perform”(하는 것, 해 치우는 것, 저지르는 것)으로 대체했다. ‘상상’, ‘결심’ 그리고 ‘완료’는 기만적인 세분화이고, 광대는 의미의 차이 없는 동의어(“to act, to do, to perform”)를 구사해 이 세분화를 풍자하는 것이다. ‘구원’을 입으로 뱉으며 ‘멸망’을 전달하는 광대이기에 이 장면에서도 광대는 의미의 차이 없는 동의어 “to act, to do, to perform”이 현저한 차이를 지닌 어휘들인 것으로 뱉었을 것이다. 제임스 헤일즈의 자살로 인한 재판은 1562년 종결되었고 햄릿은 1600년 초부터 공연되었다. 무릇 셰익스피어 극의 광대는 말실수나 패러디로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역이다. 『햄릿』 초연 38년 전의 영국 민사법정에서 행해졌던 기만적인 세분화가 무덤 파는 광대로 인해 패러디의 소재가 되었다.

se offendendo로 시작되어 이어지는 광대의 대사는 겉말과 속뜻이 일치한다. 광대가 실수로 의미가 통하는 ‘정련된’ 라틴어 어휘를 구사한 것이다. 당연히 광대가 이 라틴어를 이해할 리 없다. 스팍노트는 “she drowned herself wittingly.”(고의로 물에 빠져 죽은 거야.)를 “she must have known she was drowning herself.”(그 여자는 자신을 물에 빠뜨려 죽이고 있다는 걸 분명 알고 있었어.)로 의역했다. 부사 ‘wittingly’를 광의로 해석해 불분명한 광대의 넋두리에 의미가 통하게 한 것이다. 이 광의의 해석에 필자가 큰 빚을 졌음을 밝힌다. 원문대로 “고의로 물에 빠져 죽은 거야.”보다 스팍노트의 광의의 해석이 한결 명료하다. “자신을 물에 빠뜨려 죽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 이는 자신에 대한 공격, 즉 ‘se offendendo’이다. 겉말과 속뜻이 일치한 것이다.

Ophelia [1894 / public domain]

주석가들은 공히 광대의 대사가 논리 정연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즉, se offendendo 대신 se defendendo(자기 방어)를 써서 비문(非文)을 만드는 것이 광대의 역할에 부합한다고 믿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se defendendo는 정당 살인의 경우에만 선고될 수 있는 평결이기 때문에 광대의 이 대사를 ‘se defendendo’로 시작하면 비문이다. 혹은 주석가들은 광대가 직전 대사에서 ‘자기방어로’(in her own defence)를 구사했기에 ‘se defendendo’를 뱉어 자신의 주장을 강조했어야 온당한 흐름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어느 경우이던 비문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모든 영문 판본의 각주에는 필자의 추론과 유사한 설명이 없이 ‘광대가 se defendendo라고 할 자리에 se offendendo라고 했다.’(se offendendo : The clown's mistake for se defendendo)라고 남겨 놓았다. 일리가 없는바 아니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자살의 경우 행위자(살인자)는, 튜더 왕조 시기의 엄혹한 규범과는 달리, 범인(criminal)임과 동시에 실재로 피해자(victim)이기에 두 용어(se offendendo, se defendendo)의 혼란을 바로 잡을 까닭이 없고, 그리고 광대이기에 ‘실수로 인한 겉말과 속뜻의 일치’가 관객의 웃음을 자아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때 우리는 복제품의 대국 중국에서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면 ‘대륙의 실수’라고 비아냥대곤 했다.

● ‘삼중 동의어반복’(threefold tautology)

‘현학자연한 구별 없는 분할, 차이 없는 구분’(scholastic division without distinction and of distinctions without difference)(Variorum ed.)의 언어구사 관행은 고대 독일의 법정 언어 관습, 즉 ‘삼중 동의어반복’(threefold tautologous) 관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당대 독일 법률가들은 뜻의 차이가 없는 용어들을 차이가 존재하는 양, 강조해서 나열하곤 했다. 가령, ‘용감한 군주’를 ‘A valiant, hardy, courageous prince’라고 표기한 경우이다. 세 형용사는 의미 차이 없는 동의어이다. “범인이 ~을 약탈하다”의 경우에도 “He robbed, pilled, plundered ~.”라고 썼다. 역시 같은 의미의 동사를 삼중으로 쓴 경우이다. 세대를 거쳐 이 ‘삼중 동의어반복’이 무덤 파는 덴마크인(the Dane) 광대의 입술을 통해 테임즈 강변 ‘지구 극장’(The Glove)과 영국 왕실 연회장에서 재현되었다.

김해룡 교수

이 글의 서두에 인용된 대사의 뒷부분은 독자들에게 이미 익숙할 것이기에 설명을 생략한다. “사람이 물로 걸어가고...물이 사람에게 다가오고...” 등은 11회에서 밝힌 바대로 제임스 헤일즈의 재판 과정에서 불거졌던 쟁점이었다. 당대의 ‘검시법’(Coroner’s Quest Law)도 더 이상 낯설지 않을 것이다. 『햄릿』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을 읽어 낸 독자 여러분의 인내의 덕이다. 여전히 필자의 설명이 미흡했으리라는 아쉬움과 함께 공론의 장(場)이 강의실이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 다음은 광대의 애가(哀歌)를 들을 차례이다. (계속)

<전 한일장신대 교수 / 영문학 박사(셰익스피어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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