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룡 교수의 셰익스피어 이야기] 『햄릿』(8)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김해룡 승인 2020.05.17 18:44 | 최종 수정 2020.05.18 15:32 의견 0
 유령을 만나려는 햄릿과 이를 만류하는 호레이쇼. 『햄릿』 1막4장. [사진=Public Domain]

목차
#프롤로그 - ‘메멘토 모리’의 뿌리 찾기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아나모피즘
#종교개혁의 상황을 빗댄 은유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 죽은 아버지의 유령이 살아있는 햄릿에게 

이 글 5회의 일부를 잠시 기억하시기 바란다. ‘메멘토 모리’의 운을 떼며 필자가 이렇게 썼다. 

중세인들은 전쟁과 역병으로 인한, 지천에 깔린 주검을 직접 목격했다. ‘메멘토 모리’는 이 허망함을 자양분 삼아 자생된 화두였다. 이 화두를 소통시키는 여러 소통의 주체/객체들과 방식들이 있다. 가령 그림 《대사들》 속의 퀭하게 뚫린 눈구멍의 해골과 그림 감상자가, 또는 산 자와 산 자가, 죽어가는 자와 산 자가, 언어로 혹은 무언(無言)으로 ‘메멘토 모리’를 나누는 것이다. 방식에 따라, 또한 그것의 파괴력에 따라 우리에게 각인되는 정도에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가 『햄릿』에서 시도한 ‘죽은 아버지의 유령이 살아있는 햄릿에게’ 전한 이 화두가 햄릿에게 인각된 정도가 어떠할까?

햄릿이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니라!’(Frailty, thy name is woman!)(1.2.146)를 읊조리며 숙부의 왕비가 된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과 환멸로 부심(腐心)하는 동안 궁전 성루에는 유령이 밤마다 출몰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8년 「공산당 선언」 서두,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를 작성할 때 차용했을 법한 그 유령이다. 이 유령을 목격한 파수병들과 햄릿의 친구들은 칠흑 같은 밤 허공에 떠있는 이 비실체가 죽은 햄릿 부왕(父王)의 혼령임을 직감한다.

이 사건이 왕자 햄릿에게 보고되기까지 사나흘이 지났다. 이 사흘 밤 동안 목격자들은 살을 에는 덴마크의 겨울 추위를 견디며 이 비실체의 존재, 그리고 산 자들 서로의 존재를 탐색하느라, 확신하느라 두려움과 의혹 가득한 질문들을 뱉었다. 의혹으로 가득 찬 이 극은 캄캄한 망루에서 파수병이 뱉는 “거기 누구냐?”(Who's there?)(1.1.1)로 시작된다. 이어지는 급박한 질문들은 이 비실체가 야기할 혼란의 불길한 전조들이다.

“버나도?”(1.1.4)
“파수 중 아무 이상 없었나?”(1.1.10)
“누구와 교대했나?”(1.1.18)
“아니, 호레이쇼 공도 오셨소?”(1.1.21)
“그래, 그게 오늘밤에도 다시 나타났소?”
(“Has this thing appear’d again tonight?”)(1.1.24)
“선왕과 똑 같은 모습 아니오?”(Is it not like the King?)(1.1.46)
“이걸 두고 허깨비라고 할 수는 없지 않소?”(1.1.57)
“공은 어떻게 생각하시오?”(1.1.59)
“선왕과 흡사하지 않소?”(“Is it not like the King?”)(1.1.61)
“무엇 때문에 매일 밤 철통같은 보초를 세워 백성을 괴롭히고...
누가 아는 사람 있으면 말 좀 해 주겠소?”(1.1.75-82)
“이 창으로 후려 칠까요?”(1.1.143)
“그 분(햄릿)께 알려야 하지 않겠소?”
(“Do you consent we shall acquaint him with it...?)(1.1.177)

● 유령을 만나보셨습니까?

이윽고 햄릿의 측근인 호레이쇼가 유령 출몰 사흘째 되던 날 밤 이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망루에 올랐고 유령이 햄릿 부왕임을 확신한다. 조심스럽게 호레이쇼가 햄릿에게 자신이 목격한 바를 알린다. 이에 햄릿이 즉시 호레이쇼와 함께 망루에 오르고 드디어 햄릿과 유령이 대면한다. 순간, 유령이 햄릿만을 이끌어 호레이쇼를 따돌린다. 전해줄 이야기가 은밀하다는 신호이다. 이로 인해 유령이 햄릿에게 전해 준 말은 햄릿과 관객들만 알도록 정해졌다. 이후 햄릿이 발산하거나 꾸미는 광기와 기이한 언동의 동기를 극중 인물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첫 대면에서 햄릿은 한 순간 이 혼령의 실체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혼령이 아니라 아버지의 모습을 한 악령이라고 의심한다. 그러나 이내 아버지의 혼령이라 여긴다. 혼령의 말을 지체 없이 들으려는 것이다. 자신을 파멸로 인도할 지도 모를 진실을 듣기 전의 무지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햄릿. ...그대가 천상의 영기(靈氣)를 전해주는 천사이든, 또는 지옥의
독기를 몰고 오는 악령이든...그대를 덴마크의 왕이라 부를 터인즉, 말하라.
                                            ... 죽은 시체인
그대가 다시 강철갑옷으로 무장하고 이런 캄캄한 밤에
다시 찾아와 이 밤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고,
대자연의 어릿광대인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영혼이 담을 수 없는 괴기한 생각들로
우리의 사고의 틀을 뒤흔들어 놓는 뜻이 무엇인가?
말하라, 이유가 무엇인가? (1.4.40-57)

혼령의 진술이 진행되면서 햄릿의 의심은 걷힌다. 전 회에서 언급한 대로 유령의 빈틈없는 수사(修辭)와 어휘 사용의 절제력이 햄릿에게 믿음을 준 것이다. 이 아버지의 유령으로부터 햄릿은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비밀을 듣는다. 부왕이 햄릿의 삼촌이며 부왕 자신의 동생, 즉 지금 왕관을 쓰고 있는 자에게 독살 당했다는 것을 고발한 것이다.

유령.                   ...이제, 햄릿, 듣거라.
세상에는 내가 후원에서 잠자던 중 독사에게
물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덴마크의 온 백성은
내 죽음에 대해 이처럼 조작된 이야기에 감쪽같이
속고 있다. -그러나, 알아 두어라, 내 귀한 아들아,
네 아비를 물어서 죽인 그 독사는 지금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다는 것을. (1.5.36-40)

혼란에 빠진 햄릿에게 유령은 복수를 부탁한다. “비열하고 천륜을 어긴 살인에 대해 복수해 달라”는 것이다. 아들에게 복수를 명한 후, “잘 있거라! 잘 있거라! 잘 있거라! 나를 기억하라!”(Adieu! Adieu! Adieu! Remember me!)(1.5.91)는 마지막 당부를 남긴 채 유령이 사라진다. 햄릿이 이 당부를 ‘미친 듯이’ 자신의 뇌수에 새기는 모습이 아래와 같다. 필자가 파악하려는 이 ‘메멘토 모리’ 주제도 독자들이 수용해야 『사랑의 헛수고』(Love’s Labour’s Lost)를 피할 수 있을 것이기에 독자들의 온전한 판단과 수용을 바라며 관련 대사 상당 부분을 그대로 옮긴다.

유령. ... 이렇게 해서 잠을 자다가 나는 내 동생의 손에 생명과,
왕관과 왕비를 한꺼번에 모조리 빼앗겼을 뿐 아니라,
죄가 한창 만발하고 있던 시기에 성찬식도, 고해성사도,
종부성사도 받지 못하고, ... 내 머리에 이승에서 저지른 온갖 과오를
그대로 이고 심판장으로 끌려나오게 되었다.
오 두렵구나! 오 무서운 일!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
덴마크 침실이 육욕과 저주받을
근친상간의 소굴이 되게 내버려 두지 마라. ...
                          ...곧 작별을
고해야 하겠다. 반딧불의 그 열기 없는 불빛이
창백해 지는 것을 보니 새벽이 가까워진 모양이다.
잘 있거라, 잘 있거라, 잘 있거라, 날 기억하라.
[유령 땅 속으로 사라진다. 햄릿이 미친 듯이 무릎을 꿇고 앉는다.]

햄릿. 오 천군 천사들이여! 오 대지(大地)여! 또 무엇에 걸고 맹세하나?
지옥의 악마들도 불러낼까? 오 부질없는 것! 진정, 진정하라, 가슴아,
그리고 내 근육들아, 쉽사리 늙어 시들지 말고,
날 든든히 지탱해 다오. [일어난다.] 그대를 기억하라고?
단연코, 그대 가련한 혼령아, 혼비백산한 내 머리 속에 기억력이
자리하고 있는 한 기억할 것이다. 그대를 기억하라고?
그렇다. 내 기억의 수첩으로부터 온갖 보잘 것 없는 기억,
책에서 얻은 온갖 금언, 온갖 사물의 형상, 젊은 시절
관찰하며 그곳에 적어놓은 온갖 과거의 인상들을
깡그리 지워 버리고 그대의 명령만을 내 뇌수라는 장부
한 가운데 기록해 두고 천박한 것들과
혼돈하지 않을 테다. 그렇다. 하늘에 맹세코 그리 할 것이다!
아, 악독하기 그지없는 여인이여!
오 악당, 악당, 미소 짓는 저주받을 악당!
내 수첩. 여기에 적어 두자.            [적는다.]
‘사람은 미소 지으면서도 능히 악당이 될 수 있다’고-
적어도 덴마크 천지에서는 그럴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니, 숙부, 여기에 적어 두었다. 이제 이 말은 내 좌우명.
‘잘 있거라, 잘 있거라, 잘 있거라, 날 기억하라.’
           [무릎을 꿇고 그의 칼자루에 한 손을 얹는다.]
그렇게 하기로 맹세한다.             [기도한다.](1.5.74-112)

이 유령이 한 차례 더 나타난다. 햄릿이 어머니 거트루드의 도덕적 불감증, 정조의식의 박약함을 비난하며 몰아붙이는 장면에서이다. 이번에는 “잊지 말라”(Do not forget.)(3.4.110)는 경고를 남기고 사라진다.

● 무엇을 잊지 말라는 것인가?

무엇을 잊지 말며, 무엇을 기억하라는 것인가?
햄릿이 다른 기억들은 다 지우고 자신의 뇌리에 이렇게 깊이 인각시키는 혼령의 명령은 무엇인가?
햄릿이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것이 복수인가?
그렇다. 드러난 대사로 판단하면 그러하다.
그러나 숨겨진 간단한 수수께끼 하나만 풀면 사정이 달라진다.

유령이 뱉은 작별인사, "날 기억하라"(Remember me). 이 명령은 햄릿에게 좌우명이 되었다. 이 사실에 멈추지 않고 이 명령이 그 함의의 변이를 일으킨다! 유령은 죽은 자의 모습을 한 비실체이기에 유령이 지칭하는 ‘나’(me)는 ‘죽음’(mori)이다. 따라서 유령이 뱉는 “나를 기억하라”는 말은 ‘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유령이 당대의 그 음울한 시대정신인 ‘memento mori’를 햄릿에게 명했다. 유령이 뱉은 ‘Remember me’는 라틴어 ‘memento mori’의 영역(英譯)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 수수께끼가 수긍이 되면 이제부터는 『햄릿』 읽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김해룡 교수

결국 햄릿의 뇌리에 박힌 것은 복수만이 아니다. 유령이 명(命)한 당대의 화두, “죽음을 기억하라”가 뇌리에 중첩된 것이다. 이 발견으로 인해 『햄릿』 읽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그리될 것이다. 먼저, 많은 독자들을 의아해하게 만들고, 비평가들이 경이로운 분석력으로 해석해 내려 했던 ‘복수의 지연’, 그 ‘지연’의 주된 원인이 의외의 것, 즉 유령이 뱉은 “나를 기억하라”라는 명령에서 비롯되었음을 발견하게 되면 이어지는 다른 이야기도 그 맥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햄릿이 보다 근원적인 화두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햄릿의 뇌리에서 이 근원적인 ‘화두’가 ‘복수’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쉽사리 발견할 수 있다. 독자들이 이 발견의 경이로움을 즐기시길 바란다. ‘화두’가 ‘복수’보다 우위를 점한 예들이 극 속에 즐비하다. ‘메멘토 모리’ 주제의 마무리는 다음 회로 넘긴다.

<전 한일장신대 교수 / 영문학 박사(셰익스피어 전공)>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