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룡 교수의 셰익스피어 이야기] 『햄릿』(9)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김해룡 승인 2020.06.04 18:05 | 최종 수정 2020.06.05 10:11 의견 0
John Everett Millais' Ophelia (1852). 오필리어의 신비에 쌓인 죽음을 묘사. 5막1장의 무덤 장면. (Public Domain))
오필리어의 신비에 쌓인 죽음을 묘사한 John Everett Millais의 <Ophelia>(1852). 5막1장의 무덤 장면. [Public Domain]

목차
#프롤로그 - ‘메멘토 모리’의 뿌리 찾기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아나모피즘
#종교개혁의 상황을 빗댄 은유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 ‘빌트 인’(built-in) 신비

모든 위대한 예술 작품에는 그 중심에 신비가 존재한다. 모호함, 미스터리라고도 불리는 것들이다. 『햄릿』 속의 미스터리는 그 유사한 예를 다른 극에서는 찾기가 쉽지 않다. 셀 수 없이 많은 해설/비평들이 수세기에 걸쳐 이 신비들을 밝히려 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분석을 위한 이론적 무기들이 그 위력을 더해가고 있고 경이로운 해석들이 매년 쌓여가고 있다. 그러나 이 신비들은 경이로운 해석들로 인해 제거되는 부류의 것들이 아니다. 신비가 극 속에 ‘빌트 인’(built-in)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이 순간에도 끝없이 새로운 독해가 시도되는 것은 ‘빌트 인’되어 있는 신비들이 ‘성장 중’임을 믿게 만든다.

파격적인 독해로 이 신비를 밝히려한 평자도 있다. 바이닝(Edward P. Vining)은 햄릿에게서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를 햄릿의 여성성에서 밝혀내려 시도했고, 탐구의 끝자락에서 햄릿이 왕자가 아니라 공주였음을 입증했다. 햄릿 자신이 이 파격적 독해의 단초를 제공했다. 가령, 무기력에 빠져 복수를 감행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는 햄릿의 독백이 그 중 하나이다.

햄릿. ...나로 말하자면 비둘기 간에 쓸개마저 빠져버려 굴욕에
항거할 수도 없는 인간이니. 그렇지 않았다면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이 비열한 원수의 오장육부로 하늘에 날라 다니는
솔개를 살찌워야 했을 것이다....참으로 장하구나.
귀하신 부왕께서 시역을 당하셨는데 그 아들인 나는,
천국과 지옥이 함께 복수를 재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창부처럼 말로만 가슴 속의 생각을 털어놓고,
매춘부처럼 욕설만 늘어놓고 있으니,
이 부엌데기 같은 놈! (2.2.573-583)

햄릿은 비굴함이 자신의 ‘비둘기 간’에서 비롯됐다고 믿는다. 이 ‘쓸개 빠진 비둘기 간’에서는 분노가 생성되지 않는다. 온유함과 여성성만 분비된다. 또한 자신을 ‘창부’(a whore), ‘매춘부’(a drab), ‘부엌데기’(a scullion)로 부른다. 마찬가지로 이 명칭들은 여성성의 한 갈래이다.  

고전적 해설들은 극중에서 왜 복수가 지연되는가, 문법학교(Grammar School) 수료 혹은 중퇴가 최종학력인 셰익스피어가 햄릿의 정신세계를 어찌 그려낼 수 있었다는 것인가, 유령의 실체는 무엇인가, 극은 허무주의만 노정하고 막을 내리는가를 겨냥했다.  

거시적인 비평은 이 극이 “의심의 여지없는 실패작”(T.S.Eliot)인가, 예술적 금자탑인가를 다투었다. 위대한 비극으로 인정을 받아도 의문은 뒤따른다. 햄릿은 정치(精緻)한 도덕적 감수성을 지닌 인물인가(Bradley), 극단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인물(Madariga)인가의 논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신비와 의문이 중첩되어 있는 『햄릿』의 경우, 어느 평자도 타인의 해석을 흔쾌히 수용하지 못하는 경향을 띤다. 대부분의 평자들은 극의 한 줄기를 조명하려고 나머지 부분들을 부득불 깊은 그림자 속에 묻어 놓기 때문이다. 한 해석의 틀에서 상충되는 요소들이 다 수용될 수 없기에 불가피한 일이다. 요약하자면, 필자가 지난 회에 제기했던 “햄릿이 ‘복수’보다 ‘메멘토 모리’에 경도되어 있고 그 흔적이 즐비하다”는 가설을 제대로 꿰기 위해 필자는 선택적으로 극의 다른 주제들을 그림자 속에 방치할 수도 있는 것이다. ‘불면’(insomnia)이 『멕베스』(Macbeth)의 주된 이미지로 인정되듯, 다행히 많은 평자들이 ‘죽음’을 『햄릿』의 주요 이미지로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스토리의 일정 부분의 방치는 불가피하지만 지금까지 필자와 함께하는 『햄릿』 읽기는 약간의 파격을 감안해도 극의 뿌리에 닿아 있다.

그럼에도, ‘극의 다른 많은 주제들을 방치하는’ 과오를 줄이는 방비책이 있다. 극에서 전통적으로 제기되었던 의혹들을 다 열거 해 놓는 것이다. 그림자 속에 묻힐 ‘의혹’들을 미리 드러내는 것이다. 그로 인해 독자들은 균형을 유지한 채 텍스트 읽기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의혹’들은 극에서 질문들(questions), 혹은 독백의 형태로 드러나 있다. 질문과 독백은 명상적인 것, 고뇌에 찬 것, 두려움에 찌든 것 등 다양하다. 이 질문들은 대체로 극의 뿌리에서 생성된 것들이다. 또한 극을 보다 면밀히 읽기 위한 자료들이다. 우리가 이 질문들에 얼마나 답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햄릿의 정신세계는 이 질문들로 구축된 의혹체이기 때문이다.

『햄릿』에는 대중화된 질문, 명상적 수사(修辭)들이 다수 있다. 이 부류의 질문/수사들은 이야기의 맥락뿐 아니라 극 전체의 맥락에도 벗어나 있는 듯하다. 당연히 극 중 인물이 대답하지 않거나 못할 것들이다. 특별히 독백은 전적으로 관객을 향한다. 햄릿이 자신이 고뇌하는 바를 관객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To be or not to be”도 그 중 하나이다. 아래 열거하는 질문/수사들은 『햄릿』에서 가장 보편성을 지닌 것들이고 고역이지만 답을 찾아야 할 것들이다. 전적으로 독자들이 답해야 할 것들이어서 필자는 최소한의 길잡이 노릇만 할 것이다. 독자들은 ‘죽음’과 ‘복수’의 심상(이미지)이 아래에 인용되는 대사들에서 얼마나 인상적으로 발휘되는가를 살펴 볼 일이다.

● 2막 2장. “위대한 인간 존재”는 “먼지의 정수(精髓)”(quintessence of dust)

햄릿이 자기방어책으로 꾸민 광증을 발산하기 시작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왕이 햄릿의 친구 둘을 왕실로 부른다.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이다. 이들에게 왕이 은밀한 일을 맡긴다. 햄릿의 광증의 진위 여부를 염탐하라는 것이다(2.2.1-39). 뒤이어 햄릿이 이 둘을 만난다. 첫 만남에서 햄릿은 이 둘을 “출중한 좋은  친구들”(My excellent good friends)(2.2.224)로 환대한다. 그러나 몇 마디 안부 말이 오간 후 햄릿이 이 둘의 방문이 순전하지 않음을 직감한다. 그 직후 햄릿은 전광석화처럼 이 둘로부터 고백을 받아낸다. 이 둘이 새 왕의 하명을 받아 “불려 왔음”(we were sent for)(2.2.292)을 실토한 것이다. 햄릿이 이 친구들의 임무가 염탐이라는 것을 즉각 알아챈다. 햄릿과 옛 친구 둘이 순식간에 적이 되었다. 햄릿이 친구들에게 베푼 호의는 적개심과 경계심으로 바뀐다. 그 즉시 햄릿이 실성(失性)을 가장한다. 두 염탐꾼이 왕에게 자신이 실성한 것으로 보고하도록 유도하기 위함이다. 실성을 드러내는 대사가 이러하다.

햄릿.             ... 최근에 나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모든 기쁨을 잃고, ...
심기가 너무 우울해 져서, ...이 찬란하게 덮여있는 천궁,...
이런 것도 내게는 추악하고
독기어린 증기의 덩어리로만 보인단 말일세. 인간이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 이성은 숭고하고, 지능은 무한하며,
그 자태와 거동은 얼마나 빈틈없고 경탄스러우며, 그 행위에
있어선 마치 천사와 같고, 그 분별력은 가히 신과 같으니.
그야말로 세계의 정화이며, 완벽한 만물의 영장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먼지의 정수(精髓)가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은 날 기쁘게 하지 못한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 (2.2. 295-309)
                    ...What piece of work is a man,
how noble in reason, how infinite in faculties, in form
and moving how express and admirable, in action
how like an angel, in apprehension how like a god:
the beauty of the world, the paragon of animals-
and yet, to me, what is this quintessence of dust?
man delights not me-nor woman neither. (303-309)

햄릿이 묘사한 “위대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르네상스적 인간관이 설정한 인간이다. 질서정연한 윤리적 세계에서 이성을 부여받은 인간은 가장 고상한 생명체이며 천사와 인접한 지위를 누리는 존재였다. 순수한 이성은 미덕(virtue)과 동류였다. 그러나 햄릿은 인간이 이성을 거부하고, 짐승의 지위로 추락하는 가공할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배웠다. 그 가공할 능력으로 신하가 왕을 시해하고, 형제가 형제를 죽이고, 아내들과 어머니들이 근친상간의 침상으로 뛰어들며, 유년시절의 친구들이 염탐꾼으로 고용됨을 목격했다. 이 햄릿에게 “민물의 영장”은 “먼지의 정수”인 것이다.

햄릿이 이 대사로 염탐꾼들에게 전하고자 한 바는 자신의 우울증과, “위대한 존재”를 “먼지의 정수”로 등식화한 자신의 실성이었을 것이다. “먼지의 정수”(quintessence of dust)는 ‘가장 정련된 먼지’이거나, ‘먼지의 본질적 특성’을 칭하는 수사(修辭)이다. 모든 생명이 그 끝에 남기는 것, 생명의 마지막 흔적인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고귀한 시신이 화(化)한 먼지는 물과 엉켜 술통마개가 되었다"(5.1.197-8). 이 등식이 인간 존재를 칭하는 가장 고전적인 은유임을 정작 “먼지의 정수”인 두 친구는 인지하지 못한다. 염탐꾼들을 교란시킬 의도로 햄릿이 구사한 인간예찬은 기념비적 수사로 남겨졌다. 이 기념비적 수사가 염탐꾼에게 경멸을 드러내는 의도로 구사된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허무로만 충만한가?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
셰익스피어의 고향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 있는 햄릿 동상.[사진=픽사베이]

● 3막 2장. 《쥐덫》(Mousetrap)

유랑극단이 왕실에서 공연한 연극 《쥐덫》(Mousetrap)(3.2)으로 햄릿은 목적한 바를 이룬다. 무대에서 벌어지는 살인행위를 관람하던 현왕이 격렬한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며 관람을 포기하고 자리를 뜬 것이다. 이를 지켜본 햄릿은 유령의 탄원이 사실임을 확신한다. 현왕이 햄릿 부왕을 살해하고 왕좌를 탈취했다는 유령의 탄원이 사실로 굳어진 것이다. 이제 복수를 감행하는 길목에 놓였던 장애물이 제거되었다. 의심이 제거된 것이다. 그리고 복수의 기회는 의외로 속히 왔다.

《쥐덫》 바로 다음 장면인 3막 3장에서 왕은 위험천만한 햄릿을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왕의 비밀 칙서를 소지한 햄릿의 두 친구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이 햄릿을 영국으로 데려갈 음모이다. 영국왕실에 당도하여 두 친구가 칙서를 영국 왕에게 보이는 순간 햄릿이 처형당하도록 일이 꾸며졌다. 이 음모를 꾸민 직후 왕이 놀랍게도 기도를 통해 자신이 행한 살인 행위를 고백한다. 《쥐덫》 관람 후 그의 양심이 소용돌이를 친 것이다.

햄릿이 기도하는 이 왕을 발견하고 칼을 뺀다. 복수를 위한 절호의 기회를 만난 것이다. 순간 햄릿이 치명적 과오를 저지른다. 칼을 거둬들여야 할 이유들을 나열하며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다. 결코 오지 않을 다음 기회이다. 이 오판으로 인해 오필리어가 실성에 이어 죽음을 맞이하고, 극의 마지막 무대는 햄릿, 그리고 왕과 왕비를 비롯한 극중 주요 인물 전부의 시신으로 뒤덮인다. 덴마크의 왕가도 대가 끊겨 왕위가 노르웨이 왕의 아들 포틴브라스에게 양위된다. 때늦고 어설픈 복수에 왕국이 대가로 지불된 것이다. 복수의 기회를 흘려보내며 햄릿이 드러내는 이유는 외견상 명징하다.

햄릿.  자, 지금이 벼르던 일을 해 치울 때다. 이 자는 기도중이니.
지금 바로 결행하자.           [칼을 뽑는다.]
                      그럼 이 자는 천국으로 가고
나는 복수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건 신중히 생각해야 할 일이다.  
악당이 내 아버지를 살해했는데, 그 보답으로
내가, 아버지의 외아들이, 바로 그 악당 놈을
천국으로 보내다니.
아니, 이는 아버지 살해범을 고용해 그 살인에 품삯 주는 격이지, 복수가 아니다.
이 자는 나의 아버지의 죄가 오월의 혈기처럼 만발하고  
한창 환락에 취해 있을 때 졸지에 아버지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사후 그 분의 심판이 어찌될지 하나님 외에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이승에서 우리의 생각이 미치는 바에 미루어보면
벌이 가벼울 수는 없는 일. 그렇다면 내가 원수 갚는 것인가,
이 자의 영혼이 정화되어 천국으로 가기에
가장 마땅할 때에 이 자의 목숨을 뺏는 것이?  
아니다.                               [칼을 칼집에 넣는다.]
칼아 다시 들어가라, 그리고 훨씬 더 끔찍한 기회를 맛보라.
이 자가 만취해 잠에 빠졌을 때, 혹은 정욕에 사로잡혀 날뛸 때,
혹은 자신의 침대에서 근친상간의 쾌락에 탐닉해 있거나,
노름판에서 저주를 해댈 때, 혹은 결코
구원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행위를 할 때,  
그때 이 자를 처치해 버리면, 천국을 두 발로 걷어차고
그의 영혼은 저주받고 지옥 같이 캄캄해져
그 곳으로 곤두박질치게 될 것이다. (3.3.73-95)

햄릿이 왕을 살려 놓는 이유가 의외의 것이다. 왕이 탄원자로서 기도 중이어서도 아니고, “복수는 나의 것,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Vengeance is mine, saith the lord)”가 기억나서도 아니다. 햄릿이 왕을 살려 놓는 것은 자신이 감행할 복수에 가장 적절히 부합되는 왕의 행위를 기다리기 위해서이다. 가령, 왕이 “자신의 침대에서 근친상간의 쾌락에 탐닉해” 있을 때 죽이겠다는 것이다. 햄릿이 왕의 행위와 자신이 행할 복수 사이의 완벽한 조화를 꿈꾸며 당장의 기회를 흘려보낸다. 유미주의(唯美主義)의 망령에 사로잡힌 것이다. 완벽한 신의 정의가 구현되어야 햄릿 내부의 증오가 달래지고, 그의 영혼은 쉼을 얻을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연의 타당성에 몰입하느라 햄릿이 행위, 즉 궁극적 목적을 희생시킨 것이다. 

<전 한일장신대 교수 / 영문학 박사(셰익스피어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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