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룡 교수의 셰익스피어 이야기] 『햄릿』(15)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①

김해룡 승인 2020.11.22 13:30 | 최종 수정 2020.12.07 14:17 의견 0
Thomas Francis Dicksee, Ophelia (1873) [Public Domain]
Thomas Francis Dicksee, Ophelia (1873) [Public Domain]

목차
#프롤로그 - ‘메멘토 모리’의 뿌리 찾기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아나모피즘
#종교개혁의 상황을 빗댄 은유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무덤 파는 광대’(Grave-digger)의 인류를 향한 애도(哀悼)④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①

● 마지막 소(小)주제 "To be, or not to be"(3.1.56-89)

마침내! 마지막 소주제를 다룰 차례이고, 14회에 이어 다시 3막 1장이다. 전체 극의 중간 지점인 이 장(場)에 “to be, or not to be,-” 독백이 자리 잡았고 이 독백을 함께 읽어야 『햄릿』 논의가 마무리된다. 극의 중간인 3막에서 논의가 마무리되는 것에 의문이 생기겠지만 이미 여러 소주제 별로 논의를 전개하느라 전체 5막을 종횡으로 다루었기에 독자로서는 충분한 분량을 읽었으리라 믿는다. 논의의 대단원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극의 마지막 장면을 짧게 이야기할 것이다.

14회에서는 이 독백 직후에 햄릿과 오필리어 사이에 벌어진 일을 다루었다. 둘이 만나는 순간부터 오필리어가 햄릿으로부터 받았던 선물을 돌려주려 내밀자 햄릿은 즉각적으로 광증을 연기한다. 오필리어가 왕실을 장악한 세력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고 햄릿 자신을 염탐하기 위한 ‘미끼’로 이용당하고 있음을 햄릿이 직감한 것이다. 광증을 빌어 햄릿이 오필리어에게 뱉는 첫 대사가 “하, 하! 그대는 정숙한가?”(Are you honest?)(3.1.103)이다. 햄릿이 근친 재혼을 한 어머니 거트루드에 대한 혐오감을 순진무구한 오필리어에게 뱉어냈다. 이후 벌어진 오필리어에 대한 햄릿의 가학적 공격은 14회에서 이미 살폈다.

3막 1장에서 햄릿이 무대에 등장한 이후 왕과 폴로니어스는 휘장 뒤에 숨어 햄릿의 이 독백과 이어지는 햄릿과 오필리어의 대화를 엿듣는다. 염탐의 명분은 햄릿의 광증이 오필리어에 대한 ‘사랑의 고통’으로 인한 것인지의 여부(the affliction of his love or no)(3.1.36)를 판단해 보자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이 “to be, or not to be,-” 독백은 관객과 두 염탐꾼에게 동시에 전달되는, 연극사에 진기록을 세운 독백이 되었다.

2막의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은 가장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단호한 행위를 결정하는 햄릿을 목격한다. 유령이 햄릿에게 현왕(現王) 크로디어스가 자신(부왕)을 시해한 자라고 고발했으나 햄릿이 그 증거를 확보할 방법이 없던 차였다. 마침 유랑 극단이 햄릿의 초대로 궁전에 머물고 있다. 햄릿이 이 극단에게 선왕이 시해당하는 장면과 흡사한 장면을 공연하도록 요청했다. 1538년에 살인자 곤자고가 우르비노 공작(Duke of Urbino)을 살해했던 실재 사건을 극화한 『곤자고의 시역』(The Murder of Gonzago)이 다음 날 공연될 것이고, 국왕 크로디어스가 그 극을 관람하도록 초청할 계획을 세웠다. 햄릿이 자신의 의중을 이렇게 드러낸다.

햄릿. 나는 들은 적이 있다.
죄진 놈들이 앉아 연극을 관람하다가
너무도 탁월한 무대 공연 솜씨로 영혼이
밑바닥까지 감동된 나머지 즉석에서,
자신들의 죄상을 고백했다는 이야기를.
살인이란, 본시 혀가 없으나, 찔린 칼자국들이 참으로 경이로운
입이 되어 고발하는 법이다. 이들 배우들을 시켜서
부왕의 시역과 흡사한 장면을 내 숙부 앞에서
상연하게 해야겠다. 그리고 그의 안색을 살피다가
아픈 곳의 밑바닥을 찔러 봐야겠다. 그가 움찔하기라도
한다면 내가 할 일은 분명해진다. 내가 본 유령은
마귀일는지도 모르고, 마귀는 유혹적인 모습으로 변모할
능력이 있으니, 그렇다, 혹 내가 허약하고 우울증에
잡혀 있음을 틈타, 그 놈은 이런 증상들을 이용해,
인간을 제 손아귀에 넣을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나를
파멸시키려 현혹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유령)보다도 더
결정적인 증거가 있어야 되겠다. 연극이 바로 그 수단,
그것을 나는 국왕의 양심을 사로잡는 덫으로 삼으리라. (2.2.584-601)

햄릿의 계획대로 『곤자고의 시역』이 공연되고 시해자 크로디어스가 양심의 찔림을 드러내는 몸짓을 보이면 의혹이 확신으로 바뀔 것이다. 복수를 지연시키는 의혹이 제거되기 때문이다. 햄릿이 복수의 선행조건인 적극적인 준비를 마쳤다. 그가 더 이상 상념에만 젖어 있지 않으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복수가 시작되리라는 관객의 기대와는 달리 이어지는 3막 1장에서 햄릿은 “To be, or not to be,-” 독백을 뱉는다. 이 독백은 햄릿의 첫 독백(1.2.29-59)과 그 기조가 흡사하거나 더 음울하다. 첫 독백(1.2.129-159)에서 햄릿은 언제든지 죽음을 맞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었다. 선왕의 장례를 치른 직후 어머니가 햄릿의 숙부와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속도!”(O most wicked speed!)(1.2.156)로 자행한 근친 혼인으로 햄릿은 자신의 육신이 오염됐음을 절감하며 자살의 의도를 내비쳤던 것이다.

햄릿. 오 너무도 더러운 이 육신, 녹아내려,
한방울 이슬로 변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자살을 금하는 계율을
정하지 말았어야 했다. ...- 아,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속도!
그렇게 서둘러 근친상간의 더러운 잠자리로 뛰어들다니! (1.2.129-152)  

“To be, or not to be,-” 독백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목숨을 끊을 것인지 말 것인지’로 채워져 있다. 이 “to be ...” 독백을 뱉는 햄릿의 정서는 첫 독백의 정서로 회귀한 것이다. 이유는 복수의 의지와는 별개로 햄릿이 자신의 운명으로 느끼는 ‘세상을 바로 잡는 일’에 절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덴마크의 야만성이 자신에게 부과한 복수의 의무를 수행하기에는 햄릿이 너무 문명화되어 있다. 그의 절망이 이러하다.

햄릿. ... 세상은 혼란에 빠졌다. 오 지긋지긋하게 성가신 일,
이 세상을 다시 짜 맞추어 넣을 일이 내 운명이라니. (1.5.196-9)
The time is out of joint. O cursed spite,
That ever I was born to set it right.   

햄릿이 죽음에 집착하는 다른 배경이 있다. 필자가 주장하는 바대로 햄릿이 유령의 명령, “나를 기억하라!”를 ‘메멘토 모리’로 받아들이고 이 명령에 붙들려 있어 그러할 수 있는 것이다.  

“To be, or not to be,-”는 세계 문학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독백이란 찬사를 받는다. 이 독백은 인류가 가장 많이 암송하는 것으로, 그리고 가장 흔히 인용하는 시구(詩句)로 알려져 있다. 이를 입증하듯 이미 수많은 래퍼(rapper)들이 이 독백에 운율을 붙인 영상을 유튜브(Utube)에 올렸고 그 수가 늘어나고 있다. 먼저 의문을 드러내고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진정으로 이 독백이 세계인의 찬사와 관심을 받을 만한 가치를 지닌 것인가? 단순하게는 이 독백이 왜 특별한가? 혹시 우리가 문화제국주의의 기치를 앞세운 영국의 위력과 문화 전통에 압도당해 찬사를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판단과 찬사 여부는 역시 독자의 몫이다. 필자는 이 독백에 사용된 어휘에서 드러났거나 일상적 유추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주관적/경험적 추론들을 열거할 것이다. 텍스트를 접할 기회가 없는 독자들을 위해 독백 전부를 인용할 것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독백의 과정을 따라가며 단락화(化) 하고자 한다.

● 햄릿의 딜레마 독백의 서두

햄릿.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                                
광포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아도
그 고통을 마음속으로 감내하며 사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인가,
아니면 고통의 바다에 대항해 무기를 들고 맞서 싸워
그것들을 끝장내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인가? (3.1.56-60)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Whether 'tis nobler in the mind to suffer
The slings and arrows of outrageous fortune,
Or to take arms against a sea of troubles,
And by opposing end them?  

32행(56-88)에 걸친 이 독백은 인류에 회자되는 “To be, or not to be,-”로 시작된다. 위에 인용된 다섯 행 이후 61행부터 끝 행인 88행까지 햄릿이 이 “To be, or not to be,-”에 매달리지만 이 첫 다섯 행(56-60)에서 햄릿은 이 의문에 대한 직접적인 상념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죽음이나 자살의 의도가 배지 않은 두 가지 지난(至難)한 삶의 방식에 대해 묻는다. “광포한 운명의 돌팔매”(slings and arrows of outrageous fortune)를 수동적으로 수용하고 인내하는 것이 고귀한 것인지, “고통의 바다에 대항해 무장하고”(to take arms against a sea of troubles) 싸워 고통들을 끝장내는 것(by opposing end them)이 고귀한 것인지를 자문하는 것이다.

Thomas Francis Dicksee, Ophelia (c. 1864) [Public Domain]
Thomas Francis Dicksee, Ophelia (c. 1864) [Public Domain]

무슨 뜻인가? 이 독백에서 구사된 어휘들은 왜 특별한가? 셰익스피어에 익숙한 관객(독자)들은 햄릿의 언어에는 귀에 들리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겼다는 것을 감지한다. 호흡이 실린 말 뒤에 결코 발화되지 않은 ‘무엇’이 있음을 안다. 햄릿은 자신이 진정으로 전하고자 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자면, 관객들은 햄릿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햄릿 자신의 내면의 신호를 듣는 것이다. 현대적 용어로 정의하자면 햄릿이 자신의 무의식에 휘둘리는 것을 관객들이 인지한다는 것이다. 가령, 이 독백의 서두 부분 다섯 행의 경우, “고통의 바다”에 대항해 무장하고, 싸워 고통들을 끝장낼 수 있으면, 즉 싸워 이길 수 있으면, 햄릿은 어느 쪽이 더 “고귀한 일”인가에 대해 이렇게 심각하게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통의 바다”에 대항하는 것은 고대 영국의 원주민인 켈트 족 무사들이 거센 파도에 방패로 맞서는 것과 같은 만용이며 패배가 전제되기 때문이다.

인용문 중의 “고통의 바다”(sea of trouble)의 “바다”(sea)는 고대로부터 ‘방대한 분량’(a vast quantity), ‘대중’(multitude), 혹은 ‘거대한 사물의 집합’(confluence of anything)을 의미했다(Variorum, 207). 구약의 예언자 예레미야(Jeremiah)가 이 단어(θάλασσα, sea)를 ‘거대한 군대’(prodigious army)의 의미로 구사해 그의 예언서 한 구절, “The sea is up upon Babylon: She is covered with the multitude of its wave.”(Jeremiah 51:42)가 “거대한 군대가 바빌론에 넘침이여, 그 많은 군대의 파도가 도시를 덮었도다.”로 번역되는 예를 남겼다. 햄릿이 읊조리는 “고통의 바다”는 인간을 휩쓸고 사면으로 에워싸 인간을 삼키는, 인간이 겪는 거대한 고통의 은유이다. 따라서 ‘거대한 군대’와 같은 고통에 “홀로 맞서 싸워 그것들을 결판내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고통들을 정복함으로써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것들에 정복당함으로써 고통을 종결시킨다는 의미이며, “홀로 맞서 싸워 그것들을 결판”낸다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이르는 말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 비극의 주인공인 햄릿은 극적 규범대로 두 번째의 삶의 방식을 선택해 영웅적 행위를 감행해야 한다. 사적(私的) 복수(vendetta)가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명예로운 수단이었던 16-7세기 영국 사회는 인용문 속의 “고통을 마음속으로 감내하며 사는” 첫 번째 방식의 인내를 비겁함의 형태로 치부했다. 햄릿이 택할 수 없는 선택지인 것이다.

햄릿이 이 첫 다섯 행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무엇’이 있다. ‘무엇’은 햄릿이 처한 지난한 딜레마일 것이다. 그에게 남겨진 한 가지 선택지인 영웅적 행위가 자신의 죽음을 전제하고 있음을 햄릿 자신이 알고 있다. 햄릿은 자신이 제시한 두 가지 삶의 방식 중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선택불가의 무력함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 무력함이 다음 행부터 시작되는 “To die-to sleep,”(죽는다는 것은-잠자는 것)로 이어진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햄릿의 “말 뒤에 결코 발화되지 않은 무엇”이 있어 필자나 독자가 다 고역을 겪는다. 부디 즐거운 고역이기를!

[계속]

<전 한일장신대 교수 / 영문학 박사(셰익스피어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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