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룡 교수의 셰익스피어 이야기] 『햄릿』(18)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3.1.56-89)④

김해룡 승인 2021.06.02 17:09 | 최종 수정 2021.06.04 17:44 의견 0

목차
#프롤로그 - ‘메멘토 모리’의 뿌리 찾기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아나모피즘
#종교개혁의 상황을 빗댄 은유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무덤 파는 광대’(Grave-digger)의 인류를 향한 애도(哀悼)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④

엔도르의 무당(중앙)이 불러낸 사뮤엘 선지자의 혼령과 사울 왕(붉은 의상)의 대면 장면. 다음 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죽을 것이라는 혼령의 예언에 쓰러지는 사울. [ⅠSamuel 28:3-25] Nikolai Ge (1857)
엔도르의 무당(중앙)이 불러낸 사뮤엘 선지자의 혼령과 사울 왕(붉은 의상)의 대면 장면. 다음 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죽을 것이라는 혼령의 예언에 쓰러지는 사울. [ⅠSamuel 28:3-25] Nikolai Ge (1857)

● 허구의 허구 위에 군림한 허상 : 유령 

괴이한 연극 『햄릿』 읽기를 끝내야 할 때이다. 이 글은 셰익스피어 당대의 영국 관객들이 『햄릿』을 수용할 때의 정서와, 『햄릿』을 수용하는 이 땅 우리들의 정서의 차이를 좁히려는 의도로 집필되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의도를 구현하기 위해 ‘텍스트 자세히 읽기’가 선행되었고 텍스트와 관련된 역사적 자료들이 동원되었다. 당대의 시대정신과 숨겨져 있던 원전의 내밀한 각주들도 조명되었다. 그로인해 적지 않은 분량의 『햄릿』 읽기가 인터넷 매체에 연재되는 기록이 만들어졌다.

『햄릿』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다루어야할 마지막 주제는 『햄릿』이 누리는 세계 문학사 내의 위상이 온당한 것인지를 따지는 일이다. 앞의 글 한 부분에서 필자는 『햄릿』에서 드러나는 극적 개연성 없음, 즉 극적 맹점들을 걸작들에 내재하는 신비의 요소라고 덮어 두었다. 『햄릿』의 맹점들 중 으뜸이 유령의 존재이다. 『햄릿』은 이 유령에 휘둘린 극이다. 『맥베스』가 세 마녀에 휘둘린 극이듯 『햄릿』도 그러하다. 비록 이 극이 이성의 시대, 즉 계몽주의가 확산되기 전에 쓰인 것이기에 면책은 되지만 고작 비실체인 유령에 휘둘린 정도가 심대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비이성적인 연극에 향하는 찬사는 온당한 것인가?

“죽음 이후의 꿈”을 두려워하는 햄릿의 “To be ~”독백에 공감하지 못하는 독자층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죽음 이후의 꿈”을 경험하기가 쉽지 않고, 어느 누구도 사후 그것을 경험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꿈은 허구(fiction) 『리처드 3세』 (Richard Ⅲ, 1592)속의 인물 클래런스가 꾼 꿈을 허구인 『햄릿』 속의 햄릿이 언급한 허구이다. 햄릿 부왕의 유령도 당연히 허구적 존재이다. “죽음 이후의 꿈”에 동감하지 못하는 독자층이 극에 등장하는 허구적 존재와 그 존재의 역할은 인정할 수 있는가? 아마도 부정적일 것이다. 햄릿 부왕의 유령은 극 속에서나 비평의 역사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적 존재이다. 진정한 혼령인지, 파괴적인 악령인지, 단지 복수극 장르의 필수 구성요소인지, 혹은 파수병들과 햄릿의 정신 병리학적 투영체인지를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유령은 가톨릭 신앙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햄릿에게 자신이 연옥에서 겪고 있는 고통을 완화시키거나 면할 수 있는 경건한 기도를 요구하는 대신 “나를 기억할 것”(Remember me.)과 복수할 것을 명령한다.

유령. ... 이렇게 해서 잠을 자다가 나는 내 동생의 손에 생명과,
왕관과 왕비를 한꺼번에 모조리 빼앗겼을 뿐 아니라,
죄가 한창 만발하고 있던 시기에 성찬식도, 고해성사도,
종부성사도 받지 못하고, ... 내 머리에 이승에서 저지른 온갖 과오를
그대로 이고 심판장으로 끌려나오게 되었다.
오 두렵구나! 오 무서운 일!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
덴마크 침실이 육욕과 저주받을
근친상간의 소굴이 되게 내버려 두지 마라. ...
 ...곧 작별을
고해야 하겠다. 반딧불의 그 열기 없는 불빛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니 새벽이 가까워진 모양이다.
잘 있거라, 잘 있거라, 잘 있거라, 날 기억하라.
[유령 땅 속으로 사라진다. 햄릿이 미친 듯이 무릎을 꿇고 앉는다.]

“나를 기억하라”는 명령을 햄릿은 당대의 가장 움울한 화두인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로 인식했다. 필자가 앞의 글에서 이미 밝힌 그 어휘 놀음의 실상을 아래에 다시 한 번 옮긴다. 독자들이 상기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 무엇을 잊지 말라는 것인가?

무엇을 잊지 말며, 무엇을 기억하라는 것인가? 햄릿이 다른 기억들은 다 지우고 자신의 뇌리에 이렇게 깊이 인각시키는 혼령의 명령은 무엇인가? 햄릿이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것이 복수인가? 그럴 것이다. 드러난 대사로 판단하면 그러하다. 그러나 숨겨진 간단한 수수께끼 하나만 풀면 사정이 달라진다.

유령이 뱉은 작별인사, “날 기억하라”(Remember me). 이 명령은 햄릿에게 좌우명이 되었다. 그런데 이 명령이 그 함의의 변이를 일으킨다! 유령은 죽은 자의 모습을 한 비실체이기에 유령이 지칭하는 ‘나’(me)는 ‘죽음’(mori)이다. 따라서 유령이 뱉는 “나를 기억하라”는 말은 ‘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유령이 당대의 그 음울한 시대정신인 ‘memento mori’를 햄릿에게 명했다. 유령이 뱉은 ‘Remember me’는 라틴어 ‘memento mori’의 영역(英譯)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 수수께끼가 수긍이 되면 이제부터는 『햄릿』 읽기가 달라진다.

결국 햄릿의 뇌리에 각인된 것은 복수만이 아니다. 유령이 명(命)한 당대의 화두, “죽음을 기억하라”가 뇌리에 동시에 각인된 것이다. 많은 독자들을 의아해하게 만들고, 비평가들이 경이로운 분석력으로 해석해 내려 했던 ‘복수의 지연’, 그 ‘지연’의 주된 원인이 의외의 것, 즉 유령이 뱉은 “나를 기억하라”라는 명령에서 비롯되었음을 발견하게 되면 이어지는 이야기도 그 맥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햄릿이 보다 근원적인 화두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햄릿의 뇌리에서 이 근원적인 ‘화두’가 ‘복수’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쉽사리 발견할 수 있다. 이 ‘화두’가 ‘복수’보다 우위를 점한 예들이 극 속에 즐비하다.

● 시종장(Lord Chamberlain) 폴로니어스의 죽음

사랑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햄릿이 오필리어를 가혹하게 내친다. 그리고 자신은 광증을 연기하기 시작한다. 오필리어가 실성할 까닭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극중 궁전내의 모든 연회를 주관하는 시종장 로드 챔버린(Lord Chamberlain)의 지위에 있는 폴로니어스는 극중 햄릿에게 전혀 우호적이지 않다. 이 시종장은 극의 시작부터 왕의 명령으로 햄릿의 거동을 염탐하고 왕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한다. 햄릿의 연인인 오필리어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왕위찬탈자인 현왕의 충복(忠僕)에 불과하다. 극의 큰 흐름에 밀려 드러나지 않는 희극적 아이러니 하나를 밝혀두자. 이 시종장 폴로니어스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맡은 직책에 충실하듯 연극 전문가이다. 대학시절에는 배우로도 활동해 줄리어스 시저 역을 맡기도 했고 “꽤 훌륭한 배우라는 평판도 들었다”(3.2.98-104). 궁전에 초대된 유랑극단의 배우들을 햄릿에게 소개하며 이 시종장이 이 극단이 해 낼 수 있는 연극의 장르들과 배우들의 능력을 소상히 열거한다. 연극 전문가로서의 식견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이다.

폴로니어스. … 비극, 희극, 사극, 전원극, 전원극적 희극,
역사적 전원극, 비극적 사극, 비극적 희극적 사극적 전원극은 물론 어떤 극이든
종류를 가리지 않고 무제한 공연할 수 있는 천하 명배우들,
세네카의 극을 공연해도 너무 심각하지 않고, 플로터스의
극을 공연해도 너무 경박해 지는 일이 없으니, 규칙에 따라
쓰인 극에든, 자유분방한 즉흥극에든 이만한 배우들이
달리 없는 줄로 아옵나이다. (2.2.392-398)
... tragedy, comedy, history, pastoral, pastoral-comical,
historical-pastoral, tragical-historical,
tragical-comical-historical-pastoral,...(392-395)

“비극적 희극적 사극적 전원극”(tragical-comical-historical-pastoral)이라는, 당대 영국 무대에서 공연되었던 조야한 장르까지 햄릿에게 알려 주었던 이 연극 전문가가 휘장 뒤에서 연극 『햄릿』의 주인공 햄릿의 말을 엿듣다 햄릿의 칼에 찔려 즉사한다. 극중 제일 먼저 목숨을 잃는 인물이다. 당대 셰익스피어가 이끌었던 극단 이름이 ‘시종장의 충복들’(Lord Chamberlain’s Servants)이었고 로드 챔버린(Lord Chamberlain)은 극단의 후원자였다. 극단의 후원자가 자신의 후원을 받는 극중 배우 햄릿에 의해 첫 번째로 목숨을 잃는 괴이한 아이러니가 생겨났다.

햄릿의 분노를 이해하기 위해 이야기 한 가닥을 살펴야 한다. 폴로니어스는 햄릿이 위장(僞裝)하는 광증의 진위를 간파하느라고 순전한 딸 오필리어를 미끼(decoy)로 이용한다. 햄릿이 거니는 복도에 딸을 “풀어”(I’ll loose my daughter to him)(2.2.162) 놓아 둘이서 나누는 대화를 왕과 함께 휘장 뒤에 숨어 엿듣는다. 폴로니어스가 왕의 사악한 목적에 충성하느라 딸을 거리의 여인처럼 “풀어”놓은 것이다. 햄릿이 이 계략을 감지한 직후부터 그에게 오필리어는 외양과 실재가 다른 또 한 명의 적이 되었다.

유령의 고유한 역할은 산 자들에게 존재의 허망함과 소멸을 투영하는 일이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유령은 우주가 감응할 만한 괴변(怪變)이나 변란(變亂)을 예고하는 역할을 했다. 호레이쇼에 의하면 쥴리어스 시저(B.C. 100-44)가 암살당하기 직전에 “무덤들은 임자를 잃어 텅 비어 있었고, 수의를 휘감은 시신들은 꽥꽥거리고 로마거리를 헤매고 다녔다”(1.1.118-119). 이로부터 70여년 후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했을 때도 무덤들이 열렸고 잠자던 성도들이 일어나 ‘거룩한 성’에 들어간 것으로 기록되었다 (Matt. 27:52-3).

햄릿 부왕의 유령은 그 역할에 있어 이 고유의 범주를 넘었다. 이 유령은 마땅히 있어야할 무덤 속을 벗어나 덴마크 왕궁 성루에 나타나 파수병들을 공포로 질리게 하고 아들과 대면해 복수를 명한 것으로 인해 극은 풍비박산이 됐다. 인간사에 초자연적 존재인 유령이 끼어 든 것이다. 호레이쇼는 유령의 실체와 그 위험을 감지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유령을 “마음의 눈을 혼란시키는 티끌”(A mote it is to trouble the mind’s eye)(1.1.115)이라고 경고했고, 성루에서 부왕의 혼령과 대면하려고 달려가는 햄릿을 극구 만류했다. 햄릿이 유령을 포기하고 상념의 대상을 바꿀 기회였다. 햄릿과 유령과의 대면에서 선한 것이 교감될 가능성이 없음을 호레이쇼는 알고 있었다. 이 만류는 무시되었고 햄릿이 유령과 대면하면서 파국이 시작된 것이다.

Macbeth Seeing the Ghost of Banquo by Théodore Chassériau (자신이 죽인 뱅코우의 유령을 쳐다보는 맥베스)(Macbeth 3.4.47-72)
Macbeth Seeing the Ghost of Banquo by Théodore Chassériau (자신이 죽인 뱅코우의 유령을 쳐다보는 맥베스)(Macbeth 3.4.47-72)

● 요릭의 해골

극이 드러내는 죽음의 실상은 두 가지 형태다. 하나는 지금까지 언급한 유령이고, 다른 하나는 오필리어의 무덤에서 묘파는 인부가 파헤치고 집어 던지는 해골이다. 유령이 실체가 없는 환영(幻影)인 반면 해골은 실체이다. 햄릿이 유령에 매몰되어 죽음의 실체를 잊고 있다가 극의 말미에 그 실체와 마주한다. 햄릿 부왕의 존재가 유령이 아니라 해골로 나타났으면 햄릿의 반응이 어떠했을까? 부왕의 유골이 부왕의 혼령만한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인가? 유령만큼 해골이 극의 액션을 주도했을 것인가? 대답은 부정적이다. 이 질문들에 답을 제공할 장면이 있다. 묘파는 인부가 오래된 무덤에서 해골을 하나 파내어 햄릿에게 건네면서 그것의 주인이 햄릿 부왕의 어릿광대였던 요릭(Yorick)이라고 알려준다. 이 요릭은 어린 햄릿을 키우다시피 했다. 이 해골을 집어 살피며 옛 기억을 떠올리는 햄릿이 최소한 연민의 정은 드러내야 한다. 실상은 이러하다. 이 해골은 이미 인부로부터 존경과는 거리가 먼 대접을 받는다.

묘파는 인부. 이 미친놈에게 염병이나 걸려라! 그 놈이 한번은 내 머리에
라인산 포도주를 병째로 들어부었지. 이 해골은, 나리,
요릭의 해골이오. 국왕의 어릿광대였던 그 놈.
...
햄릿. 저런, 가련한 요릭, 나는 이 자를 알고 있었네. 호레이쇼,
무궁무진한 재담, 기막힌 상상력을 지닌 자였지. 이 자는 날
자기 등에 천 번도 더 업고 다녔네. 그런데―이제
상상만으로도 구역질이 나네. 이걸 보니 속이 뒤집혀 지네.
내가 수도 없이 입 맞추었던 입술이 여기 달려
있었지.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던 그 재담, 그 익살,
그대의 노래, 그 신명나던 재치는 다 어디로 갔는가?
그대가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을 조롱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말인가? 아래턱은 빠져 달아나 버리고?
이제 마나님의 내실에 들어가서 전해 줘라. 한 치나 얼굴에 분칠을
해도 필경 이 꼴이 된다고. … (5.1.173-188)

이 어릿광대는 생전에 어린 햄릿을 수도 없이 등에 업었고(he hath bore me on his back a thousand times)(5.1.180), 햄릿은 지금은 떨어져 나가고 없는 그의 입술에 수도 없이 입을 맞추었다(Here hung those lips that I have kissed I know not how oft)(5.1.182-3). 사실상 그는 햄릿 부왕보다 더 햄릿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풍모를 지녔던 인물이었다. 이런 그에게 햄릿이 드러내는 감정은 솟구치는 메스꺼움뿐이다. 햄릿이 묘파는 인부의 태도에 동조하는 것이다.

요릭의 해골은, 유령을 휘감은 신비가 벗겨져 나간, 죽음의 실체이다. 요릭은 극의 첫 페이지 등장인물(Dramatis Personae) 난(欄)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사랑했으나 유명을 달리한 모든 이들의 얼굴을 대변하고 있다. 죽은 부왕의 유령을 추종하는 동안 햄릿은 유령에게 닥쳤던 필연적 부패를 잊고 있었다. 햄릿이 죽음의 실체는 밀어 둔 채 죽음의 허상에 매몰되었고 그 결과는 대파국이었다. 파괴력은 죽음의 실체(해골)가 아니라 죽음의 허상(유령)에서 발휘된 것이다

음모와 유혈의 복수로 인한 주요 등장인물 전원의 죽음은 이 유령의 방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방문으로 인해 아버지 햄릿, 아들 햄릿, 연극 『햄릿』이 한 줌 먼지로 되돌아가는 죽음의 길로 “기어들었다.” 맥베스의 기념비적 시구(詩句)가 『햄릿』을 마무리하는데 이렇게 요긴하게 차용될 수 있음은 신비이다.

맥베스.                   ...
내일, 그리고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은,
이렇게 잔걸음치며 매일 매일,  
정해진 시간의 마지막 순간을 향해 기어가고,
우리가 지나온 모든 어제들은 바보들에게 한줌 먼지로 남는
죽음의 길을 비추고 있다. 꺼져라, 꺼져라, 덧없는 촛불이여!
인생이란 한낱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
무대 위에 머무는 동안은 우쭐대고 안달 부리지만  
이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가련한 배우. 그것은 바보가
들려주는 이야기, 소리와 격정으로 가득 차 있으나,
아무 의미 없는 것. (5.5.26-28)
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
Creeps in this petty pace from day to day,
To the last syllable of recorded time;
And all our yesterdays have lighted fools
The way to dusty death. Out, out, brief candle!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And then is heard no more: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햄릿』의 주요 인물들이 격분해서 외치던 소리들은 이제 “아무 의미도 없고”(Signifying nothing), “인생은 바보가 지껄이는 이야기”(it is a tale / Told by an idiot)가 되고 말았다. 여전히 우리가 기억할 것은 극의 대파국이 실체 없는 유령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함에도 『햄릿』의 가치는 여전할 것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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