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룡 교수의 셰익스피어 이야기] 『햄릿』(10)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김해룡 승인 2020.06.19 15:32 | 최종 수정 2020.06.22 10:00 의견 0

목차
#프롤로그 - ‘메멘토 모리’의 뿌리 찾기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아나모피즘
#종교개혁의 상황을 빗댄 은유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요릭의 두개골을 들 있는 햄릿(Sarah Bernhardt). [Lafayette Photo, London / Public domain]

● 3막 3장. ‘휴브리스’(hubris, ὕβρις), ‘오만’(overconfidence)

유령이 햄릿에게 이 기이한 기다림을 명령하지 않았다. 햄릿이 “덴마크 침실이 육욕과 저주받을 근친상간의 소굴이 되게 내버려두지 말라”(1.5.82-3)는 유령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대신 햄릿이 상황에 대한 과신의 결과로 결정한 이 ‘지연’은 햄릿에게 재앙적 결과를 남긴다. 이 지연은 ‘위험한 과신(overconfidence)이나, 오만, 또는 신에 대한 도전의 행위’ 등으로 요약되는 ‘휴브리스’(hubris, ὕβρις)가 자행된 결과이다. 그리스 고전 비극이나 셰익스피어 비극들은 ‘휴브리스’를 자행한 비극의 주인공들이 파국을 맞는 것으로 대단원이 장식되었다.

고전 비극의 주인공들에게 ‘휴브리스’는 불가피한 성격상의 특질이다. 이들은 예외 없이 ‘휴브리스’를 자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맞닥뜨린다. 햄릿은 기도하는 클로디어스 왕의 외양(appearance)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위험한 과신’, 즉 ‘휴브리스’가 발휘된 것이다. 햄릿이 기도하는 왕은 자신의 영혼을 정화시키고 있다고 믿기에 살려주었고, 반면 이어진 장면에서는 휘장 뒤에 숨은 폴로니어스를 그 신분도 모른 채 찔러 죽였다.

왕의 기도의 ‘실재’는 어떠한가? 햄릿이 기도하는 왕과 맞닥뜨리기 직전의 왕의 기도가 이러했다. 햄릿이 듣지 못한 부분이다.

. ... 그러나, 아, 이제 와서 무슨 기도를
드릴 수 있단 말인가? ‘추악한 내 살인죄를 용서해 달라고?’
그럴 순 없다. 나는 여전히 살인을 해서 얻은 것들-
내 왕관과, 나의 야망, 그리고 내 왕비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악으로 얻은 것들을 지니고 있으면서 죄만 용서받을 수 있는가?
                                 ...오, 죽음 같은 칠흑의 가슴이여!
아, 덫에 걸린 내 영혼은,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칠수록
더 깊이 빠져들어 가는구나! (3.3.51-69)

햄릿이 기도하는 왕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지난 회(9회)에 기록한 바((3.3.73-95)의 ‘치명적 지연’을 결정하고 퇴장한 직후에 왕이 기도를 포기한다. 기도가 되질 않는 것이다. 이 선언도 햄릿이 듣지 못한다.

. 내 말은 허공으로 날아가고, 생각은 지상에 머물렀다.
생각이 담기지 않는 빈말은 하늘에 닿지 않는다. [퇴장] (3.3.97-98)

이 기도에서는 “결코 구원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기도는 하늘에 닿지 않아 왕의 영혼은 정화 되지 않았다. 햄릿이 복수를 결행할 조건이 구비된 것이다. 왕의 기도를 청취했느냐 여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햄릿은 1막 2장 선왕의 장례식 이후, 검은 상복의 ‘외양’ 속에 숨은 실재를 발견하고 그로인한 혐오감을 주체하지 못했다. 니오베처럼 온통 눈물에 젖어 남편의 시신을 따를 때 신었던 신발이 미처 닳기도 전에 어머니가 “근친상간의 더러운 잠자리로 뛰어든”(1.2.157) 그 실재에 햄릿이 경악했던 것이다. 이 경험 만으로라도 햄릿은 기도하는 왕의 외양에 현혹되지 말았어야 했다.

왕비의 재혼 이후로 햄릿은 진저리치며 ‘외양’을 불신한다. 이런 성향의 햄릿을 현혹시킨 것이 왕의 기도하는 ‘외양’인 것은 극이 노정하는 아이러니 중 으뜸이다. 치명적인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이 아이러니가 극의 주요인물 일곱 명의 생명 값이기 때문이다.

● ‘외양’(appearance)과 ‘실재’(reality)

의미심장하게도 극은 외양 즉, 유령(apparition)의 출현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외양은 실재와 거의 동류였다. 이 유령을 통해 실재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유령의 폭로로 인해 클로디어스가 장악한 덴마크 왕궁의 빛나는 외곽이 허물어졌다. 허물어진 틈 사이로 햄릿이 몰랐던 사실/실재들이 쏟아져 나왔다. 새 왕은 혐오스러울 뿐 만 아니라 부왕을 죽인 살인자로 밝혀졌다. 어머니 왕비는 근친상간을 범했을 뿐 아니라 간음의 혐의를 받을 만한 행위를 했다. 이 왕실에서는 장례식과 결혼식이 구분되지 않고, 삼촌과 아버지 사이에 경계가 없음이 드러났다.

궁전내의 모든 연회를 주관하는 시종장(Lord Chamberlain)의 지위에 있는 폴로니어스는 햄릿에 전혀 우호적이지 않다. 오필리어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왕위찬탈자인 현왕의 시종에 불과하다. 극의 큰 흐름에 밀려 드러나지 않는 희극적 아이러니 하나를 밝혀두자. 시종장 폴로니어스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맡은 직책에 충실하듯 연극 전문가이다. 궁전에 초대된 유랑극단의 배우들을 햄릿에게 소개하며 이 연극 전문가가 당대 영국 무대에서 공연되었던 연극의 장르들을 소상히 열거한다.

비극, 희극, 사극, 전원극, 전원극적 희극,
사극적 전원극, 비극적 사극, 비극적 희극적 사극적 전원극,
고전극, 세네카의 극, 플로터스 극, 즉흥극... (2.2.392-397)
... tragedy, comedy, history, pastoral, pastoral-comical,
historical-pastoral, tragical-historical,
tragical-comical-historical-pastoral,...(2.2.392-395)

“비극적 희극적 사극적 전원극”(tragical-comical-historical-pastoral)은 그 형식을 상상하기 쉽지 않은 장르이다. 당대에 공연되었던 저질의 오락극을 희화화한 장르일 것이다. 이 연극 전문가가 휘장 뒤에서 연극 『햄릿』의 주인공 햄릿의 말을 엿듣다 그의 칼에 찔려 즉사한다. 극중 제일 먼저 목숨을 잃는 인물이다. 앞의 글에서 밝힌 바대로 당대 셰익스피어가 이끌었던 극단이 ‘시종장의 충복들’(Lord Chamberlain’s Servants)이었고 시종장은 극단의 후원자였다. 이 후원자의 보호 하에 극단은 왕실에서 공연하는 특혜를 누린 것이다.

유령이 주도한 폭로의 과정 중에 햄릿의 연인인 오필리어는 여전히 홀로 순전하고 결백하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는 햄릿이 위장하는 광증의 진위를 간파하느라고 딸 오필리어를 미끼(decoy)로 쓴다. 햄릿이 거니는 복도에 딸을 “풀어”(I’ll loose my daughter to him)(2.2.162) 놓아 둘이서 나누는 이야기를 왕과 함께 휘장 뒤에 숨어 엿듣는 것이다. 왕자 햄릿의 사랑 고백을 “입에 발린 맹세”(1.3.117)라 여기고, “처녀로서 몸가짐을 더욱 신중히 하라”(1.3.121)고 딸에게 충고했던 폴로니어스가 왕의 사악한 목적에 충성하느라 딸을 거리의 여인처럼 “풀어”놓는 것이다.

햄릿이 이 계략을 감지한 직후부터 오필리어는 외양과 실재가 다른 또 한 명의 적이 되었다. 이 상황이 햄릿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딜레마였는지는 5막 1장의 오필리어의 무덤 장면에서 드러난다. 오필리어의 시신을 매장하기 직전, 무덤 안에서 레어티스가 여동생 오필리어의 시신을 안은 채 오열하며 동생을 죽게 만든 햄릿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숨어 이 광경을 살피던 햄릿이 무덤 속으로 뛰어들며 자신의 사랑을 토로한다.

햄릿. 난 오필리어를 사랑했다. 사만명의 오라비가
그들의 사랑을 모조리 합쳐서 덤벼도 내 사랑에는 당하지
못할 것이다. 오필리어를 위해 네놈은 뭘 할 테냐?
...
울겠느냐, 싸울 테냐, 단식을 할테냐, 네 옷이라도 찢을 테냐.
식초라도 마시겠느냐, 악어라도 뜯어먹을 테냐?
나라면 그렇게 할 테다. 이곳에 통곡하려고,
그녀 무덤 속으로 뛰어들어 날 면목 없이 만들려 왔느냐?
오필리어와 함께 산 채로 묻히고 싶다면 나도 그렇게 하겠다...(5.1.264-274)

햄릿은 외양과 실재의 괴리를 견디지 못한다. 그로인해 그는 “사만명의 오라비”의 사랑을 합친 것보다 더한 사랑을 했던 오필리어를 실성으로 몰아간 대사를 뱉고 만다. 그녀를 ‘미끼’로 여겼던 것이다.

햄릿. 수녀원으로 가시오. 아니면, 그대는 죄인을
낳고 싶단 말이오? 난 스스로는 꽤 덕을 갖춘 인간이라 여기지만
어머니가 날 낳지 않았더라면 하고 바랄만큼
스스로 죄책감이 드는 죄를 지니고 있소. 나는 지독히도 오만하고,
복수심에 차 있으며 야심에 들떠있고, 내가 생각해 보았거나, 그 모습을
상상했거나, 또는 실행기회를 엿보았던 것들보다도
더 많은 죄를 지니고 있소. 왜 나 같은 미물이 천지간을 기어 다녀야
한단 말이오? 우린 모두 악당들, 아무도 믿지 마시오.
수녀원으로 가시오. (3.1.121-130)

만약 오필리어가 ‘외양’대로 순결하면 살인, 근친상간, 배신이 횡행하는 덴마크에서 그녀가 거할 곳이란 수녀원 밖에 없다. 그곳에서 수절하며 “죄인”을 낳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반면, 그녀가 ‘외양’대로가 아니고 실재가 ‘미끼’라면, 수녀원(nunnery)이라고 불렸던 매음굴이 그녀가 있을 곳이다.

● 5막 2장. 아이러니의 결말

오필리어를 희생시키며 까지 외양과 실재의 차이를 뼈저리게 학습했던 햄릿이 기도하는 왕의 ‘외양’에 현혹되었다. 외양이 실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이 아이러니가 치명적인 것은 극의 마지막 장면이 입증한다.

햄릿은 영국으로의 항해 도중 호송자로 나선 두 친구의 짐 속에서 자신을 처형하라는 칙서를 발견했다. 그 즉시 그는 자신 대신 두 친구가 처형되도록 칙서를 다시 써서 봉인한다. 이후 극적인 반전을 통해 햄릿은 그 배에서 빠져 나와 덴마크로 돌아 왔고 친구 호레이쇼를 만난다. 둘은 함께 묘지를 방문했다가 오필리어의 장례식에서 햄릿은 레어티스와 오필리어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다툼을 벌이고 뒤이어 햄릿을 죽이려는 왕의 계략에 걸려 레어티스와의 검술 시합에 응하게 된다.

항해와 레어티스와의 조우 사이에 4막의 일곱 장(scenes) 전부와 5막 1장이 흘렀다. 이 긴 시간 동안 무대에서는 햄릿이 사라졌다. 햄릿의 부재 동안 오필리어의 실성이 도를 더해 가다가 결국 개울의 깊은 곳에 미끄러져 오필리어가 익사한다. 그 직전에 아버지 폴로니어스의 사망 소식에 레어티스가 프랑스로부터 귀국해 왕에게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지자 왕이 레어티스를 설득해 모든 불행의 원인이 햄릿임을 주지시키고 둘은 햄릿을 제거할 음모에 착수한다.

항해 도중 극적인 사건을 겪은 햄릿이 변한 모습으로 무대에 다시 등장했다. 많은 셰익스피어 전문가들이 이 변화를 인정한다. 문제는 변화가 무대 밖에서 일어났다는 점이다. 햄릿의 부재 동안 무대의 등장인물 누구도 그의 동정이나 변화를 관객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객은 햄릿이 변화된 동기 등은 모른 채 변한 모습만 목격하는 것이다. 햄릿이 호레이쇼에게 전해주는 항해 중 모험담(5.2.1-62)으로는 변화의 동기를 이해할 수 없다. 무대 위에서의 부재로 인해 생긴 이 공백이 메워져야 햄릿의 재등장 이후의 언동이 이해될 것이기에 상상 만으로라도 이 공백을 채워야 한다.

칼더우드(Calderwood)의 상상력이 이 공백을 채웠다. 그에 의하면 햄릿의 변화를 이끈 원천은 영국으로의 항해 중 그가 호송자들의 짐 속에서 발견한 왕의 칙서, 즉 자신을 처단하라는 집행 영장이었다. 이 영장을 읽는 순간 햄릿의 뇌리에 죽음은 더 이상 추상적이거나 알 수 없는 ‘Not to be’가 아니었다. 죽음은 단두대에서 ‘무딘 도끼’에 찍혀 떨어져 나간 자신의 머리가 나뒹굴고, 호송의 임무를 완수한 두 친구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영문도 모른 채 피를 뿜어내는 자신의 머리를 쳐다보는 선명한 실재가 된 것이다. 다시 무대에 등장한 햄릿이 호레이쇼에게 일러 준 그 칙서의 말미에는 “이 칙서를 읽는 즉시 잠시도 지체하지 말고, 아니, 도끼날을 갈 동안도 지체하지 말고 그(햄릿)의 목을 칠”것을 명하고 있었다.

● Let be

상상의 죽음을 체험한 햄릿은 더 이상 자신과 세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대신 숙명에 몸을 맡기는 정신세계를 갖추었다. 불확실성과 미스터리, 의혹들을 더 이상 파헤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들과 함께하며 자족하려 한다. 레어티즈와의 검술시합에서 햄릿이 패해 목숨을 잃을 것을 우려한 호레이쇼가 시합을 만류하자 햄릿이 이렇게 반응한다.

햄릿. 그럴 필요 조금도 없네. 전조(前兆) 따위는 무시해도 좋아. 참새
한 마리 떨어져 죽는 데도 각별한 섭리가 있는 법. 죽음이 지금 오면,
장차 오지 않을 것, 장차 오지 않을 것이면, 지금이 그 때일 것이다.
지금 오지 않으면, 언제든 오고야 말 것. 대비만이 우리가 할 전부.
...일찍 떠난들 무슨 상관이겠나? 섭리대로 둘 밖에. (5.2.215-220)
Not a whit, we defy augury: there's a special
providence in the fall of a sparrow. If it be now,
'tis not to come; if it be not to come, it will be
now; if it be not now, yet it will come: the
readiness is all: ...what is't to leave betimes? Let be.

이 대사 이전에 햄릿은 삶의 유한성부터 인정했다. 햄릿의 안위를 염려하는 호레이쇼에게 “인간의 삶이란 어차피 ‘하나’하고 셀 동안도 못되네.”(And a man’s life’s no more than to say ‘one’)(5.2.74)라고 친구를 위로했다. 그는 더 이상 독백을 뱉지 않는다. 우연히 생기는 모든 일들을 수긍하며, 삶의 종말을 결정짓는 신의 뜻을 기다리고, ‘참새 한 마리 떨어져 죽는’ 것에서 신의 특별한 섭리를 살핀다. 이어 자신의 죽음을 자신에게 초연히 귀띔한다. “일찍 떠난들 어떠하겠는가? 섭리대로 둘 밖에.”

변화는 더 이어진다. “To be”와 “Not to be”사이에서 우유부단했던 햄릿이 “Let be”를 읊조리는 것이다. “Let be”는 자기 추구와 우주적 의심에서 벗어나 자기와 세상을 수용하는 수사이다. 극의 첫 대사, “거기 누구냐?"(Who’s there?)와 함께 정체성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햄릿이 오필리어의 무덤에 뛰어들며 처음으로 정체성을 선언한다. “나는, 덴마크의 군주 햄릿이다”(This is I, Hamlet the Dane.)(5.2.250). 자기 수용의 선언인 것이다. 가장 셰익스피어적인 경구 “대비만이 우리가 할 전부”(readiness is all)는 변화된 햄릿의 정신세계를 아우르는 수사적 아이콘이다. 삶의 끝을 인내하고 대비하라는 것이다. 삶의 끝을 신의 뜻으로 맞아들이라는 것이다.

『리어 왕』(King Lear)의 에드가(Edgar)는 적으로부터 두 눈이 뽑혀 소경이 된 아버지 그로스터(Gloucester)가 극의 말미에 자살을 시도하자 “다 익는 것이 인간이 할 전부”(Ripeness is all.)(5.2.11)라고 외치며 아버지를 질책한다. 인간들은 세상에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떠날 때도 역경을 감내하며 ‘다 익어 떨어질 때까지 인내로 대비해야한다는 것’(Ripeness is all)이다. 신이 떨어질 때를 정할 때까지 익은 채 기다리는 것이 오직 인간의 할 몫이라는 것이다.

극의 끝 장면이 이러하다. 인간 정신사에 한 획을 그은 햄릿의 세 시간에 걸친 종횡 무진한 상념 이후, 극의 끝 장면 십분 동안 주요 등장인물은 다 죽는다. 누이를 실성해 죽게 만들고 아버지를 죽인 햄릿에 분노하고 있는 레어티스를 왕이 회유해 햄릿과 검술시합을 벌이도록 계략을 꾸몄다. 진검으로 하는 진검 승부이다. 왕의 계략대로 레어티스의 칼에는 독약을 입혀 두었다. 햄릿이 갈증을 느끼면 마시도록 독이 든 포도주도 마련되었다. 시합 도중 이 포도주를 왕비가 마신다. 마지막 숨을 거두며 왕비가 포도주에 독이 들었다고 외친다. 햄릿이 먼저 독 묻은 칼에 찔리고 이내 둘 다 상대의 공격으로 칼을 바닥에 떨어뜨린 후 무심결에 서로 바뀐 칼로 싸우다가 레어티스도 독 묻은 칼에 찔린다. 레어티스가 숨을 거두며 이 검술시합이 왕의 계략에 의한 것임을 폭로한다. 이를 듣는 순간 햄릿이 독이 든 포도주를 왕의 입에 쏟아 넣어 왕을 죽인다. 오필리어의 가문이 멸절했다. 숨을 거두기 직전 햄릿은 덴마크 왕실을 폴란드 왕자에게 넘긴다. 왕가가 종언(終焉)을 고한 것이다. 임종의 순간 햄릿은 친구 호레이쇼에게 “고통 중에도 이 가혹한 세상에 살아남아 내 이야기를 세상에 전해 주게”(5.2.352-4)라고 부탁한다. 무슨 이야기를 전해 달라는 것인가?

이제 극에서 드러나지 않는 복수 지연의 심층적 원인을 유추해 볼 때이다. 극의 내/외적 요인이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슐레겔(Schlegel)은 “햄릿이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있을 뿐 누군가를 살해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그리고 이 복수 지연 이후 햄릿이 ‘왕의 행위와 자신이 행할 복수 사이의 완벽한 조화’의 순간을 고대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행동하지 않고 상념에 젖어 있는 것이 햄릿으로서는 할 수 있는 전부인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햄릿이 마지막 순간까지 복수를 염원했다는 취지의 논평을 접해 보지 못했다. 스펄전(E.E. Spurgeon)은 “『햄릿』에는 죽음(death)과 병(sickness)에 대한 심상(이미저리)이 압도적이다.”(Shakespeare's Imagery)라고 적었다. 이미저리를 추적한 이 연구에 ‘복수’는 그 틈입력에서 하위를 차지한다.

위의 단락에서 소개한 인용문들은 햄릿이 유령의 명령 “날 기억하라”(Remember me)를 ‘메멘토 모리’로 인식했으리라는 필자의 가설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극에 만연한 죽음에 대한 심상을 ‘메멘토 모리’의 결정체로 해석할 수는 없다. 죽음의 심상은 ‘메멘토 모리’의 정서와 동류일 뿐이다. ‘메멘토 모리’가 발현되는 통로가 달리 있다. ‘복수의 지연’이 그 통로이다. ‘메멘토 모리’에 경도된 햄릿에게 복수는 후순위이거나 허울인 것이다. 이 ‘지연’을 의무로 만드는 극의 외적 요인이 존재한다.

James Ⅵ &Ⅰof England [John de Critz / Public domain]
James Ⅵ &Ⅰof England [John de Critz / Public domain]

● 제임스 6세와 햄릿- ‘지연’을 의무로

엘리자베스 여왕은 1603년 3월 24일 44년간의 통치 위업을 뒤로한 채 영면에 든다. 당일 여왕의 유언에 따라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James Charles Stuart; 1566.6.19.~1625.3.27)가 영국 왕위를 이어 받으며 영국에는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된다. 새 왕 등극과 함께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합병(the union of the Scottish and English crowns)되고 제임스 6세의 칭호가 제임스 1세로 바뀐다. 이후 5월 11일부터 셰익스피어의 극단은 ‘왕의 충복들’(King’s Servants)로 승격되며 제임스 왕이 극단의 후원자가 된다. ‘시종장의 충복들’에 이어 ‘왕의 충복들’은 왕실에서 공연할 특혜를 계속 누렸고, 셰익스피어의 극은 오직 ‘왕의 충복들’만 공연할 수 있도록 한 특허권도 확보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왕실 내 두 곳의 연회장에서 이 극단은 130여회의 공연을 치렀다.

위험도 동시에 따랐다. 극단과 작가는 정치적 주제를 피하거나 이미 인쇄된 경우는 수정해야 했고 친왕실적 입장을 취해야 했다. 대부분의 셰익스피어 비극과 사극들이 여러 판본의 인쇄본을 남긴 배경에는 극단과 작가가 위험에 처해지는 상황을 모면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이 수정, 보완을 거쳐 극은 덜 위협적인 것으로 다듬어 졌다. 최소한 왕자인 햄릿이 복수의 음모를 면밀히 꾸며 왕을 살해하는 장면은 연출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제임스 왕의 모후(母后)가 비운의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Mary, Queen of Scots, 1542.12.8.~1587.2.8.)이다. 메리는 생후 6일째 부친인 제임스 5세가 사망하자 여왕이 된다. 이후 스코틀랜드의 국사는 섭정에게 맡겨진 채, 어린 여왕은 다섯 살의 나이로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의 외교적 연대를 구축하기 위한 구실로 프랑스로 보내지고 16세에(1558) 프랑스의 왕세자 프랑시스와 결혼해 프랑스의 왕비가 된다. 1560년 12월 어린 프랑스 왕이 요절하자 왕비는 미망인이 되었다가 1561년 8월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여왕의 신분을 되찾는다. 가톨릭을 고수했던 여왕은 종교개혁이 완성되어 신교국이 된 고국에 귀국하는 순간부터 귀족 세력과 이길 수 없는 종교적 다툼에 휩싸인다.

구금 중인 메리 여왕(Mary, Queen of Scot) [Nicholas Hilliard / Public domain]
구금 중인 메리 여왕(Mary, Queen of Scots) [Nicholas Hilliard / Public domain]

귀국 4년 후, 여왕은 경솔한 재혼(1565)을 감행한다. 상대는 사촌간인 단리 스튜어트 (Henry Stuart, Lord Darnley, 1545.12.7.~1567.2.10.)였고 둘은 같은 조모 마가렛(Margaret,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 왕의 왕비이며 헨리 8세의 누나)의 손자, 손녀 사이였다. 이 둘 사이에 아들 제임스가 태어나고(1566. 6.19) 이 아들은 후에 제임스 6세가 되어 여왕의 왕좌를 이어받게 된다. 이 결혼은 근친이라는 이유로 교황청의 인정을 받지 못한 채 결행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강력한 반대 의견을 스코틀랜드 왕실에 전했다. 결혼 초부터 단리는 왕국을 아내인 여왕과 공동으로 통치할 권한인 ‘혼인에 따른 왕권’(Crown Matrimonial)을 요구했고 여왕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이 권한에는 이후 단리가 여왕보다 오래 생존할 경우 그가 왕이 되는 권한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거절당한 단리는 분노와 질투심으로 여왕의 개인 비서인 데이빗 릿지오(David Rizzio)를 임신한 여왕의 면전에서 죽이는 잔인함을 드러낸다. 여왕 태내의 생명을 이 비서의 씨로 여겼던 것이다. 이 일로 결혼은 파경에 이르고 단리는 도망자의 처지가 된다. 이후 제임스가 태어난 지 8개월 후인 1567년 2월 단리의 은신처가 폭파되고 단리가 살해당한다. 그로부터 3개월 후 메리 여왕은 남편 단리의 살해범으로 지목된 보스웰 백작(James Hepburn, 4th Earl of Bothwell, 1534~ 1578.4.14)과 세 번째 결혼을 한다. 이 결혼과 더불어 여왕은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은 여왕 퇴위를 이미 결정한 상태였고, 1567년 7월 24일, 여왕은 감금되어 퇴위 당한다. 소수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스코틀랜드를 탈출한 메리는 숙모인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신변을 위탁하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메리를 단리 살해의 공범으로 지목해 그녀를 외딴 성에 유폐시켜 버린다. 이후 감금된 메리 여왕을 영국 왕으로 옹립하려는 가톨릭 세력이 여러 차례 소탕된다. 결국 영국 왕위에 따를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 왕실의 스파이 마스터에 의해 조작된 음모로 메리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1587.2.8.). 죄명은 엘리자베스 여왕 살해 음모를 획책한 대역죄였다. 유폐된 지 18년 6개월 만이다.

메리의 반역죄 재판(1586. 10.14-15) 장면. 문밖에서 안을 살피는 엘리자베스 여왕. 여왕이 메리의 목숨은 살리려 했으나 판결을 번복하지 않았다. [British Library / CC0 / public domain]
메리의 반역죄 재판(1586. 10.14-15) 장면. 문밖에서 안을 살피는 엘리자베스 여왕. 여왕이 메리의 목숨은 살리려 했으나 판결을 번복하지 않았다. [British Library / CC0 / public domain]

『햄릿』 속의 거트루드 왕비와 1603년에 새로 군림한 제임스 1세 왕의 어머니 메리 여왕이 같은 이력을 지녔다. 두 여성 공히 남편 살해범과 혼인했고 “근친상간의 침상”을 공유했다. 당대 런던 관객들에게 메리 여왕의 일탈과 단리의 살해, 그리고 여왕의 세 번째 결혼은 최대의 관심사였다(Roland Mushat Frye). 제임스 왕의 등극 전, 셰익스피어의 극단(‘시종장의 충복들’)은 그들의 후원자(Lord Chamberlain)였던 헌스돈 백작(Lord Hunsdon)을 통해 제임스 왕의 생애와 생각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다. 헌스돈 백작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거를 제임스 왕에게 알리기 위해 스코틀랜드로 달려갔던 영국 사절단의 한 명이었다. 『햄릿』(1600)에는 사악한 왕에게 보복하는 스토리가 담겼다. 이 극을 쓰는 동안 셰익스피어의 뇌리에 메리 여왕과 단리, 그리고 보스웰의 최후가 인각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제임스 왕의 반응을 예측해야 했다.

윈스탄리(Lillian Winstanley)는 엘리자베스 시대 말기에 관객들은 『햄릿』을, 단리 살해 전후의 스코틀랜드의 내분을 소재로 한 극으로 이해했다고 피력한다. 프라이(Roland Mushat Frye)는 “제임스 왕의 부친 단리의 살해와, 여왕과 살해범의 급속한 결혼에 대한 기억을 지닌 관객은 이 극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드러내기 마련이다”라고 적었다. 제임스 왕은 햄릿의 전형(典型)이다. 역사적 인물과 가공의 인물이 동일한 기억과 경험을 공유한다. 왕권신수설을 신봉했던 제임스 왕은 사악한 군주라도 그를 죽일 권한이 신민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다고 여러 차례 기록했다. 이 왕이 극단의 후원자가 되었다. 이 왕의 목전에서 비록 무대 위일지라도 햄릿이 사악한 왕을 죽일 수 없게 된 것이다. 햄릿이 보복을 지연시키는 것이 극단을 보호하는 방책 중 하나였을 것이다.

제임스 1세 왕의 등극과 때를 같이 하여 런던에는 이 왕이 쓴 글과 책들이 인쇄되어 쏟아져 나왔다. 특별히 복수, 유령, 전쟁, 일대일의 격투에 대한 왕의 의견을 적은 것들이었다. 이로 인해 『햄릿』은 정치적으로 위험한 연극이 되어 버렸다. 『햄릿』 속에는 상기한 네 가지 항목 중 세 항목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의롭지 못한 왕에 대한 복수”(revenge against an unjust king)에 관하여 제임스 왕은 “폭군이라 할지라도 신민이나 신민들의 집합체, 즉 의회에게 그 왕을 제거하거나 보복할 명분이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왕의 ... 사악함이 결코 그 왕에 의해 다스림을 받도록 운명 지어진 신민들로 하여금 왕의 심판자가 되도록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개 개인이 자신이 겪은 사적 피해를 보상받으려 역시 일개 개인인 적대자에게 사적 보복을 행하는 것이 위법일진대 (신은 보복의 칼을 오직 군주에게만 주었기에) 백성이 칼을 사용할 권한이 자신들에게 있는 것으로 여겨, 보복의 칼은 백성에게 속하지 않고 군주에게만 허용되었음으로, 공공의 군주에게 그 칼을 휘두른다면 이 얼마나 더 위법한 일인가.
(『관대한 군주의 진정한 법』《The True Lawe of Free Monarchies》, 1598)

상기한 의견을 적시했던 제임스 왕은 왕권신수설을 신봉했다. 이 신념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 있다. 아버지 폴로니어스의 죽음에 의혹을 품고 있던 레어티스가 추종자들을 이끌고 클로디어스 왕을 상대로 반란을 시도한다. 이 레어티스를 응대하는 왕의 반응이 이러하다.

국왕. ... 이유가 무엇이냐, 레어티스,
네가 이렇게 거대한 반역을 도모하는 이유 말이다?
그를 놓아 주시오, 거트루드. 과인의 일신은 염려할 것 없소.
국왕의 주위에는 하늘의 가호가 울타리처럼 둘러싸여 있어서,
역적이 혹 기웃거려 볼 수는 있을지언정,
그 뜻을 이룰 수는 없는 법. (4.5.120-125)

극에서 아이러니는 연연히 이어진다. 이 왕은 “하늘의 가호가 울타리처럼 둘러싸여” 있었던 햄릿 선왕을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칼로” 위법하게 죽였다.

‘왕의 충복들’은 공연을 통해 새로운 군주이며 극단의 후원자인 제임스 왕을 불쾌하게 하거나 불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될 처지에 처했다. 상기한 국왕의 위선적 선언에 의하면 왕은 복수의 대상이 아니다.

김해룡 교수

제임스 왕의 복수에 관한 의견과 『햄릿』 속의 지연되는 복수와의 상관관계를 살피고자 역사의 한 페이지가 인용되었다. 비평의 관례상 텍스트 외적인 자료로 주인공의 정신을 가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왕이 속한 궁전의 관객들을 상대로 위험한 공연을 펼쳤던 셰익스피어로서는, 햄릿이 극중극에서 클로디어스 왕의 안색을 살폈듯, 제임스 왕의 안색 살피기가 극단의 생존을 가름하는 현실이었다. 이 현실을 무시할 수 없기에 텍스트 외적인 자료를 극 읽기에 포함시키는 것도 큰 일탈은 아닐 것이다.

이야기를 맺자면, “나를 기억하라”(Remember me.)는 유령의 명령은 햄릿의 뇌리에 ‘복수’와 ‘죽음’을 기억하라는 명령으로 양분되어 새겨졌다. 복수보다 죽음에 더 경도된 햄릿이 복수를 지연할 수밖에 없는 연극적 상황에 처했고 현실 세계의 왕이 (현실이든 무대 위에서든) 복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후원자 왕의 생각이 감행하지 못할 복수를 앞둔 햄릿에게 지연의 빌미로 작용한 것이다. 유령이 이 지연의 단초를 제공했고 주인공 햄릿이 유령의 명령에 충실히 따랐다. 셰익스피어가 집필 단계부터 연극 내/외적 요소들을 감안한 결과이든, 혹은 수정과 가필의 단계를 거쳐서이든 『햄릿』은 “덜 위협적인” 극으로 순화된 것이다. 햄릿이 남긴 찬연한 빛을 발하는 상념들은 유령의 명령, ‘메멘토 모리’로 인해 영글고 수확된 열매들이다.

마지막 회(11회)에 “To be or not to be”를 읽을 것이다. 『햄릿』을 읽기 위해 필히 숙고해야 할, 그리고 우리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의문이다. 더불어 필자가 의문을 제기한 “무슨 이야기를 전해 달라는 것인가?”에 답할 것이다.

<전 한일장신대 교수 / 영문학 박사(셰익스피어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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