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룡 교수의 셰익스피어 이야기] 『햄릿』(6) 종교개혁의 상황을 빗댄 은유㊥

김해룡 승인 2020.04.26 21:04 | 최종 수정 2020.04.27 16:46 의견 0

목차
#프롤로그 - ‘메멘토 모리’의 뿌리 찾기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아나모피즘
☞#종교개혁의 상황을 빗댄 은유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사후(死後)에 꿈을 꾸다니?
#햄릿, 죽다

맥베스와 세 마녀의 조우. [Théodore Chassériau / Public domain]

● ‘은유’(隱喩, metaphor)

소제목 ‘종교개혁의 상황을 빗댄 은유’를 살필 순서이다. 이를 위해 ‘은유’의 쓰임새와 효과를 개략적으로나마 살피고자 한다. 은유의 사전적 정의는 이러하다.

직유(直喩, similes)가 ‘A는 B와 같다’나 ‘B 같은 A’와 같은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 A를 다른 대상 B에 동등하게 비유하는 것이라면, 은유는 ‘A는 B이다’나 ‘B인 A’와 같이 A를 B로 대치해 버리는 비유법이다. 은유는 표현하고자 하는 것, 즉 원관념(tenor)과, 그 속성을 공유하는 보조관념(vehicle)을 동일시하여 다루는 비유법이다.

직유는 단순하다. “오, 내 사랑은 붉디붉은 장미와 같다”(“O My Luve's like a red, red rose.”)거나 “그는 여우처럼 간교하다”(He is as cunning as a fox)에서와 같이 ‘사랑’이 ‘장미’와, ‘그’와 ‘여우’가 ‘~와 같다’ ‘~처럼’으로 인해 동등하게 비유되면 직유이다.

은유는 B(보조관념)를 통해 A(원관념)를 드러내는 비유법이다. ‘응축된 유사(類似)’( condensed analogy)라고도 한다. 여러 비유법보다도 함축성의 정도에서 단연코 우위를 점한다. 독자로서도 면밀한 읽기(close reading)를 해야 한다. 맥베스가 뱉는 아래의 대사를 보자.

맥베스. ... 꺼져라, 꺼져라, 덧없는 촛불이여!
인생이란 한낱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
무대 위에 머무는 동안은 우쭐대고 안달도 부리지만
이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가련한 배우. 그것은 바보가
들려주는 이야기, 소리와 격정으로 가득 차 있으나,
아무 의미 없는 것.

Macbeth. ... Out, out, brief candle!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And then is heard no more: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5.5.23-28)

‘인생’(Life)이 원관념이다. ‘덧없는 촛불,’ ‘걸어 다니는 그림자,’ ‘무대 위에서 이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가련한 배우,’ 그리고 ‘바보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보조관념을 이루고 있다. 던컨 왕을 시해한 이후 삶의 의미가 사라져버린 맥베스에게 인생은 ‘덧없는 촛불,’ ‘걸어 다니는 그림자,’ ‘가련한 배우,’ 그리고 ‘바보가 들려주는 이야기’일 뿐이다. 봉건제 왕국에서 왕은 만물의 중심이었다. 맥베스는 던컨왕의 총애를 받는 개선장군이었다.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왕이 되실 분!”이라는 마녀들의 유혹과, 왕관에 미혹된 아내의 부추김에 떠밀려 자신의 성(城)에 손님으로 왕림한 왕을 시해하고 만다. 그 왕을 시해함으로써 맥베스의 인생에는 “술 찌꺼기만 남아”(2.3.94) 있는 형국이 되었다. 시해 직후, 맥베스가 이 형국을 이렇게 고백한다.

맥베스. ...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의 삶속에 의미를 지닌 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다 하찮은 장난감에 불과한 것.
명예도 미덕도 다 죽어 사라졌다.
생명의 포도주는 다 쏟아졌고, 술 창고에는 찌꺼기만 남아
뽐내고 있다. (2.3.90~94)

이 고백에는 ‘던컨 왕’이라는 원관념이 없으나 ‘생명의 포도주’는 ‘던컨 왕’과 짝을 이루는 보조관념이다. 중요한 것은 이 쌍들이 셰익스피어 전에는 한 번도 은유로 맺어진 일이 없었다는 점이다.

● 세상은 온통 무대

보조관념을 일컫는 ‘vehicle’은 속성을 같이하는 매개물, 혹은 전달수단을 뜻한다. 이 ‘전달수단’ 즉 보조관념을 통해 원관념을 더 선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한 번도 맺어진 일이 없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새로운 관계로 결합될 때 은유는 그 가치를 지니게 된다. 아래의 대사는 영문학사에서 가장 흔히 인용되는 은유의 한 예이다.

제이퀴즈. 이 세상은 온통 무대이며,
그리고 남녀 모두는 한낱 배우인 것.
등장하는가 하면 퇴장도 하고,
살아 있는 동안 한 명이 여러 역을 하는데,
그가 출연하는 막은 7막. (2.7.140-144)

Jaques. All the world's a stage,
And all the men and women merely players:
They have their exits and their entrances;
And one man in his time plays many parts,
His acts being seven ages.
-Shakespeare, 『뜻대로 하세요』(As You Like It)

세상은 ‘글자 뜻 그대로’(literally) 무대는 아니다. 따라서 ‘세상은 온통 무대’라는 표현은 은유이다. ‘세상’은 원관념이고 ‘무대’는 보조관념이다. ‘남녀 모두’는 2차 원관념이고 ‘배우’는 2차 보조관념이다. 세상이 무대로 비유되었고 ‘무대의 속성’이 세상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세상을 무대라고 단언함으로써 셰익스피어는 세상과 무대의 유사성을 견주어서 세상의 작동원리와 그 속에 속한 인간들의 행위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전하려고 한 것이다. 이 은유에는 더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 운명이 우리 각자에게 맡긴 배역을 알아채라는 것이다.

역시 셰익스피어에 의해 처음으로 ‘세상’과 ‘무대’가 은유로 엮였기에 이 은유는 지금도 생명력이 있다. 이미 굳어져 형성 당시의 생명력이 사라진 식상한 은유는 ‘죽은 은유’(dead metaphor)라고 불린다. 가령, ‘꿈’을 희망의 의미로, ‘소’를 우직함의 의미로 쓰는 경우이다.

● 에피소드, 혹은 이야기가 은유의 기능을 하는 경우

은유가 어휘들로만 짝을 이루는 경우를 앞에서 살폈다. 다른 경우의 은유가 있다. 에피소드, 혹은 이야기가 통 채로 은유의 기능을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 경우 드러난 이야기는 보조관념이며 원관념은 숨겨져 있다. 이 글의 소(小)주제인 ‘종교개혁의 상황을 빗댄 은유’에서 원관념은 영국의 종교개혁이다. 필자의 발견이다. 당연히 종교개혁이라는 용어는 이야기에 없다. 단서가 될 만한 표현도 없다. 이 글의 독자들이 각자의 독서 경험상 아직 종교개혁을 빗댄 이 정도의 은유를 발견하지 못했으면 이 은유는 생명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필자가 문제로 삼는 3막 4장의 이야기가 ‘종교개혁의 상황을 빗댄’ 에피소드일 것인지를 밝혀보자. 이해를 위한 최소한의 지식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종교개혁(1517, Reformation)을 주도했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존 칼뱅(John Calvin, 1509–1564), 그리고 존 녹스(John Knox, 1510–1572) 등은 교회를 세우고 금으로 장식하느라 면죄부를 팔며 서민들의 고혈을 짜내는데 혈안이 되었던 로마 가톨릭 교회를 ‘바빌론의 창부’(Whore of Babylon)라고 불렀다. 바빌론은 이교도 국가인 로마 제국을 일컫는 은유였다. 곧 드러나지만 ‘창부’는 하나님과 멀어진, 종교개혁 당시의 로마 가톨릭 교회를 뜻한다. 1646년에 재정된 개신교의 신경(信經, Protestant creed)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에 교황은 아예 ‘적그리스도’(Antichrist)로 적시되었다. ‘창부’의 출처는 구약 예언서이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죄악에 물들기 전의 예루살렘을 ‘사랑스럽고 오묘한’(lovely and delicate) 여인에 빗대었다.

내가 시온의 딸을 사랑스럽고
오묘한 여인에 빗대었나니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그녀에게로 몰고 와
주위에 장막을 치고 각기 그 처소에서 먹이리로다. (〈예레미야〉 6:2~3)

I have likened the daughter of Zion to a lovely
and delicate woman. The shepherds with their flocks shall
come to her. They shall pitch their tents against her
all around. Each one shall pasture in his own place.〈Jeremiah〉( 6:2~3)

‘시온의 딸’은 예루살렘의 의인화이다. 성서주석가들은 ‘여인’을 ‘교회’의 은유로 해석한다. 교회를 아름다운 여인에 빗댄 것이다. 이 아름다운 여인, 즉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고 우상숭배에 치우치면 그 호칭이 바뀐다. ‘창부’(harlot)로 불리는 것이다. 선지자 호세아가 죄악으로 인해 타락한 교회에 절망해 이렇게 탄식한다.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 (〈호세아〉 1;2)

Go, take yourself a wife of harlotry
And children of harlotry,
For the land has committed great harlotry
By departing from the Lord. (〈Hosea〉 1:2)

이에 더하여, 성서는 이 음란한 교회의 위치까지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또 네가 본 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요한계시록〉 17:18)
And the woman whom you saw is that great city which reigns over the kings of the earth. (〈Revelation〉 17:18)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은 의심의 여지없이 로마 가톨릭 교회이다. 이런 성서적・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바빌론의 창부’는 부패한 로마 가톨릭 교회를 일컫는 은유로 굳어졌던 것이다.

<전 한일장신대 교수 / 영문학 박사(셰익스피어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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