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프롤로그 - ‘메멘토 모리’의 뿌리 찾기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아나모피즘
#바니타스 정물화(vanitas still lifes)
#종교개혁의 상황을 빗댄 은유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사후(死後)에 꿈을 꾸다니?
#햄릿, 죽다
●『햄릿』 1막 4~5장.
햄릿이 밤마다 왕궁 성루에 유령이 출몰한다는 소문을 듣는다. 아버지인 선왕(先王)을 장례 치른 직후이다. 유령을 목격한 파수병과 친구들은 햄릿에게 이 유령이 돌아가신 선왕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전한다. 그날 밤 햄릿은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이 아버지의 유령과 맞닥뜨린다. 이 조우만으로도 햄릿은 몸속 핏줄들이 “사자의 힘줄처럼 단단하게 굳어가는”(1.4.83) 것을 느낀다. 공포와 전율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햄릿이 유령으로부터 경천동지할 비밀을 듣는다. 지금 왕좌에 앉아 있는 햄릿의 삼촌 클로디어스(Claudius)가 자신(선왕)을 독살하고 왕좌를 찬탈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사악한 삼촌은 형수였던 왕비를 자신의 왕비로 맞아들이기 까지 했다. 햄릿의 어머니 거트루드 왕비가 삼촌의 아내가 된 것이다.
햄릿에게 복수를 명하고 유령이 사라진다. 친구 호레이쇼가 넋을 잃고 있는 햄릿을 발견하고 둘은 유령의 존재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호레이쇼도 유령의 존재를 목격했다.
호레이쇼. 오 맙소사, 이런 놀랍고 괴이한 실체가 있다니.
햄릿. 그러니 그 존재를 나그네로 잘 맞아들이게.
이 천지간에는 자네의 학문으로는, 호레이쇼,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네. (1.5.172-5)
Hor. O day and night, but this is wondrous strange.
Ham. And therefore as a stranger give it welcome.
There are more things in heaven and earth, Horatio,
Than are dreamt of in your philosophy.
유령과 대면한 이후 햄릿의 사유가 전과 같을 수 없다. 상상할 수도 없는 것들이 천지에 널렸음을 알았다. 이 황망 중에 햄릿의 말장난이 빚어내는 은유의 기술이라니! 호레이쇼가 뱉은 'strange'(괴이한)에 햄릿이 r을 보태 'stranger'(나그네)로 의미 변화시켜 관객들에게 기독교 윤리를 되새기게 했다. 나그네 영접은 기독교 윤리를 이루는 덕성 중 하나이다. ‘지극히 작은 자'가 '나그네가 되었을 때 그를 영접한 자'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나라를 상속'받는다(Matthew 25:35). 그래서 “그 존재를 나그네로 잘 맞아들이라”는 것이다. 그 ‘존재’는 유령이다. 유령은 죽음의 현현(顯現)이다. 정리하자면, 죽음을 나그네로 후히 영접하라는 말이다. 햄릿이 농담으로 뱉은 이 말은 극이 ‘메멘토 모리’에 빠져 들 것임을 알리는 신호이다.
우울한 상념으로 채워졌던 햄릿의 사유(思惟)에 이 ‘나그네’로 인해 꿈과 내세를 아우르는 괴이한 형이상학이 보태졌다. 이 형이상학은 “to be or not to be”에서 실현될 것이다. 『햄릿』 초입에 우리가 살필 그림 〈대사들〉(The Ambassador) 속에도 많은 것이 있다. 유령과 조우할 기백이 있으면 보이는 것들이다.
햄릿이 가동시키는 사유의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많은’ 것들을 즐기고 향유하려는 독자/관객들이라면 잠깐만 인내심을 발휘하시라. 그래서 지극히 단선적이지만 영국 왕실의 역사 한 가닥을 따라가볼 일이다. 소위 시대정신이라는 것을 엿보자는 것이다. 햄릿의 말대로 무릇 연극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니 이 거울(『햄릿』)에 비칠 당대 시대상의 한 가닥이라도 미리 보자는 것이다. 셰익스피어 출생 전 역사도 무관하다. 시대정신이라는 것이 단시간에 생성·종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시대상을 음미하다가 햄릿처럼 유령과 만나는 행운을 거머쥘 수도 있다. 그리하면 햄릿이 친근해진다. 그에게 동정도 갈 것이다. 이 시대상을 재현하는 복잡한 역사의 가닥들 중 그림 〈대사(大使)들〉과 연결되는 것이면 더할 나위 없다. 여러 가닥 중 아래의 것이 선택되었다. 이 가닥의 주요 인물은 헨리 8세와 그의 첫 왕비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그리고 둘째 왕비 앤 볼린(Anne Boleyn)이다. 조연급도 두 명이 있다. 프랑스 대사 장 드 땅드빌과 조르즈 드 셀브가 그들이다.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1485-1536)
1533년 1월, 헨리 8세의 영국 왕실.
헨리 왕이 밀어붙이는 캐서린 왕비와의 강제이혼이 초읽기에 들었다.
캐서린은 아라곤(Aragon) 왕국의 왕 페르디난드 2세(Ferdinand II)와 카스티유(Castile) 왕국의 이자벨라 여왕(Isabella I of Castile) 사이에 태어난 왕녀이다. 두 왕국은 스페인으로 통합되기 전의 왕국들이다. 그녀는 1501년 영국으로 건너와 16세 나이에 헨리 튜더(나중에 헨리 8세)의 형이며 왕위 계승자인 15세의 웨일즈 공 아서(Arthur, Prince of Wales)와 결혼한다. 캐서린과 아서(1486-1502)는 각각 3세와 2세 때 이미 약혼을 한 관계였다. 영국과 스페인이 전쟁을 피하고 결속을 다지기 위해 두 왕실이 결정한 정혼이었다. 그러나 결혼 5개월 만인 1502년 4월에 병약했던 아서가 사망한다.
16세에 미망인이 된 캐서린은 아라곤으로 돌아가야할 처지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시부(媤父)인 헨리 7세(1455-1509)도 난제를 안게 되었다. 결혼 약정에 의해 캐서린의 귀책사유가 아닌 사정으로 캐서린을 아라곤으로 보낼 경우 아라곤 왕실이 영국 왕실에 지급하기로 한 결혼 지참금 20만 두캇(ducat)을 도리어 영국 왕실이 아라곤 왕실에 지급해야 하는 것이다. 결혼 당시 아라곤 왕실은 영국 왕실에 10만 두캇(ducat)만 지급한 상태였으나 완불 여부는 문제되지 않았다. 미망인을 고국으로 보낼 경우 영국 왕실이 20만 두캇 전액을 필히 지급할 것으로 약정되었던 것이다.
이후 1년이 채 지나기 전인 1503년 2월 11일, 튜더 왕조의 시조인 헨리 7세의 왕비이며 캐서린의 시어머니인 엘리자베스(Elizabeth of York)가 사망한다. 홀몸이 된 헨리 7세가 이내 아라곤이 지급을 미룬 10만 두캇을 다 받는 조건으로 며느리였던 캐서린과 결혼할 의지를 밝힌다. 헨리 7세가 「창세기」 38장의 이야기로부터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홀로된 며느리 다말이 시부인 유다를 유혹하여 자손을 얻는 이야기이다. 헨리 7세의 결혼의지는 캐서린의 아버지 페르디난드 왕에 의해 거부당한다. 거부의 명분은 둘 사이에 후손이 생길 경우 이 후손의 적법성이 보장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두 왕실의 측근들이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결국 형 아서의 죽음으로 왕위 계승자의 지위를 이어받은 헨리가 성인이 되면 캐서린과 혼인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아서가 죽었어도 캐서린은 여전히 헨리의 형수였다. 아서가 사망할 때 헨리는 11세였다. 왕실간의 정략결혼에 당사자의 의견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캐서린으로서는 인고의 세월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이 합의 이후 6년 동안, 헨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죄수 취급받으며 외진 성에서 가난과 외로움으로 기다림의 세월을 보냈다. 아버지 페르디난드 왕이 재정 압박으로 10만 두컷의 지급을 끝도 없이 지연시킨 것이 원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504년, 캐서린의 어머니 카스티유의 여왕 이사벨라가 사망한다. 영국 랑카스터 왕가의 왕녀였던 이사벨라는 페르디난드와 혼인하지 않고 영국에 남아 있었으면 헨리 7세를 제치고 영국 왕좌를 차지했을 인물이었다.
카스티유는 아라곤보다 훨씬 광대한 왕국이었다. 이 왕국이 여왕의 사망으로 인해 캐서린의 언니 조안나(Joanna, 1479-1555)에게 상속된다. 역사에 조안나는 ‘Joanna the Mad’(미친 조안나)로 기록되어 있다.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그녀는 섭정이었던 아버지 페르디난드에 의해 외진 성에 긴 세월 감금되기도 했다. 1516년 페르디난드 왕마저 사망하자 조안나는 아라곤의 여왕도 겸하게 되지만 동시에 그녀의 아들 찰스 1세가 어머니를 감금하고 통일된 스페인의 실질적인 왕이 된다. 조안나는 이후 39년 동안 감금되었다가 사망한다.
●헨리 8세(1491-1547)와 형수 캐서린의 결혼
이자벨라의 사망으로 캐서린의 값어치는 하락했다. 캐서린의 기다림은 결실 없이 끝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절망의 끝자락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감금 6년째인 1507년 캐서린에게 ‘영국 주재 아라곤 대사’라는 신분이 부여된 것이다. 캐서린의 모국에서 그녀에게 베푼 최후의 배려이자 궁여지책이었다. 유럽 역사상 첫 여성 대사가 탄생했다. 이 신분 상승이 영향을 끼쳤고 교황청의 허락으로 마침내 갓 왕이 된 헨리 8세와 캐서린은 1509년 6월 11일 결혼식을 올린다. 헨리가 18세, 왕비는 다섯 살 연상이었다. 형제의 미망인과의 결혼을 금기로 정한 레위기의 계명, ‘너는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18:16)가 결혼에 장애가 되자 캐서린은 첫 남편 아서와 육체적 결합이 이루어진 일이 없었음을 적극적으로 천명했다. 교회법은 육체적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결혼을 결혼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캐서린의 주장이 진실이면 그녀는 처녀이다. 첫 남편 아서가 병약했기에 캐서린의 항변을 교황청이 수락한 것이다.
캐서린은 학식과 정치적 식견을 갖춘 유능한 여인이었다. 후에 헨리 8세에게 정당한 재혼의 길을 터주기 위해 헨리와 캐서린의 이혼을 진두지휘했던, 캐서린의 적인,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이 그녀를 “여성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역사상의 모든 영웅들을 다 물리쳤을 것이다”(If not for her sex, she could have defied all the heroes of History)라고 격찬할 정도였다. 그러나 유능함과는 별개로 첫 출산 때부터 왕과 왕비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일곱 번의 임신, 한 명의 딸
결혼 다음해인 1510년 1월 캐서린이 여아를 사산한다. 다음해 1월 1일 그렇게도 기다리던 남아가 태어난다. 온 왕국이 축제의 열기에 쌓였다. 그러나 이 왕자가 52일 만에 죽는다. 이 불행은 헨리 왕뿐 아니라 전 영국민에게 큰 절망감과 상실감을 안겼다. 이 일을 계기로 헨리 왕의 마음은 왕비로부터 멀어진다. 1513년 초에 세 번째 임신이 공포되었다. 왕비의 임신에 아랑곳하지 않은 왕은 그해 6월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느라 프랑스로 떠나 버린다. 국사는 섭정 신분이 된 캐서린에게 다 맡겨 놓은 채였다.
헨리가 왕실을 비운 사이 같은 해 9월 3일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가 군대를 이끌고 영국을 침공한다. 해산을 바로 앞둔 캐서린은 중무장한 몸으로 전선으로 말을 몰았다. 그리고 영국군에게 승리의 열정을 돋우는 명연설을 남긴다. 전쟁 개시 2주 후인 9월 17일, 전선과 멀지 않은 곳에서 캐서린이 조산(早産)한다. 사내아이가 태어났고 이내 숨을 거두었다. 전쟁은 영국의 대승이었다. ‘프로든 필드 전투’(Battle of Flodden Field)에서 제임스 4세가 전사했다. 캐서린은 승리의 징표로 피 묻은 제임스 4세의 문장(Coat of Arms)을 프랑스에 있는 헨리에게 보낸다. 이 승전보에 헨리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헨리의 생각에 캐서린은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 아니라 온전한 순산에만 관심을 쏟아야 했다.
1514년 6월, 네 번째 임신이 발표되었고 다음 해 1월에 사내아이를 사산한다. 1515년 여름, 다섯 번째 임신이 발표되었고. 1516년 2월에 아무도 원치 않는 건강한 여아가 태어났다. 환영받지 못한 이 여아는 38년 후인 1554년에 영국 역사상 첫 여왕인 메리 여왕(1515-1558)으로 왕좌에 앉는다. 이 여왕은 5년 재임 기간 동안 헨리 8세가 이루어 놓은 종교개혁에 역행해 300명 이상의 개신교 목사들을 처형한다. 그녀에게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이 따라붙게 된 연유이다. 1558년 그녀는 자궁암을 임신으로 여긴 채 사망한다.
헨리가 다시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건강한 딸이 태어났으니 다음에는 사내아이 순서가 아니겠느냐고 믿었다. 그러나 1517년 여름, 여섯 번째 임신은 유산에 그쳤다. 이어 1518년 2월, 일곱 번째 임신을 통보한 33세의 왕비는 건강한 남아를 기원하며 성소로 머나먼 순례길을 다녀왔다. 이 열망을 비웃듯 1518년 11월, 허약한 여아가 출생해 몇 시간 후 사망한다. 더 이상의 임신은 없었다. 이 연이은 불운을 계기로 헨리 왕은 하나님이 자신의 결혼을 원치 않는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 <계속>
<전 한일장신대 교수 / 영문학 박사(셰익스피어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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