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룡 교수의 셰익스피어 이야기] 『햄릿』(3)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아나모피즘㊥ 천일의 앤

김해룡 승인 2020.03.16 13:52 | 최종 수정 2020.03.28 22:07 의견 0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 앤 볼린. [National Portrait Gallery / wikipedia]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 앤 볼린. [National Portrait Gallery / wikipedia]

목차
#프롤로그 - ‘메멘토 모리’의 뿌리 찾기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아나모피즘
#바니타스 정물화(vanitas still lifes)
#종교개혁의 상황을 빗댄 은유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사후(死後)에 꿈을 꾸다니?
#햄릿, 죽다

● ‘천일의 앤,’ 앤 볼린(Anne Bolene, 1501–1536)

남아왕위계승자를 더 이상 출산할 수 없게 된 캐서린은 왕비의 신분을 내려놓아야 했다. 통상적 수순은 폐위 이후 은둔이다. 아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헨리는 재혼을 서둘렀다. 1525년부터 헨리는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볼린에게 접근했다. 앤은 자신의 언니가 헨리 왕의 후궁 신분이었다가 쫓겨나는 비정함을 목격한 터였다. 따라서 앤은 왕이 교회법에 따른 정당한 이혼 절차를 밟은 이후 자신이 왕비가 되는 혼례식을 거행하기 전에는 몸을 허락하지 않을 것을 단호히 밝힌다.

헨리와 왕비와의 이혼이 여의치 않았다. 왕비로서의 권리를 포기하고 수녀원에서 은둔하라는 왕의 명령에 캐서린은 “하나님은 결코 나를 수녀원으로 부르지 않으신다. 나는 왕의 진실 되고 적법한 아내이다”라며 완강하게 맞선 것이다.

헨리는 자신의 결혼이 무효였음을 밝히는 것이 이혼보다 쉬울 것이라는 영감을 받는다. 왕위 상속자를 얻기 위한 그의 열망은 도를 넘었다. 유혈을 통해서라도 비정상을 정상으로 탈바꿈시키는 일련의 일이 진행된다. 그의 생각에 교황이 자신에게 선언한 결혼 허락은 오류였다. 자신의 결혼은 성경 「레위기」의 율법을 어긴 것이고 그는 벌을 받은 것이다.

누구든지 그 형제의 아내를 취하면 더러운 일이라
그가 그 형제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이 무자(無子)하리라.
(20:21).

따라서 그들의 결혼은 결코 성사되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왕은 캐서린과의 결혼이 원천 무효였음을 확신했다. 이 논리에 의해 어느 날 아침 헨리 왕은 자신이 여전히 총각임을 깨닫는다.

이후 교황 클레멘트 7세(Clement Ⅶ)로부터 자신의 결혼이 무효였음을 인정하는 칙령을 받기 위한 헨리 왕의 분투가 시작된다. 그러나 캐서린의 조카인 신성 로마제국 황제 샤를 5세의 영향력과 이혼을 금한 가톨릭의 교리가 합쳐져 헨리 왕이 갈구했던 칙령은 끝내 선언되지 않았다. 헨리 왕을 대신해 교황으로부터 혼인 무효 칙령을 받아내지 못한 울지 추기경(Thomas Wolsey)은 반역죄로 체포되어 처형당하기 직전 병사한다.

‘성자 에드워드 왕의 왕관’
‘성자 에드워드 왕의 왕관’

교황청에 대한 헨리의 반격이 시작된다. 1532년 11월 14일 헨리는 앤과의 결혼을 비밀리에 치렀다가 이듬해 1월 25일 공개적인 결혼 예식을 치른다. 교황 클레멘트 7세는 즉시 헨리와 토마스 크란머(Thomas Cranmer) 대주교를 파문한다. 헨리는 로마가톨릭과의 결별 절차에 돌입한다. 이로부터 4개월 후인 5월 23일, 캔터베리 대주교 크란머가 헨리 왕과 캐서린 왕비의 결혼이 무효였음을 선언한다. 그 5일 후, 대주교는 헨리와 앤 볼린의 결혼이 적법하게 치러졌음을 선언한다. 이후 1533년 6월 1일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개최된 대규모의 대관식을 통해 앤 볼린이 왕비로 등극한다. 이 대관식에서 앤 왕비에게 역대 영국의 군주들에게만 허용되었던 ‘성자 에드워드 왕의 왕관’(St Edward's Crown)이 수여되었다. 왕비의 임신은 외관상 뚜렷했고 태중에 남아(男兒) 왕위상속자를 품고 있으리라는 왕실의 열망이 왕비의 값어치를 한껏 높인 것이다. 지금은 영국의 엘리자베스 Ⅱ세 여왕이 이 왕관의 소유자이다. 1533년 9월 7일, 왕실의 기대를 저버리고 왕비는 여아를 출산한다. ‘피의 메리’가 사망하면 왕위를 이을 엘리자베스Ⅰ세 여왕이 될 여아였다.

Catherine of Aragon pleads her case against divorce from Henry VIII. Painting by Henry Nelson O'Neil.
헨리 8세와 왕비 캐서린의 결혼 적법성을 다투는 재판 장면. [Henry Nelson O'Neil / wikipedia]

● 혼인무효재판과 캐서린의 최후

1533년 5월 23일 왕과 캐서린 왕비의 결혼의 적법성을 다투는 재판의 실상과 그 결과는 이러하다. 이 재판은 왕의 최측근인 크란머 대주교가 주재했다. 일곱 번의 임신을 겪고 한 명의 딸을 출산한 캐서린 왕비와 헨리 왕의 결혼이 무효였음을 선언하기 위한 재판이었다. 캐서린은 크란머와 헨리 왕을 상대로 첫 남편 아서와는 육체관계가 없었음과 헨리 왕과 신방을 치를 때 자신은 순결한 처녀였음을 눈물로 호소했다. 이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둘의 결혼은 무효로 선언되었다.

그 즉시 헨리는 캐서린을 왕비에서 ‘웨일즈 공의 미망인 공주’(Dowager Princess of Wales) 신분으로 강등시킨다. 헨리에게 캐서린은 이제 죽은 형의 미망인일 뿐이다. 그녀는 외딴 성에 유폐된다. 딸인 메리와의 면담은 물론 서신 교환도 금지되었다. 헨리가 사신을 보내 캐서린에게 회유책을 내민다. 앤 볼린을 새 왕비로 인정하면 모녀(캐서린과 메리)에게 보다 나은 거처를 제공하고 둘의 만남을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이 회유책을 모녀가 동시에 거부한다. 1535년 12월 말경, 캐서린은 조카인 신성 로마 황제 샤를 5세에게 딸을 돌보아 달라는 편지와 헨리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긴다. 그리고 1536년 1월 7일 마지막 유배지였던 킴볼턴 성(Kimbolton Castle)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유례없는 애도 인파가 운집했다.

한스 홀바인의 앤 볼린 초상화.

● 앤의 몰락

캐서린의 장례식 날, 앤 왕비가 사내아이를 유산한다. 이 일 직후 캐서린이 헨리 왕이나 앤 왕비, 혹은 둘에 의해 독살 되었다는 풍문이 돌았다. 신분에 위협을 느낀 앤이 캐서린 모녀를 죽이겠다는 의도를 여러 번 드러낸 바가 있었다. 캐서린의 시신을 방부처리 하는 과정에 심장이 검게 변해 있는 것이 발견되자 이 독살 풍문은 다시 떠돌았다. 현대 의료 전문인들은 캐서린의 심장의 변색이 암으로 인한 결과였으리라고 추정한다. 암은 당시의 의료 수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병이었다.

1536년까지 앤 볼린은 세 번 연이어 유산을 겪는다. 실망한 헨리가 세 번째 결혼의 절차를 밟자 앤은 격렬하게 저항한다. 헨리는 앤과의 결혼을 종결시킬 단서를 찾기 시작했다. 1536년 5월 2일, 앤은 반역죄로 심문을 당하고 런던탑에 감금된다. 죄목은 간통, 근친상간, 국왕 살해 역모 등이었다. 모두 왕과 크롬웰이 조작한 범죄였다. 거짓 증언을 확보하기 위해 무고한 앤의 지인들에게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다. 배심원들 중에는 그녀의 첫 약혼자 헨리 퍼시(Henry Percy)와 그녀의 삼촌 노포크 공작 토마스 호워드(Thomas Howard)가 포함되어 있었다. 5월 12일 앤 볼린에게 반역죄가 선고되고 그로부터 나흘 후 그녀는 단두대에서 격정의 삶을 마감한다. 왕비로 등극한 후 대략 1,000일 후의 일이었다. 2주후인 5월 23일, 45세의 헨리 왕은 제인 세이모어(Jane Seymour)를 세 번째 왕비로 맞아들인다.

한스 홀바인의 2인 초상화 'Jean de Dinteville and Georges de Selve', 일명 '대사들' [Hans Holbein / wikipedia]

● 다시 1533년 1월, 장 드 땅드빌과 조르즈 드 셀브

영국 왕실에서 전개되는 종교 개혁과 헨리 왕의 재혼, 그리고 후계자 출산의 난항 등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나라는 프랑스였다. 두 나라는 영토 문제를 비롯해 여러 문제가 얽혀 있어 최근 까지도 전쟁을 치렀다. 영국 왕실에서 전개되는 내정을 다 꿰뚫고 싶어 했던 프랑스 왕이 대사들을 영국에 파견한다. 1533년 1월, 장 드 당뜨빌(Jean de Dinteville)이 런던에 도착해 이미 와있던 친구이자 대사인 조르즈 드 셀브(Georges de Selve)를 만난다. 이내 당뜨빌이 화가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1543)을 만나 인물화를 그려 달라고 요청하고 값을 치른다. 혼자가 아니라 친구를 함께 그리는 조건이다. 종전까지 그 사례가 없었던 2인 인물화이다. 그림 값을 알 수 있는 사료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 홀바인은 이미 국제적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독일 출신인 그는 스위스에서 몇 년 활동을 하는 동안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인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of Rotterdam)와 교제했고 그의 초상화도 그렸다. 영국으로 거처를 옮기자 에라스무스가 그를 영국 왕실에 소개해 그는 왕실에서 많은 그림을 남겼다. 화가와 두 대사는 여러 차례 그림의 배경을 장식할 오브제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했다. 이 그림이 완성되기를 갈망하며 당뜨빌은 외로움과 지병과 영국의 나쁜 기후를 겨우 견딜 수 있었다.

몇 달 후 폭 210cm, 높이 207cm의 대작 유화가 탄생했다. 이 걸작품에 〈장 드 당뜨빌과 조르즈 드 셀브〉(Jean de Dinteville and Georges de Selve)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일명 〈대사(大使)들〉(Ambassadors)이라고도 불렸다. 그림이 완성되자 당뜨빌이 그림을 들고 잠시 프랑스로 돌아간다. 이후 당뜨빌은 대사직으로 세 차례 더 영국을 방문했다. 영국 왕실을 염탐하는 일 외에 당뜨빌이 영국에서 무슨 임무를 수행했는지, 무엇을 겪었는지는 다음 회에서 언급할 것이다. 이 두 프랑스 대사의 역할을 이후 『햄릿』에서 햄릿의 친구 로젠크란츠(Rosencranz)와 길덴스턴(Guildenstern)이 이어 받는다.

김해룡 교수
김해룡

이 둘은 햄릿의 비텐베르그 유학 동기들이다. 왕의 요청에 아무 의심 없이 궁전에 들어 와 왕에게 대접받고 임무를 수행한다. 둘의 역할은 햄릿이 부리는 광기의 진위 여부를 염탐해 왕에게 보고하는 일이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이 둘이 프랑스 대사들과 다른 점은 햄릿이 이 둘의 임무를 첫 대면의 순간에 간파해 버린 점이다. 이제 곧 살피게 될 <대사들>에서 해골의 안와(眼窩)가 그림을 살펴보는 시선들을 이미 다 빨아들이고 있는 것과 같은 형국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은 감시당하는 햄릿이 자신들을 향해 품고 있던 분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이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죽는 이유도 모른 채 죽는다.

1890년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통해 런던 내셔날 갤러리(The National Gallery, London)가 이 그림을 매입할 때까지 이 그림은 350년간 프랑스 모처에 묻혀 있었다. 특기할 것은 백과사전 『위키피디아』가 장 드 당뜨빌의 개인사를 기록하면서 단 한 줄로 그를 “삶의 모토가 ‘메멘토 모리’인 인물”이라고 기록한 점이다. 다음 회에 우리는 이 기록의 신빙성을 살필 것이지만 추정에 의할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분명한 것은 이 인물이 독자와 햄릿을 연결시켜주는 교량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자, 이제 독자 제현들은 지루한 역사 읽기를 끝내고 〈대사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만 감상하고 『햄릿』을 펼칠 것이다. 독자 제현들은 셰익스피어의 정신에 배었던 당대 시대상과 시대정신에 조금이나마 친근해졌을 것이다. 혹 상징적 유령을 만나 사유 세계에 발생한 괴이한 변화를 즐기고 있는 독자도 있으리라 믿는다. 이제 햄릿을 만나는 일은 예사로운 일이며 우리의 사유세계와 그의 사유세계는 쉽사리 소통될 것이라 믿어도 무방하다. <계속>

<전 한일장신대 교수 / 영문학 박사(셰익스피어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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