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우주관의 역사에서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중세까지 절대 진리로 간주됐던 아리스토텔레스 우주관의 허구를 명백히 드러내고 새로운 우주관을 활짝 여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입니다.
갈릴레이는 또 ‘최초의 과학자’란 명칭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그는 근대 과학 방법론을 창시했고, 근대 역학의 기초를 쌓는 등 과학의 길을 열었습니다. “자연은 수학적 언어로 쓰여 있다.”는 그의 말은 근대 과학의 서곡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갈릴레이는 자신의 저서 『분석자 The Assayer』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주는 먼저 그 언어와 그 언어를 이루고 있는 자음과 모음을 배우지 않는 한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수학의 언어로 쓰여 있고, 그 철자는 삼각형, 원, 기타 기하학적 도형들이다. 그것 없이는 인간은 단 한 글자도 이해할 길이 없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어두운 미궁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다.”
코페르니쿠스 체계(태양 중심설, 지동설)를 증명하기 위해 심혈
갈릴레이는 우주관 혁명을 촉발시킨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1543)가 출판된 지 21년 후에 태어났습니다.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옳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1597년 케플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벌써 여러 해 전부터 코페르니쿠스 설을 따른다.”고 밝혔습니다.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로는 이해하기 곤란한 많은 점들을 설명해준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1572년, 1604년에 나타난 초신성, 1577년 태양계를 가로질러 왔다가 돌아간 거대한 혜성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이 타격을 입은 것은 사실입니다. 만약 아리스토텔레스의 '영원불멸의 완전한 천상계', '수정천구' 가설이 옳다면 하늘에 새로운 초신성이 나타나거나 혜성이 여러 행성 궤도를 가로질러 날아다니는 사건은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잘 알려진 대로 아리스토텔레스 우주관은 ‘생성·소멸하는 불완전한 지상계와 영원불멸하고 완전한 천상계’라는 관념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이 시대에는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이 신학적 교리처럼 위세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태양 중심 지동설)은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갈릴레이는 태양 중심설을 옹호하면서 당시 지식인들이 맹목적으로 추종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타파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갈릴레이의 무기는 망원경이었는데,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첨단무기였습니다. 갈릴레이가 망원경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1609년 7월 베네치아를 방문하는 길에서였습니다. 네덜란드 안경 제작자 얀 리퍼세이(Jhan Lippershey)가 한 해 전 가을에 발명해(엄밀히 말하면 재발명이다. 망원경은 이미 16세기 중반 레너드 딕스 Leonard Digges가 발명했으나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3배율인 망원경을 파리에서 장난감으로 판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우주관을 무찌른 첨단 무기 ... 망원경
갈릴레이는 이 장비가 자신의 연구 외에도 베네치아에 군사적으로나 무역상으로나 엄청난 중요성을 띠고 있음을 즉각 알아차렸습니다. 갈릴레이는 그 장비가 렌즈가 두 개 달린 대롱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는 곧바로 제작에 돌입해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아 고배율의 망원경을 만들었습니다. 두 개의 볼록렌즈를 사용한 리퍼세이의 망원경은 상이 거꾸로 보였던 반면,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하나씩 사용한 갈릴레이 망원경은 상이 정상적으로 맺혔습니다.
갈릴레이는 베네치아로 돌아와 의회에서 10배율의 망원경 시범을 보여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그 망원경을 총독에게 선물로 기증했습니다. 총독과 의회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평생 파도바대학 교수직을 보장해주었고, 연봉도 올려주었습니다. 갈릴레이는 5개월 뒤인 1609년 12월 20배율의 망원경을 제작했습니다.
1610년 갈릴레이는 20배율 망원경으로 목성의 가장 밝은 네 개의 위성을 발견했습니다. 같은 장비로, 그는 은하수가 수없이 많은 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특히 달의 표면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믿었던 것처럼 완전한 구(球)의 매끄러운 상태가 아니라 울퉁불퉁하며, 곳곳에 거대한 분화구와 수km 길이의 산맥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갈릴레이는 또 태양 표면에서 점들이 생겨났다 없어졌다 하는 현상도 발견했습니다. 달과 태양 표면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모든 천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처럼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같은 새로운 발견들을 담은 소책자 『별의 사자(使者, Sidereus Nuncius)』를 1610년 3월 출판했습니다. 이 책의 출간으로 갈릴레이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통해 확인한 사실들, 특히 태양에 흠집(흑점)이 나 있다는 사실은 이미 권위를 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상의 완벽함’이란 관념을 관속에 집어넣어 대못을 치는 역할을 했습니다.
갈릴레이의 새로운 발견은 반대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지동설)을 뒷받침해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달이 지구를 공전하고 있는 상태에서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것(2중 중심 회전운동)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럴 경우 지구와 달은 분리될 것이라며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 지동설을 부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이용해 목성 둘레를 돌고 있는 네 개의 위성을 발견함으로써 우주에 2개 이상의 많은 회전 중심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달이 지구를 공전하는 상태에서 지구가 목성처럼 태양을 공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 것입니다.
코페르니쿠스 태양 중심설의 결정적 증거 ... 금성 상변화
금성의 상변화(phase change) 발견도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갈릴레이는 피사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금성의 상변화를 발견했습니다. 상변화란 달이 초승달에서 반달 보름달 그믐달로 변화하는 것처럼 태양빛의 반사면에 따라 모양이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금성은 초승달처럼 보일 때가 보름달처럼 빛날 때보다 더 크게 보였습니다. 이는 초승달처럼 보일 때가 보름달처럼 빛날 때보다 지구에서 더 가깝다는 뜻입니다. 이런 현상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 체계처럼 금성이 태양을 공전한다고 가정해야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갈릴레이는 이 같은 발견들의 의미를 그의 책 『두 개의 주요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 영어: Dialogue Concerning Two Chief World System, 이탈리아어: Dialogo de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대화』)에서 논의했습니다. 그는 이 책을 지식인들의 언어인 라틴어가 아닌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이탈리아어로 써서 1632년 내놓았습니다. 논의되는 두 체계는 코페르니쿠스가 제안한 태양 중심 우주론(태양 중심설, 혹은 지동설)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 천동설 체계였습니다.
『대화』는 살비아티(코페르니쿠스 입장)와 심플리치오(프톨레마이오스 입장), 그리고 제3자인 사그레도 사이의 대화 형식입니다. 살비아티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 이름이기도 합니다. 심플리치오는 고대 그리스인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에 주석을 단 인물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특히 이 이름은 숙맥(simpleton)이란 뜻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지지한다는 점을 은근히 암시합니다. 갈릴레이는 심플리치오를 통해 권위를 잃어가는 성경과 천동설 체계를 옹호하게 만들었습니다. 제3자인 사그레도는 자신의 친구 이름으로 공평한 논평자로 설정되었지만 살비아티를 지지하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대화』의 인쇄는 1632년 3월에 끝났습니다. 갈릴레이는 책 몇 권을 곧바로 로마로 보냈습니다. 교황의 조카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 추기경은 갈릴레이에게, 그 책에서 매우 큰 즐거움을 맛보았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갈릴레이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우롱하는 것이라며 크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교황은 아마도 갈릴레이와의 논쟁에서 자신이 취했던 입장(갈릴레이와 교황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과학회인 린체이 Lincei 회원이었다.)을 심플리치오가 대변한다고 느꼈음에 틀림없습니다.
교황은 1616년 실시된 갈릴레이의 종교재판 문서 중 ‘코페르니쿠스 우주관을 신봉하거나, 지지해서도, 가르쳐서도 안 된다’는 기록을 찾아냈습니다. 갈릴레이를 로마로 불러들여 또다시 종교재판을 받게 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였습니다.
<'우주관 오디세이' 저자·인저리타임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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