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엄마 이야기(17) - 세 자매 중 가장 가난했던 엄마
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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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9 21:26 | 최종 수정 2021.01.29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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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사진에 막내인 내 여동생이 등장한다. 맨 앞줄 오른쪽에 앉은 누나가 8년 터울 아래인 동생 안나를 다정하게 무릎에 안고 있다. 나는 어릴 적 뭔가 못마땅한 듯 특유의 시니컬한 눈빛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다. 지금은 저렇게 쳐다보지 않는데 왜 어릴 때 나는 사진만 찍으면 저런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내 옆 아이가 깔고 앉은 저 튜브를 못가지고 놀아서 그랬을까? 가만히 보니 맨 뒷줄에 서서 계신 외할아버지를 빼고는 남자는 나 혼자다. 이 사진 속 여자 어린이들은 나한테 사촌들이다. 즉 우리 식구를 비롯해 엄마의 자매 식구들이 인천 앞바다인 덕적도에 모처럼 놀러가며 찍은 사진이다. 엄마는 외할아버지 바로 옆에서 모자를 쓰고 서 있다.
삶이 매우 궁핍하였을 텐데 엄마는 어디서 저렇게 패셔너블한 바캉스 모자를 쓸 수 있었을까? 원래 여고생 시절부터 모자를 좋아하셨지만 이 날 저 모자는 아무래도 작은 언니 것을 빌려 써서 쓴 것일 가능성이 크다. 나한테 작은 이모인 엄마의 작은 언니네 집은 어렸던 내가 실감할 정도로 무지무지 어마어마한 부자였다. 작은 이모네 집은 그야말로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다. 산업기반이 전무하던, 인천에 성냥공장밖에 없던 시절이었던 1960년대에 2층 양옥집에 살며 자가용, TV, 냉장고, 전화기가 있었다. 나한테 사촌인 인국이 형은 두발 자전거도 있었다. 작은 이모부가 인천 앞바다에 정박한 배로부터 인천항 육지까지 선원을 나르는 통선업과 선박청소업을 했는데 큰 돈을 버셨다고 들었다.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인천에서 열째 안에 드는 부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배가 몇 척이나 있었다고 한다. 인천 송도해수욕장도 아니고 그 당시 덕적도라는 섬으로 가는 피서 여행이 쉽지 않았을 텐데 작은 이모부가 배를 하나 특별히 내주셔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나한테 큰 이모인 엄마의 큰 언니도 그 당시 잘 살았다. 큰 이모와 큰 이모부 두 분 모두 학교 선생님이셨으니 작은 이모네처럼 큰 부자는 아니어도 경제적으로 큰 걱정없이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세 자매 중 막내인 엄마는 가장 힘들고 어렵게 살았다. 그나마 아버지가 신문사에 취직이 되어 조금 살만해졌으나 곤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20대 말에 접어든 엄마의 모습은 참으로 청초(淸楚)하시다.
<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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