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679)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3장 누님 또 누님들⑪

이득수 승인 2024.02.10 07:00 의견 0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멍하니 서서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던 백찬이가

“형수, 나도 감데이. 엄마 혼자 가면 눈이 어둡어서 불낼 줄도 모리고...”

들릴 락 말락 할 목소리와 함께 삽짝 문을 벗어나자

“아이구, 골치야. 막걸리나 한 되 받아 온나.”

일찬씨가 단숨에 한 주전자를 비우고 뭐라고 한참이나 소리치다 잠이 들었다.

그렇게 두 쪽으로 갈라진 집안이 마침 명절을 맞아 한 쪽은 김해처가로 한 쪽은 남창 친정으로 각각 떠나고 난 텅 빈집에 마침 만삭이 된 금찬씨가 언양장에 들렸다 잠깐 따로 방을 얻어나간 어머니의 얼굴이나 보려고 찾아간 것이 금방 산기를 느껴 엉겁결에 낳은 아이가 바로 외가에서 낳은 외식이었다. 그래도 버든에 큰어머니 상남댁과 정찬이네, 또 웃각단에 종찬씨가 살았지만 질정 없는 상남댁이나 용맹 없는 종찬이댁이 무얼 하나 조치를 할 입장도 못 되어 그거 벌벌 떨 뿐이고 마침 사람하나는 야무지고 착하고 조신한 우야어미 작동댁도 아이를 그만 낳을려고 장치한 루프가 올라붙어 부산의 큰 병원에서 수술만 하면 산다고 했지만 목숨 줄인 논을 팔 수가 없어 망설이는 사이에 죽어버리자 자기에게 왜 말도 안 했느냐고 상찬씨에게 욕만 잔뜩 얻어먹고 형제간에 의만 상한 판이라 누구하나 도와줄 사람도 없는 판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진외가 당숙모인 조일댁과 대동댁, 하나는 성질이 괄괄하고 하나는 덩치와 목소리가 버든에서 제일 큰 두 동서가 나타나 집에 있는 미역꼬투리를 찾아 고기 한 점을 못 넣고 멸치 몇 마리를 넣어 첫 국밥을 끓여 먹인 사단 끝에 몸을 풀고 그 소식을 들은 양등의 시어머니가 나타나 택시를 잡아 모자를 태우고 가다 언양읍에서 쌀과 미역과 국거리 광어를 사고 등말리로 돌아가 손부가 친정의 빈집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은 들어도 차마 가 보지도 못 하고 일식이 또식이 두 아이를 건사하느라 꼼짝을 못 하던 시조모 조동댁이

“손부야, 욕 받제? 또 머시마라면서?”

하면서 아이를 받아들고

“아이구, 내 새끼, 지 애비를 닮아 코도 눈도 다 또록또록 잘 만 생겼네.”

하다 문득 택시비를 주고 짐을 내리는 덩치 큰 며느리를 만나자

“아니, 니는 여 우째...”

하다 사태를 짐작하고 말꼬리를 흐리는데

“그래 손가락에 불을 붙여 하늘이라도 올라갈 건지 며느리 후처내고 손자 후처내고 영감 잡아 묵고 장남 잡아 묵고 잘 함더.”

평소와 달리 눈에 쌍심지를 켜고 그 추상같던 시어머니를 똑 바로 쳐다보며

“뭐 딸 다섯만 챙기면 하늘대앙꼰줄 알았능교? 와 손부가 친정서 아를 놓고 미역국도 제대로 못 얻어묵는다 카는데 그 태산 같던 딸년들 시고모들은 와 코빼기도 안 보이는고?”

일부러 커다란 미역대각과 쌀자루를 탁 소리 나게 땅바닥에 내려놓고 광어가 든 봉지를 금찬씨 손에 넘겨주며

“며늘아, 나는 간다. 미역국에 끼니 잘 챙겨 묵고 몸 잘 풀어라. 아이구 저 어린 것이 서방도 없는 집에 아를 서이나 나서...”

혀를 끌끌 차더니

“와요? 할마시 미역국 끓이놓고 또 딸년들 불러 처 믹일 껑교?”

새삼 돌아서서 염장을 질렀다. 어이가 없는지 기가 막히는지 평생처음 그 <아무 배운 것도 없이 덩치만 크고 눈치, 코치도 없고 물체도 느린 더러운 년>에게 조선 욕을 다 얻어먹은 조동댁이 오늘 따라 유난히 더 새파라동동한 얼굴로

“손부야, 가자 내 군불 때 놨다.”

엉금엉금 걸어가는 손부를 앞세우고 걸어가다

“야, 엄마다!”

“야, 우리 동생을 또 놓았다!”

“야, 까자도 사왔는갑다.”

기뻐 뛰며 제 어미에게 다가서는 두 아이에게

“비끼라! 이 더러운 궁가리에서 나온 자식의 새끼들아!”

괜히 죄 없는 아이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외식이는 5남매 중 제일 힘들게 태어난 만큼 가장 덩치도 작았고 사랑도 덜 받아 어미입장에서는 제일 마음이 쓰이는 아이였지만 잇따라 네째 성식이와 막내딸 현주가 태어나 아예 신경조차 쓸 수가 없어 늘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넷째가 태어났을 때는

“야, 일마는 영판 버든에 열찬이처남 닮았다. 공부하나는 끝내주겠다!”

하며 아버지 수진씨가 기뻐했고 막내 딸 은주가 태어나자

“아이구, 우리 공주, 미인들만 태어나는 박씨네 은주공주!” 하루 종일 뺨을 비비면서 흔들었다. 당시 일본 큰 딸이 보낸 돈 문제로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증조모 조동댁은

“가시나를 자식이라고 안고 흔드느니 차라리 디딜방아 방아 방아대가리를 어루라 안 카나?”

괜히 새파라동동한 얼굴로 심술을 부렸다.

“와요? 할매는 딸을 다섯이나 옆구리에 끼고 명절마다 외손녀 가시나에 증손녀 가시나들까지 데리고 몇몇 일을 파 묵히며 친손자, 친손녀는 떡국쪼가리 하나도 못 묵게 하면서?”

결코 만만하게 넘어갈 수진씨가 아닌지라

“마, 시끄럽다. 어데 사나자식이 어른들 보는 데서 알라나 안고 흔들고 지랄이고? 본 데 없는 짓이고?”

조동댁 역시 엉뚱한 시비를 걸어 금찬씨나 아홉 살 위의 맏이 일식이가 아이를 받아 안아야 했다. 큰아들 일식이는 장남에 귀염상이라 증조모 조동댁이 한 시라도 눈에서 떼지 않을 정도로 챙기고 둘째 또식이는 태생이 털털하고 거침이 없어 만사를 제 맘대로 하고 누가 나무래도 노염조차 타지 않으니 아무 걱정이 없고 넷째 성식이와 현주는 나름대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데 비해 언제나 부모의 관심 밖으로 혼자 나도는 자식이 바로 외식이었다. 거기다 맏이 일식이가 길천국민학교에 입학을 하고 나서 둘째 또식이가 막내 현주를 보아야 하지만 부모가 들에 나간 뒤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외식아, 내 골티 가서 홍시 좀 조아 오깨.”

“양계장 뒷산에 알밤 좀 조아 오께.”

한 마디 던지고 비호같이 사라지면 점심때 잠시 들어와 점심 먹고 사라지면 저녁때까지 종일 아이를 보아야했다. 이미 증조모 조동댁이 강당의 작은할아버지 집으로 떠난 뒤인 데다 맏이 일식이가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도

“우리 외식이 욕보는 구나. 엄마가 내 보고 학교 마치자 말자 칼치못 위에 밭에 오라 카더라.”

하고 나가버리니 달리 방법도 없었다. 다행히 이 딱한 셋째는 조금씩 자랄수록 얼굴이나 성격이 제 아비를 틀에 찍은 국화빵처럼 닮아가더니 매사에 영악하고 눈치가 빨라 실속이 없을 바엔 말 한마디 않고 잘도 견뎌내었다. 부지런하고 야무져서 칭얼대는 현주에게 우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씻기는 것은 물론 늘 배가 고프다는 성식이에게도 또식이가 주어온 밤이나 홍시를 주면서 잘도 챙겼다.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기 마련이듯 5남매 사이를 잘도 헤쳐 나갔다.

언젠가 열찬씨가 포도 한 자루를 사서 등말리에 갔을 때 어머니 금찬씨가 우물가에서 포도를 씻을 때 제일 먼저 제 몫 한 꼭지를 들고 헛간 뒤로 튄 아이도 바로 외식이였다.

외식이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였다. 이비 수진씨를 빼닮아 이목구비는 또록또록 반듯했지만 키도 작고 몸피도 가는 그 아이는 5남매 중 그 중 공부를 잘하는 편이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맏이 일식이는 공부는 보통이고 성격이 착하니 부모 모시고 농사를 지우면 되고 둘째 또식이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돌아다니니 뭘 할지 모르지만 덩치가 크고 힘이 좋으니 나중에 저거 할배처럼 목수일이라도 배우면 될 것이고 청식이는 생기기만 저거 외삼촌을 닮았지 머리는 안 돌아가니 공부는 안 되겠고 성격 활달한 거나 공 잘 차는 기 지 형 또식이를 닮았으니 나중에 화식이를 따라다니면 되고 현주는 막내공주니 두말 할 것도 없이 부잣집에 시집가면 되고 그래도 우리 집안에서 공부를 해서 펜대를 잡고 관물을 묵을 아이는 외식이 뿐이다.”

해서 당연히 고등학교를 보내줄 줄 알았고 그렇다면 좀 힘은 들더라도 죽을힘을 다해 울산의 학성고나 부산의 부산고나 경남고 같은 명문고등학교를 갈 생각을 했고 학교의 담임선생님도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젊을 때부터 하늘에 해 박힌 날치고 하루도 술을 거른 일 없이 입에 달고 산 아버지 수진씨가 농사일을 하다가 무단히 주저 않아 힘을 못 쓰며 시름시름 앓아 남천내 다리건너 동강병원에 가니 의사가

“사람이 술을 먹어도 우째 간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묵노? 아직 살아있는 것이 희한하네.”

하는지라 울상이 된 금찬씨가

“선생님, 그럼 우째하면 되능교?”

“선천적으로 간을 약하게 타고난 데다 워낙 몸을 험하게 쓰서 달리 방법이 없네요. 인지라도 술을 끊고 섭생을 하면 얼마간 더 살지 몰라도.”

하며 주사 한 대, 약 몇 첩을 지어주며 내보내다

“당장 술 끊어야 됩니다. 유전성 입니다.”

하는지라 조금은 기력을 회복한 수진씨가 병원 문을 나서다

“봐라, 일식이애미야!”

심상찮은 눈빛으로 부르는지라

(옳다구나, 그 동안 미안하고 앞으로는 술도 끊고 잘 하겠다 그 말이지!)

금찬씨가 기대가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내 내일부터 술을 끊기로 하고.”

“하고.”

“오늘 술 끊는 기념으로 딱 한잔만 하면 안 될까?”

“지랄하고 자빠졌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결코 말릴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결국 남천내를 건너 방천묵동네의 점방에서 진로 소주 한 병을 사서 뚜껑을 따며

“남들은 다 잘도 나오는 금 두꺼비, 복 두꺼비가 와 나는 그렇게 마셔도 두꺼비 아니라 깨구리나 참깨구리 하나도 안 나오노? 그저 금 두꺼비 하나면 논도 사고 밭도 사고 집도 고치고 준식이 공부도 시키고 우리 각시 옷도 한 불 해 주고...”
중얼거리는 걸

“마 잔주코 술이나 잡수소. 없는 놈이 바지저고리 두 불 되면 죽는다 캅디다.”

“그래? 그렇제. 자 당신도 한 잔 해라.”

하고 잔만 받아놓는 금찬씨를 바라보며 문득

“더러분 궁가리가 아니라 더러분 할마씨네. 어데 물리 줄 끼 없어 간 안 좋은 거나 물려주고 난리야!”

혀를 끌끌 찼다. 조금만 피로하거나 맘이 상하면 얼굴이 핼쓱하고 입술이 새파라져서 자리보존을 하는 조동댁을 닮아 간이 나쁜 두 아들 중 맏이 갑생씨는 환갑을 못 넘기고 죽었고 둘째 또생씨는 행방불명이 된 데다 다섯 고모역시 조금만 피로하면 맥을 못 추는지라 사위들에게 딸을 잘못 낳았다고 아이는 갖다 버리고 태만 키웠다고 명절 때마다 한 소리를 듣는 판이라 달리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아부지는 돌아가셨고 나도 아아 다섯이나 놓고 쉰 밑자리를 놓았으니 죽으면 죽고 그저 인명재천인데 우리 아아들이 걱정이다 다른 아는 몰라도 큰놈하고 또식이가 걱정이다. 벌써부터 한 번씩 입서부리가 새파래지는 것을 보면...”

혀를 끌끌 차며 부리시봇디미를 건너면서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산골 내 고향에-

길게 유정천리를 부르더니

“이 노래 작곡가가 백년설이라 캤제? 백년도 못 사는 인생에 백년설은 무슨 백년설이라고...”

눈이 강감추리한 게 방금이라도 쓰러져 잠이 들 것만 같더니 천전마을을 지나고 생피바우라고 부르는 천전뒷산 굴바우를 지나 이불마을옆 열녀각에 이르자

“세상에 별 열녀가 있나? 우리 금찬이가 열녀지. 당신 참 고생도 많이 했제?”

하며 쳐다보아 열찬씨의 가슴이 뭉클해져

“보소,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우짜든동 당신이나 술 좀 덜 묵고 오래 사소.”

코를 훌쩍이며 사개이 못을 지나 대밭 뒤를 돌아 등말리 논길로 접어들었다.

※ 이 글은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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