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래 시인이 읽어주는 좋은 시 (25)】 자잘한 생각들 - 진란
조승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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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8 08:00 | 최종 수정 2024.02.15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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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한 생각들
진 란
설 쇠고 귀가한 자식들 입춘에 다시 불러들인 시아버님, 초가을에 핀 매화처럼 시어머님 숨가쁘게 가시고, 첫눈 오자 남노송동 집에 가고 싶다고 가신 아버지, 아버지 돌아가시고 곧장 서둘러 가신 어머니, 네 분이 다 하늘로 돌아가신 후에 알았다 봄에는 한 분도 떠나지 않으셨다는 걸. 꽃 피면 가셔요 할 것을 봄 오면 가셔요 했더니 그래서 입춘 아침 서둘러 가신 시아버님, 응급실과 병실을 수없이 옮기시다 가신 시어머니... 시부모님 합제를 아버님 기일에 맞추니 해마다 제 혼자, 종기를 열꽃으로 피어댔다.
이제 성묘로 하자고 형제들이 정하고 나니
합제한 지 만 오년 만에 겨우 궁색은 면한 거라고
가벼워진 햇살을 빌려 어릉거리는 마음의 빚
매화 차 한 잔 올리면서 저도 잘 살다 갈게요
봄이 멀지 않다
- 『동행문학』, 2023년 봄호
형제자매가 많고 제사 많은 집에는 시집가고 싶지 않다는 사람과 바로 헤어졌다는 맞선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런 수발 고생은 안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설 쇠고 귀가한 자식들 입춘에 다시 불러들인 시아버님”은 “그래서 입춘 아침 서둘러” 가셨고”, “초가을에 핀 매화처럼” 가쁜 숨 몰아쉬던 시어머니는 “응급실과 병실을 수없이 옮기시다” 가셨고, “첫눈 오자 남노송동 집에 가고 싶다고 가신 아버지”는 당신이 태어나신 그 고향집에 가고 싶어 하셨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곧장 서둘러” 어머니도 떠나신 것이다.
“네 분이 다 하늘로 돌아가신 후에 알았다 봄에는 한 분도 떠나지 않으셨다”고 “꽃 피면 가셔요 할 것을 봄 오면 가셔요” 했더니 입춘에 맞추어 떠나셨다고, 꽃이 피기를 기다리지 않고 가셨다는 것이다. “시부모님 합제를 아버님 기일에 맞추니 해마다 제 혼자, 종기를 열꽃으로 피어댔다”고 제사 준비에 기력을 다 쏟으니까 몸살을 앓은 것이다. 그리움을 이야기하는 시인은 시댁에서 9남매의 장남 며느리로 억척스럽게 가사를 돌보았고 합제가 구정인 설날 지나고 초나흘에 지내니까 몸살이 안 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제 성묘로 하자고 형제들이 정하고 나니” 부담은 좀 줄었겠으나 “가벼워진 햇살을 빌려 어릉거리는 마음의 빚”은 남아 있어서 가신 분들에게 꽃 차, “매화 차 한 잔 올리면서” 시인도 “잘 살다 갈” 것이라고 이제는 머지않은 “봄”을 가늠해 본다. 그러나 봄은 한 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봄은 가도 또 올 것이니 꽃밭을 더 열심히 가꾸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 조승래 시인 : ▷경남 함안 출생, 2010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 시집: 《칭다오 잔교 위》, 《뼈가 눕다》, 《어느 봄바다 활동서 어류에 대한 보고서》, 《적막이 오는 순서》 외 ▷계간문예 문학상(2020), 조지훈 문학상(2021) 수상 ▷단국대 겸임교수 역임(경영학 박사) ▷한국시인협회, 문학의 집 서울, 한국문인협회 이사, 시향문학회 회장, 가락문학회, 시와시학, 함안문인회 동인으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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